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명화 벤허(Ben Hur)가 강진극장에서 상영되다

세기의 명화 벤허(Ben Hur)가
강진극장에서 상영되다.

벤허는 스팩터클한 구성도 좋았지만 찰톤 히스턴(제일 좌측)의 명연기로도 유명했다. 당시 영화제작비의 다섯배가 넘는 비용이 투자됐다고 한다.
필자는 벤허를 1960년대 말, 1970년대 초에 서울 퇴계로 대한극장에서 그리고 광주 동방극장에서 본 기억이 있다. 강진에서 과연 벤허가 상영되었을까? 궁금증을 풀기 위해 몇 사람의 지인들에게 알아보았다.

김충선(63세, 출판업)은 벤허라고 하는 세기(世紀)의 명화(名畵)를 1973-74년경에 강진극장에서 보았다고 기억을 되살렸다. 김충선이 강진중학교 3학년 또는 강진농고 1학년 무렵이었던 것이다.
 
김충선은 강진읍 서산리에서 빈농의 아들로 어려운 가정형편 가운데 강진농고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가 출판업계에 진출하여 자수성가한 향우이다. 당시 강진중학교에서는 한 달에 두 번 정도 단체관람을 했다.
 
강진농고도 성요셉 금릉여자중고의 사정도 비슷했다. 당시 강진중학교는 한 학년이 8학급이었고, 한 학급에 60명이니 한 학년이 480명이다. 전체학생은 1,440명이나 되었던 것이다.

강진극장의 좌석이 499석이니 학생들 천명은 서서 관람하는 것이었다. 강진극장은 단체관람 학생들이 장사진을 치므로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강진농고도 한 학년이 3학급이니 서서 보아도 비좁았지만 학생들은 극장에 왔다는 것만도 너무 재미가 있었다. 당시는 군사쿠테타로 집권한 대통령 박정희에 의해 유신 정권이 바로 열린 시기였다.

당시 극장에서는 본 영화 상영에 앞서 전원 기립하여 애국가를 제창했고, 이어서 대한늬우스가 나왔다. 대한뉴스는 1953년부터 1994년까지 대한민국 정부가 제작하여 영화관에서 상영했던 영상보도물이었다.

대부분 당시 군사정권의 홍보물이었다. 주로 대통령 박정희의 공업단지 시찰, 건설현장 기공식, 준공식 또는 새마을 운동의 현장 영상물이 대부분이었다.

대한뉴스가 시의성 없는 정부 홍보물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결국 1994년 12월말 2040호를 끝으로 대한뉴스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TV가 없던 시절 영화 단체관람은 학생들에게 기쁨이자 희망이었다.<인터넷 사진 인용>
아무튼 당시의 학생들에게는 뉴스도 본 영화만큼이나 재미있었다. TV가 보편화되지 못했던 시절에는 대한 늬우스가 당시 세계를 내다 볼 수 있었던 유일한 창(窓)이었기 때문이다.

벤허(1959)는 루 윌리스의『벤허 :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영화한 작품이다. 벤허는 20세기 최고의 종교 영화, 또는 최고의 기독교 영화로 손꼽힌다. 원작 소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조명하지만 영화는 유대인 벤허의 삶을 따라간다.

윌리엄 와일러 감독은 인간주의, 휴머니즘(humanism)을 통해 종교적인 메시지를 끌어내는 방식을 취했다. 휴머니즘이란 라틴어 humanista에서 유래한 것으로 인간을 인간답게하는 인간본성을 옹호하고 실현하려는 입장을 뜻한다. 

명화 벤허의 줄거리

원작 소설 ‘벤허 : 그리스도의 이야기’ 줄거리 내용은 이러하다. 벤허의 배경은 AD 20여 년 전후의 로마제국시대이다. 벤허는 부유한 유대인 집안의 아들이었다.

그는 노예의 딸 에스더를 사랑하여 노예해방을 시켜주는 인간성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에게는 메살라라는 친구가 있었다.

