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들 “강진산 규사를 확보하라”

도암면 석문리 옛 한국유리강진광업소 뒷산은 강진에서 가장 먼저 규사 채광이 이루어진 곳이다. 일제강점기 이곳에서 채광된 규사는 해창부도로 옮겨져 배로 일본으로 싣고 갔다. 이 산은 아직도 당시 채광했던 흔적들이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조선에 들어 온 일본인들의 눈에 가장 욕심냈던 것은 흰쌀이 아니었다. 규사라는 흰광물이었다. 일찍이 철강산업을 키웠고, 이를 기반으로 대동아공영을 꿈꾸었던 일본에게 가장 필요한 광물중의 하나가 규사였다.
 
규사는 유리를 만드는 원료지만 일정 부분 함량을 철광석에 넣으면 불순물을 제거해 주고 철을 더욱 강하게 했다. 비행기나 탱크와 같은 중화기를 만드는데 규사는 필수품이었다.
 
용광로를 구성하는 내화벽돌에도 반드시 규사가 들어갔다. 그 뿐이 아니다. 군인들의 철모에도 규사가 필수품이었고, 군인들이 오지에서 흙탕물을 걸러서 식수로 사용할 때도 반드시 규사성분이 들어간 필터가 필요했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조선에 들어오자 마자 규석광산에 눈독을 들였다. 그들의 눈에 확 띤 곳이 강진이었다. 강진은 여로모로 최고의 적지었다.

우선 규사 성분이 우리나라에서 최고였다. 1914년 일제가 흑산도에서 ‘유리 만드는 흙(규사)’을 대규모로 발견해 개발한적이 있으나 바닷가 모래형태여서 바위속에 꽁꽁 박혀 있는 흰쌀 같은 강진의 규사보다는 품질이 훨씬 떨어진 것이었다.

강진은 또 해상운송에 결정적인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일본의 군수물자업체가 대부분 나가사키등을 중심으로 한 남부지역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이곳으로 규사를 실어가기에 강진은 최고의 적지였다.

규석의 원석 모습이다.색상이 흰색일수록 순도가 높은 것이다.강진산은 국내에서 생산되는 다른 규사보다 순도가 매우 높다.
비슷한 시기에 강원도에서 규사광산이 몇 곳 발견 됐으나 바닷가 부두까지 실어 나르는 운송이 최대 난제였다.

강원도 산골에서 아무리 많은 규사를 채취해도 이를 바닷가 까지 실어 나르려면 길을 새로 뚫어야 했고, 그 길은 협곡사이를 지나야 하는 난공사였다. 무엇보다 규사의 질을 좌우하는 이산화규소(SiO₂)함량을 분석해 보니 강진보다 훨씬 떨어졌다. 

1920년대 중반 일제는 강진 규사에 관심을 집중한다. 우선 일본인 광산업자를 앞세워 도암면 성자마을 석문산 일대와 석천마을 합장산 일대, 월하리 덕룡산 일대에 대한 광권을 설정했다. 물론 일본의 광업관련 법률에 의거한 것이었다. 그래서 강진에서 규사광산은 일본인만 할 수 있는 사업이 됐다.

최초의 채광은 도암면 석문리 용문사 뒷산에서 시작됐다. 지금의 한국유리 옛 공장이 있던 뒷산이다. 쌀처럼 희고 은처럼 빛나는 규사가 쏟아졌다. 쌀처럼 희다는 것은 그만큼 불순물이 없다는 뜻이다.

이곳에서 채굴된 규사는 광석채 트럭에 실려 해창 부두로 옮겨졌다. 일제는 해창에 간단한 부두시설을 만들고 이곳을 통해 강진의 규사를 대대적으로 반출하기 시작했다.

훗날 강진의 규사부두는 도암 망호부두가 되지만 일제강점기 최초의 규사부두는 해창이었다. 20여년 동안 엄청난 양의 규사가 일본으로 실려갔다.

일제말이 가까워지면서 조선인 강제동원이 많아졌다. 강제 동원된 조선인은 태평양전쟁의 최전선으로 끌려가야 했다. 그 길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광산에 취직하는 것이었다.

