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강진에서 회회청(回回靑)을 찾으라

도암 만덕산에서부터 해남 땅끝까지 이어지는 규사광맥은 우리나라에서 최고 품질을 자랑한다. 조선시대 전국을 찾아나섰던 코발트안료도 국내에서는 강진에서 발견된 것이 가장 진품에 가까웠다고 한다. 청자가 강진에서 생산된 이유가 유약을 만드는 다양한 광물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강진의 자랑거리다.
강진의 규사의 품질이 전국에서 최고수준이라는 것을 지난호에서 설명했듯이 강진은 광물과 관련된 여러 가지 역사적인 기록이 전해진다. 고려시대때 강진에서 청자가 생산된 이유가 흔히 세가지가 거론된다.

첫째는 청자를 만드는 질 좋은 고령토가 풍부했고, 두 번째는 청자를 만들때 소요되는 땔감이 충분했으며, 셋째는 수도 개경으로 가는 뱃길이 발달해서 청자가 강진에서 발달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한가지 더 거론할 수 있는 것은 강진에는 규사란 질 좋은 광물이 풍부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고령토 역시 광물에 해당된다.

고려시대 화려하게 꽃피웠던 청자는 조선시대들어 시들해지다가 조선말에 들어서는 임금도 못알아 볼 정도로 잊혀진 존재가 된다.

조선말 고종임금은 이토 히로부미가 개경에서 도굴해 온 고려청자를 보여주자 “이 푸른 그릇들은 어디서 만들어진 것이오”라고 물었다.

이토는 “이 나라의 고려시대 것입니다”고 답했다. 그러자 고종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런 물건은 이 나라에는 없는 것이오”라고 말했다. 고종황제는 청자가 조선에서 만들어진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백자가 꽃피웠던 조선시대, 강진이 고려청자 생산지라는 것은 잊혀졌지만 강진의 광물이 잊혀진 것은 아니었다. 아니 강진의 광물은 더욱 빛을 발했다.

회회청(코발트)는 수 천년 전부터 유리나 도자기에 푸른 색을 내는데 사용되어 왔다. 기원전 2천 년대에 제조된 이집트의 도자기와 이란의 유리구슬에 코발트가 들어있으며, 당나라와 명나라 때 만들어진 도자기의 푸른색도 코발트 광석을 이용하여 얻었다.
조선왕조실록 예종 1년(1469 기축) 10월 5일자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보인다. ‘사기를 구워 만들 때에 회회청과 비슷한 사토를 써서 시험하여 아뢰게 하다.’ 본문의 내용은 이렇다.

‘승정원에서 교지를 받들어 전라도 관찰사에게 치서하기를,
“강진현에서 생산하는 회회청(回回靑) 은 일찍이 채취하여 시험해 보았더니 간혹 진실한 것이 있었다. 경(卿)은 널리 방문하여 공사간의 사기를 구워 만드는 때에 모름지기 회회청과 비슷한 사토(沙土)를 써서 시험하여 아뢰라. 읍인이 이 채색을 얻어서 바치면 혹은 벼슬을 상주되 초자하여 서용하며, 혹은 베 50필을 상줄 것이니, 본도의 거민에게 널리 고유하라.” 하고, 아울러 제도에도 고유하였다.’

‘초자하여 서용’한다는 말은 품계를 건너 뛰어 올리고, 죄가 있어 면직시켰던 자를 다시 임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강진사람들이 회회청을 구해서 한양으로 보내면 파격의 대우를 해주겠다는 뜻이다.   

회회청은 코발트 안료다. 청화백자에서 푸른색 그림을 만드는 원료가 바로 회회청이었다. 청화백자속의 용그림이나 포도송이등이 모두 회회청으로 색깔을 낸 것이다. 이 회회청이 무엇이 그리 중했길래 이토록 왕명으로까지 파격을 내걸었던 것일까. 그것도 강진 사람들에게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5세기 무렵 청화백자를 처음 만들었으나 회회청이 자체 생산이 안돼 아라비아 상인들을 통해 중국에서 수입을 해서 사용했다. 여기서 말하는 회회(回回)라는 표현도 페르시아나 아랍상인을 의미한다.

