강진장이 섰다 … 사람이 모였다

1976년 강진상설시장이 막 개설된 후 강진읍장의 모습이다. 강진의 인구가 10만명대에 달했던 시대다. 장옥이 체계적으로 들어서면서 비로서 시장으로의 면모를 갖추었다. <강진일보 자료사진>
추석대목장이 얼마남지 않았다. 전통적으로 추석대목장은 1년중 가장 큰 장이 선다. 설대목장이 있지만 추석장만은 못하다는게 상인들의 설명이다. 추석을 맞아 강진의 시장에 대해 알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강진은 오래전부터 시장이 발달한 고장이다. 상인도 타지역에 비해 많았다. 시장이 발전한 것은 상인들이 많았기 때문이고, 상인들이 많았던 것은 그만큼 시장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4년(1473) 기록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전라도의 백성이 스스로 서로 모여서 시포를 열고 장문(場門)이라 불렀는데, 사람들이 이것에 힘입어 보전하였습니다.’

이 기록을 근거로 우리나라에 시장이 출현한 시기를 15세기로 판단한다. 지금은 시장이라고 하는데 당시에는 장문이라 불리었다. 초기에는 읍내를 중심으로 하여 15일이나 30일에 한 번씩 열리었으나, 점차 인구가 밀집하고 교통이 발달한 군사지역이나 포구, 역원 등지로 확산되며 5일마다 열리는 체제로 자리 잡았다.

조선 초기에 시장 등장

강진은 다른 지역에 비해 시장이 빨리 들어섰다. 1417년 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에 있던 전라병영성이 강진의 병영으로 옮겨오면서 시장이 활성화된다. 이때 강진에는 읍내장(2⋅5⋅9일, 월 9회 개시), 금천장(4⋅10일, 월 6회 개시), 고읍장(1⋅7일, 월 6회 개시), 칠량장(6⋅9일, 월 6회 개시), 대구장(2일, 월 3회 개시), 백도장(3⋅7일, 월 6회 개시), 보암장(1일, 월 3회 개시), 고군내장(3⋅6⋅8일, 월 9회 개시) 등 8개가 있었다.

18개면이 있었으니 2~3면마다 1개 장이 있었던 셈이다. 그 가운데 읍내장과 고군내장은 월 9회 열리는 대형장이었다.

1934년 칠량장 목화시장의 모습이다. 당시는 수매된 목화가 대부분 일본으로 건너갔을 것이다. '임원경제지'란 역사책에 칠량장은 1800년대 초반에도 섰던 것으로 기록이 전한다.<강진일보자료사진>
읍내장은 지금의 강진읍 도원리 배드리에서 열렸던 장으로 남당포라는 대포구를 끼고 있었다. 고군내장은 병영이라는 큰 소비시장을 끼고 있었다. 그리고 금천장, 고읍장, 칠량장, 백도장은 당시 일반적인 형태인 월 6회 열리는 5일장이었다. 그런가 하면 대구장, 보암장은 10일마다 월 3회 열리는 소형장이었다.

강진사람들은 고려시대부터 청자를 팔러 다녔다. 강진사람들은 고려시대 최고 기술로 꼽히는 상감청자를 만들어 중국으로 수출도 했다. 중국 남송시기에 국가의 수도였던 중국 절강성 항주 부근에서는 상감청자 편이 많이 발굴됐다. 강진청자는 수도 개경 뿐 아니라 제주도에도 판매됐다.

고려사회를 대표하는 정치가이자 학자였던 익재 이제현(李齊賢 1287~1367) 선생의 저술 ‘익재난고 제4권’에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제주도에 가서 제주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적은 것이다.

‘거꾸러진 보리이삭 그대로 두고/ 가지 생긴 삼도 내버려 두었네/ 전라도 상인들이 청자와 백미를 가득 싣고서/ 북풍에 오는 배만 기다리고 있구나/

익재선생이 활동하던 시기가 11세기 후반부터 12세기 중반까지 인데, 이때 강진청자가 가장 화려한 작품성을 보일 때이다. 강진 상인들이 배에 청자를 싣고 제주를 오가며 상업활동을 했던 것이다.