광산은 군수물품을 생산한다는 성격이 있었기 때문에 강제동원 면제 대상이었다. 석문산 규사광산은 강제징집을 면하려던 주민들의 발길이 많아 위험한 직업이었지만 상당히 인기있는 광산이었다고 한다.

당시 강진에는 규사광산외에도 칠량 면소재지에 고령토광산이 있었고, 지금의 군청 뒷편에 텅스텐 광산등이 있어서 주민들의 피신처가 돼 주었다.

도암면 석문리에는 옛 한국유리 강진광업소건물이 지금도 일부 남아있다.
일본인들이 떠나간 후 강진의 규사광산은 1957년이 되어서야 광권이 한국사람에게 넘어오고 채광을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광권소유자가 일본인이었다. 이를 인계받은 한국인은 서병훈이란 사람이었다.

1964년에는 광권 소유자가 임영봉이란 이름으로 바뀐다. 1988년에 (주)만덕통상을 창립한 임영훈 선생의 아들이며, 현재 만덕광업을 실질 소유하고 있는 임창범사장의 부친이다.

임영봉 사장이 1970년대 초에 지금의 옛 한국유리 강진광업소 뒷산에 조그만 파쇠공장을 만든다. 초등학교 시절(1970년대 초반) 필자도 학교 소풍을 종종 그 광산으로 가곤 했는데, 바위를 폭파하는 현장이 있고, 동내 방앗간 처럼 생긴 작은 파쇠공장은 저 아래쪽에 있었다.

현장과 공장사이에 도르레를 단 작은 수레가 레일을 타고 폭파석을 실어 나르곤 했다. 공장안에는 맷돌 처럼 생긴 커다란 장비가 있어서 그것으로 원석을 파쇠해 일정하게 작은 크게가 되면 작은 마대자루에 담겨 트럭에 실려 해창 부두로 갔다.

해창에는 부산에서 배가 왔는데 배가 오면 며칠씩 머물었다. 그럴 때면 강진읍내 색시집이 북적거렸다. 선원들은 참 돈을 많이 썼다. 부산에서는 작은 주물공장으로 대부분 납품됐고 일부는 일본으로 수출된 것으로 전해진다. 

일본인들의 강진규사에 대한 관심은 1980년 강진에서 본격적인 규사생산이 시작되면서 다시 재개되기 시작했다. 그동안 강진의 규사생산 체계도 많이 바뀌었다. 한국유리란 큰 유리전문회사가 들어 온 것은 강진의 규사생산에 큰 전환점이 됐다.

대기업군에 속했던 한국유리공업(주)이 1978년 3월 도암면 석문리 4-13일대에 규사공장설립 신청과 함께 그해 6월 ‘한국유리 강진광업소 규사분공장’을 준공했던 것이다. 한국유리 강진광업소의 준공은 강진의 기업문화가 획기적으로 변하는 전환점이 됐다.

강진광업소는 대지가 2천287평에 건축면적이 123평으로 규사를 분쇄하는 능력이 하루 6시간 기준으로 65톤에 달했다. 한국유리는 이곳에 1억2천700만원을 투입했다.

한국유리는 당시에 인천과 부산, 군산등지에 유리공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강진에서 생산된 고품질의 규사분말을 충분히 소화할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유리는 공장을 짓기 전 도암면 일대에 규사암을 채광할 수 있는 양을 1천만톤을 확보하는 등 강진 공장을 장기적으로 운영할 여러 가지 준비를 했다.

초창기 한국유리의 직원은 56명이었다. 회사직원은 이후 120명까지 불어났다가 1997년 문을 닫을때 직원수가 60명이었다.

20인 이상 고용 회사가 남양사료 딱 하나 있던 시절 직원이 60명이 다되는 회사가 문을 열었으니 큰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직원들의 구성은 전기직을 비롯한 대부분의 기술직들은 외지사람들이 많이 차지했지만 기타 사무직이나 현장직 직원들은 지역 사람들을 채용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대부분 지금말로 정규직 사원이었다는 것이다.