그런데 회회청이 바로 강진에서 생산되고 있으며 여러 가지 시험을 해 본 결과 수입산과 품질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실록은 적고 있다. 그러면서 예종임금은 여러 가지 실험을 더 해보게 하고 채색을 내서 조정에 바치면 벼슬과 함께 큰 상을 내리겠다는 말도 하고 있다.

회회청은 페르시아의 산화코발트 안료로 청화백자를 만드는 푸른색 물감이었다. 페르시아에서는 13세기 이전부터 백토에 푸른색 산화코발트 안료를 칠한 도기들을 제작했다.

그 안료가 회청(回靑) 혹은 회회청(回回靑)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에 들어가 ‘청화’가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1457년(세조 3년) 명나라에서 회청이 수입되면서 조선에서도 제작이 시작된다.

그런데 이 회회청이 금 보다 비싼 가격에 거래됐다. 원산지인 이란 고원의 카샨에서 실크로드나 뱃길을 이용해 이동해 오면서 아라비아 상인들이 막대한 이윤을 붙였을 것이다.

세조임금은 이것을 국내에서 확보할 수 없는지 백방으로 수소문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상금을 걸기도 하고 회회청을 찾은 사람에게는 벼슬을 내리겠다는 약조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회회청이라고 가져온 물질을 실제 백자를 구워 사용해 보면 아랍에서 온 회회청 기능을 못했다. 

청화백자는 순도 높은 백자에 청색의 코발트 안료로 무늬를 그리고, 그 위에 투명유약을 입혀 환원염에서 구워낸다. 우리 나라에는 14세기 말엽에 전래되어 생산단계에 들어간 것은 15세기 중엽경으로 보인다.
강진에서 회회청을 바쳤다는 첫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세조 9년(1463) 5월 24일에 나온다. 경차관 구치동이 강진에서 회회청을 얻어 바쳤다고 짧게 기록돼 있다. 여기서 관심이 가는 것은 경차관이 회회청을 바쳤다는 것이다.

경차관은 조선시대 특수임무를 띠고 각 도에 파견된 임금의 특명관을 말한다. 구치동이란 사람은 회회청을 찾아오라는 임금의 특명을 받고 전국을 돌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 세조 9년(1463년) 7월 3일자에는 경상도 경차관 유완이 밀양부에서 회회청과 비슷한 돌, 의성현에서 회회청과 비슷한 돌을 가져와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회회청이 아니라 회회청과 비슷한 돌이였다는 표현이 눈에 띤다. 임금의 명을 받고 전국에서 회회청이라고 올린 물건이 많았으나 ‘유사 광석’으로 판명난 것이 많았던 것이다. 또 세조 10년 8월에도 전라도 경차관 구치동이 순천부에서 회회청과 비슷한 돌을 캐냈는데 역시 ‘그게 아니올시다’ 였다. 

결국 예종임금 1년(1469년) 10월 5일자 기록이 등장한 것이다 ‘강진현에서 생산하는 회회청을 일찍이 채취하여 시험해 보았더니 간혹 진실한 것이 있었다’ 그러니까, 전국에서 경차관을 통해 회회청이라고 한 것을 모아서 시험을 해 봤으나 강진산만 회회청의 색깔을 냈다는 것이다.

그것도 항상이 아니라 간혹 그랬다는 것으로 봐서 강진산 마저도 임금의 소원을 시원하게 해결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정에서는 결국 회회청을 중국에서 직수입하기로 결정한다.

조선시대 청화백자의 안료였던 회회청(回回靑)이 소량이나마 강진에서 채취됐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청화백자가 중국에서 들어오기 전 조선사회에서는 회회청(산화코발트)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회회청 자체가 있는지 없는지 조차 모를 때였다.

그런데 남쪽 땅끝 강진현에서 회회청 비슷한 광물이 나왔고 이를 시험해 보니 청화백자의 가까운 색깔이 나왔던 것이다.