또 청자를 싣고 가면서 백미도 함께 가지고 왔다는 것도 관심을 끄는 부분이다. 오래전부터 강진은 제주에 쌀을 공급하는 곳이었다.

배에 청자싣고 제주까지 갔다

강진~개경간 뱃길이 재현되는 모습이다. 고려시대 청자를 유통했던 강진은 이미 시장질서가 형성되고 있었다.
조선 태종 17년(1417년) 전라병영이 강진군 병영면으로 이전해 오면서 상업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병영에서는 거대한 토목공사가 벌어졌다. 병영성의 규모는 둘레가 2천820척, 높이는 18척 정도였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지금의 미터법으로 따지면 길이가 약 1천 60m, 높이가 5m 정도의 규모다.

병영성을 축조할 때는 전국적으로 상업이 발전하지 않아 각 지방이 자급자족의 형태로 산물거래가 이뤄졌으나 병영에 갑자기 큰 성을 쌓느라 수년간 수백~수천명이 징발되어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물자 소비가 폭증하고 이에따른 수요가 증가해 병영사람들이 전국에서 물건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모양을 갖춘 병영성은 제주도를 포함한 전라도 지역 53주 6진을 관할하는 거대한 병마절도사영이었다. 당시 병영성에 소속된 군인은 자그마치 1만122명 이었다. 이중 군관과 군병, 장인 등 515명이 돌아가면서 병영에 들어와 근무를 했기 때문에 병영은 전라도 53주 6진에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전라병영성 이설로 상업 급진전

여기에 병사들을 면회오는 가족들의 발길도 이어졌고, 병마절도사영에 각종 세금을 납부하는 사람들의 숫자도 적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자연스럽게 상인들이 출현했고 이들은 각종 물품을 공급하며 큰 세력으로 성장했다.

그래서 북에는 개성상인 남에는 병영상인이란 말까지 생겨났다. 병영상인의 출현은 이렇듯 병영성의 출현과 이에 따른 인구의 대량유입, 각종 군수용품이나 생필품 수요의 폭증, 좁은 면적의 지리적 조건이 어우러지면서 장장 600여년의 상업역사를 이어왔던 것이다.

1894년 전라병영성이 폐영된 후에도 병영상인들의 활동은 계속됐다. 병영상인들은 처음에 적은 밑천으로 부보상이 되어 5일 시장을 전전하며 돈을 벌었고 자본이 축적되면 상점을 차리고 거기서 자본이 더 커지면 보다 더 큰 도시로 진출했다.

병영상인의 활동무대는 전국이었다. 강원도 속초에서 인천, 서울, 군산, 목포, 부산, 광주 등에 많이 진출했고 고흥, 벌교, 보성, 장흥, 강진, 해남, 완도 등으로 진출하여 그 곳 상권을 장악하였다. 중국의 만주도 활동무대였다. 오늘날도 광주광역시 충장로 상가나 목포의 주요 오일시장에는 병영출신 상인들이 상권을 장악하고 있다.

병영상인들간에 끈끈한 유대관계를 형성했다. 서로를 신뢰하며 장사를 하다보니 믿을 만한 인간관계가 형성되어 단결력도 대단했다. 병영상인들은 무엇보다 넉넉한 정의 문화에 익숙한 상인들이었다.

남도의 푸짐한 분위기에서 생활하다 보니 서로를 배려하고 챙겨주는 사이로 발전하게 되어 개성상인처럼 깍쟁이라는 말을 듣지 않고 생활한 사람들이었다. 병영상인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강진에서 끈끈하게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학명리 배다리가 옛 중심지

강진장은 원래 지금의 강진읍 서쪽인 학명리 배다리란 곳에 있었다. 배가 닿는 곳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지명이다. 강진장은 완도지역의 각 섬과 인근 장흥, 해남사람들도 이용하던 장이었다. 배를 타고 오면 강진만을 따라 곧장 시장으로 올 수 있는 구조였다. 