인근 마을에서 농사를 짓다가 강진광업소 생산직으로 들어가 갑자기 대기업 정규사원이 된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서울본사와 부산공장, 인천공장, 군산공장 등의 정규직 사원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았다.

매월 15일 월급날이면 흰봉투에 컴퓨터 글씨로 찍혀 나온 월급봉투가 하루도 늦지 않고 지급됐다. 요즘처럼 은행 계좌에 입금해주는 것이 아니라 빳빳한 현금을 봉투에 넣어주는 방식이었다.

강진광업소는 2~3곳에서 규사 원석을 채굴했다. 대표적인 곳이 도암의 소석문, 그러니까 덕룡산 등산로 입구가 있는 곳에 광산이 있었다. 지금도 채광흔적들이 선명히 남아 있고, 지금도 그 일대 규사암들이 모두 한국유리 소유로 돼 있다.

현재 만덕광업 소유의 광권이 도암 월하마을 뒷산을 중심으로 540㏊가 있고, 한국유리 소유의 광권이 역시 비슷한 규모로 도암면 석천마을 뒷산과 행정적으로 도암 성자마을에 속하는 옛 한국유리 강진광업소 뒷산에 산재해 있다.

아무튼 1980년대 들어 강진에서 다시 규사생산이 활발해 지면서 일본인들이 강진규사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50~ 60년대를 지나 70년대가 됐지만 일본은 여전히 규사에 목말라 하고 있었다.
 
일본은 시멘트 원료인 석회석은 많지만 규사매장량은 적었다. 더욱이 일본은 지진이 많은 곳이여서 굴을 파면서 규사를 확보하지 못한 나라였다.

그래서 해외로 눈을 돌렸지만 중국이나 동남아 지역은 일단 수송비가 많이 들었다. 품질도 강진것에 비해 많이 떨어졌다. 뱃길이 원할한데다 품질까지 좋은 강진규사를 실어오는 것은 일본이 가장 선호하는 규사확보책이었다. 

1980년 어느날, 일본의 규사수입 업자들이 만덕광업을 찾아왔다. 그들은 수입 상담을 하더니 회사측의 허락을 받고 이곳저곳에서 규사원석을 직접 체집하기 시작했다. 일종의 샘플체취였다.
 
그들은 회사측에서 제공한 샘플은 쳐다보지도 않고 자신들이 직접 샘플을 채취했다. 일본인들은 지난해까지 3~5년 주기로 만덕광업 채광지를 찾아서 샘플을 채취해 왔다.

같은 광맥이 나오는지, 품질은 균일한지를 일정한 시간을 두고 체크하는 것이었다. 일본인들은 체계적으로 강진의 규사품질을 검사하면서 나름대로 데이터를 축적해 왔던 것이다. 

그리고 올 초, 일본 수입업자가 1,500톤의 강진규사를 수입해 갔다. 그동안 축적해 온 데이터를 바탕으로 강진 규사의 품질과 균질성, 광맥의 일관성등을 인정한 것이다.

예전에는 해창이나 도암 망호부두를 통해 나갔던 규사가 올초 일본 수출을 위해서는 목포항을 이용했다. 다시 시대가 바뀐 것이다. 이 규사는 배편으로 일본으로 들어가 JFE라는 일본 2대 제철회사에서 사용됐다.

일본의 수입회사는 만덕광업에 월 5천톤의 수입계약을 체결하자고 요청했었다. 그러나 그동안 만덕광업이 포항제철등 국내업체에 공급한 물량이 있기 때문에 일본에 월 5천톤을 추가로 생산할 능력이 부족해 협의가 진행중인 상태였다. 그러다가 일본의 무역보복이 시작됐고, 한‧일간의 관계가 급랭하면서 현재 답보 상태에 있다.

국제적으로 광물은 자원화되고 있는 추세가 뚜렷하다. 중국은 이미 2007년에 규사와 모래의 수출을 금지했고, 최근들어서는 동남아의 대표적인 규사생산국인 베트남이 규사의 수출을 금지시켰다. 갈수록 강진의 규사는 그 가치가 뛸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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