강진사람들은 이미 회회청의 씀씀이를 알고 있었다는 것일까. 강진은 고려시대 수백년 동안 청자를 구웠던 곳이였다. 상감청자를 만들었고, 청자의 그림을 내는 각종 안료 채취가 발달했던 곳이였다. 강진의 도공들은 산화코발트를 이미 고려시대에 발견해서 그것을 청자에 적용하는 방법을 연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또 한가지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회회(回回)가 아라비아, 즉 아랍국가를 나타내는 의미라는 것이다. 회회는 또 서역인(西域人), 대식인(大食人) 등으로도 불린다. 이들은 이미 6세기경에 한반도의 남쪽지역을 오간 것으로 확인된다.

조선왕실에서 그토록 찾던 회회청이 강진에서 나온다는게 확인되고 실제 실험을 해서 중국것과 비슷한 성능을 가진 것으로 판명됐으나 크게 상용화되지는 못했다. 아마도 그 양이 미미했거나 궁극적으로 품질이 아라비아의 것에 못미쳤을지 모를 일이다.

결국 국내에서 회회청을 다량으로 확보하는데 실패한 조선왕조는 직접 중국과의 무역을 추진한다. 청화백자를 만드는 안료인 강진산 회회청이 다소 성능을 발휘했으나 그 양이 극미량이었던 것 같다. 성종 9년(1478)년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신하가 왕에게 아뢰었다. 상의원(조선시대 임금의 의복 등 왕실의 재물을 관리, 공급하는 일을 담당하였던 관청)에서 쓰는 회회청을 보니 그 소비가 매우 큽니다. 쇠망치로 푸른 덩어리를 부수어서 그 가운데 좁쌀 같은 것을 취하여 쓰는데 중국에는 다른 기술이 있다고 합니다. 북경에 가는 화원(畵員)에게 그 기술을 전수 받아서 오게 하면 어떠하겠습니까’ 성종임금이 “좋다. 그렇게 하라”하였다.

조정에서는 중국에 가는 이계진이라는 화원에게 흑마포 12필을 주어서 회회청을 사오고 그 제조기술도 배워오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이계진이라는 화원이 중국에 가서 회회청을 사오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가져간 흑마포도 모두 써 버렸다며 되돌려 주지 않은 것이다.

이 일로 이계진과 그의 가족은 물론 이 사건에 연류된 수백명이 체포돼 갖히게 된다. 무역사기사건이였던 것이다. 조정에서는 흑마포 대신 곡식등을 받을 것도 검토 했으나 흑마포를 두배로 받는 것으로 최종 결정하게 된다.

조선시대 회회청을 둘러싸고 상당한 암투가 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회회청은 귀한 것이였고 여러 가지 이권과 관련된 상품이었던 것임에 틀림없다. 이후 중종 36년(1541)년 중국에서 회회청을 무역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러다가 광해군 11년(1619) 이홍규란 사람이 드디어 중국에서 회회청을 구입해 오는데 성공한다. 광해군이 다음과 같이 하교한다.

“이 채색에 대해 명령을 내린지 여러해가 되었으나 무역을 해오지 못했는데 이홍규가 마음을 다하여 무역하여 돌아왔으니 매우 가상하다. 참작하여 시상하도록 하라”

회회청을 구입해 온 일이 왕으로부터 큰 상을 받을 정도로 소중한 일이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회회청 실록을 정리해 보면, 15세기 무렵 조선에서는 청화백자를 처음 만들기 시작했으나 아라비아에서 수입해 오는 회회청이 너무 비싸고 귀하기 까지 했다.

그래서 조선내에서 회회청을 찾기 위해 왕의 특사까지 지방 여기저기에 파견했는데, 전국에서 유일하게 강진산 회회청이 그중 제일 좋은 성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양이 너무 적어서 중국과 무역을 시도했는데, 무역사기까지 당하고 우여곡절 끝에 수입에 성공한다. 조선왕조실록에 회회청이 처음 등장(1469)한 후 150년만의 일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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