배다리 시장 주변에는 큰 모래사장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시장이 열렸다. 이 모래사장은 시장 뿐 아니라 강진의 주요행사가 자주 열리는 종합운동장 역할을 했다.

동아일보 1907년 5월 11일자에는 강진 최초의 사립학교인 금릉학교가 봄철 운동회를 배다리에서 열었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강변에서 열린 금릉학교 봄 운동회에 95명의 학생들이 행사를 했는데 5천여명의 관람자들이 모여들어 성황을 이뤘다’고 했다.

난장도 자주 열었다. 난장이란 일종의 축제였다. 요즘에는 자치단체나 기관에서 축제를 주최하고 주관하지만, 옛날에는 돈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부담을 해서 축제를 열었다. 난장이 터지면 보통 일주일 정도 먹고 놀자판이 열렸는데, 씨름대회는 물론 윷놀이, 그네뛰기등 다양한 놀이가 펼쳐졌다.
 
물론 난장 기간 동안 음식은 모두 공짜로 제공됐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 난장이 있다는 소문이 나면 주변지역에서 이름난 왈짜들이 수없이 몰려 들었다고 한다. 배다리 강진장은 지금으로 말하면 종합시장이나 종합운동장이었고, 사람들의 큰 놀이터였다.

강진장은 1935년 9월 27일 현재의 강진읍 동성리 187-1 일대로 옮겨 졌다. 해방이 되기 전의 일이다. 강진읍의 인구가 점차 늘어나면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읍내 중심지역에 장을 열 필요가 생겼다. 2만여㎡의 부지에 1,564㎡의 매장면적을 갖춘 중규모의 시장이었다. 당시 장옥수가 42개였다.
 
강진읍장은 1950년 6.25 동란을 겪은 후 지역 생산활동이 활발해 지면서 장족의 발전을 거듭했다. 그러다가 1976년 강진상설시장이 들어서면서 큰 변화를 겪었다. 지금도 그 건물이 있는데 2,640㎡의 부지에 1,459㎡규모의 장옥을 지었다. 강진상설시장은 1976년 7월 30일 개장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90년대 후반까지 강진군 면단위에는 모두 7개의 오일장이 있었다. 그러다가 하나하나 문을 닫아 지금은 마량장과 병영장, 성전장 세곳이 남아 있다.

면단위에는 오일장이 세곳 유지

마량장은 건너편 완도군 고금도 주민들이 이용하는 곳이여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고, 병영장은 병영상인이라는 오랜 전통을 지키며 지금도 장이 열리고 있다. 성전장은 다른 남아있는 장에서도 그 규모가 아주 적게 운영되고 있다.

마량장은 1979년 강진에서 가장 늦게 정기시장이 된 곳이다. 봄철이면 완도의 약산 흑염소가 많이 나온다. 인근 완도군의 고금도와 약산도, 금일도 사람들까지 이용하는 오일장이다. 덕분에 오늘날까지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 마량장은 매월 1일과 6일 장이 열린다.

병영장은 1932년 현재의 자리에 문을 연 정기시장이다. 강진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시장중의 하나다. 그 전에 병영시장은 병영성 주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653년부터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도중 표류해 1666년까지 조선에서 지내며 그 중 7년을 강진 병영성에서 거주했던 하멜의 기록중에 “병사가 정기적으로 시장의 풀을 뽑게 했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병영장은 매월 3일과 8일에 장이 선다.

성전장은 1931년 문을 연 강진에서 가장 오래된 시장이다. 강진장의 우시장도 유명했지만 성전의 우시장도 아주 유명했다. 면단위 시장의 우시장이 크게 선 것은 아주 드문 사례다.

그만큼 성전이 교통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인근 해남의 계곡면을 비롯한 북부지역 주민들이 많이 이용하는 장이었다. 성전장은 매월 1일과 6일 장이 선다. 마량과 같은 날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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