영화의 전개는, 메살라가 로마에 갔다가 유대 땅에 새로 부임하는 신임 총독의 호위사령관으로 귀향하면서 시작되었다. 메살라는 영향력 있는 벤허를 이용해서 큰 공을 세우고 싶었었다. 하지만 벤허는 민족을 배반하는 것이 싫어서 거절을 했고, 메살라는 여기에 반감을 품는 것이다.

하루는 신임 총독이 행차를 하는데, 벤허의 여동생이 실수로 총독의 머리 위로 기왓장을 떨어트렸다. 메살라는 이것을 이용해서 모함을 했고, 벤허는 모든 재산을 빼앗긴 채 노예로 끌려갔다.

노예로 끌려가는 행렬이 나사렛 예수의 목공소 앞을 지나갔다. 벤허는 갈증이 너무 심했으나 호송로마군인들은 물을 주지 않았다. 이 때 나사렛 예수가 벤허에게 물을 부어준다.
 
호송관은 나사렛 예수의 급수를 제어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 힘 앞에 갑자기 무력해졌다. 이 대목이 벤허가 예수와 만나게 되는 첫 장면이다. 결국 벤허는 첫 어머니, 동생과 뿔뿔이 헤어지게 되었다.
 
벤허는 로마제국 해군에 소속된 노예로써 노를 젓는 노역에 시달리면서 몇 년을 지내게 되는데, 이때 벤허의 일생에 일대 반전(反轉)이 일어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해적선이 갑자기 들이닥쳐 로마선단을 습격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벤허는 이 때 생명의 위기에 처한 함대 사령관 제독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이 일로 인하여 제독은 벤허를 양아들로 삼았다. 나중에 벤허는 재산까지 물려받고 로마에서 고위층으로 살게 되었다(소설과 영화와 조금 차이가 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날, 어머니와 여동생을 찾아야겠다는 결심한 벤허는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고향에 금의환향하였지만 어머니와 동생이 죽었다는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벤허는 주체할 수 없는 슬픔에 빠지게 되었다. 메살라에 대한 증오심이 폭발하며 복수를 하려던 중, 노예에서 해방시켜줬던 에스더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마침내, 전차 경기에 참가하여 메살라에게 승리하므로 복수에 성공했고, 일약 유대인들의 영웅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메살라는 허리가 부러지고 나중에는 전 재산도 잃게 된다.

벤허는 어머니와 여동생을 찾아 헤멘다. 그러던 중에 문둥병에 걸린 두 모녀는 벤허를 보고서도 벤허에게 해를 끼칠까 봐 멀리서만 보고는 울면서 떠나갔다. 나환자들이 거주하는 지하공간은 외부와 차단되어 있었고, 오직 충직스러운 에스더가 벤허의 어머니와 누이에게 음식을 공급하면서 돌봐주고 있었던 것이다.

벤허의 어머니와 누이는 에스더의 권유로 나사렛 예수의 산상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모녀는 큰 은혜를 받고 문둥병의 치료를 받게 되었다. 이 때 벤허도 예수님의 은혜를 동시에 체험하게 된다.

결국 벤허와 어머니. 누이의 극적인 만남이 이뤄지고, 모든 질병에서 해방받게 된 것이다. 벤허의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예수님의 구원에 대한 깨달음이 이어진다. 이 때도 나사렛 예수의 모습은 신비롭게도 얼굴을 비치지 않고 뒷모습과 음성 설교메시지만 들려주는 것이다.

생각이 깊은 관객이나 신앙심이 깊은 신자들에게는 이 대목이 가장 감격스러운 장면이다. 스펙타클 영화 벤허를 보러 갔다가 신령한 은혜를 체험하고 감동을 받게 하는 영화가 바로 벤허이다. 결국 벤허는 에스더와 결혼하여 단란한 가정을 꾸렸다.(이 부분은 영화와 차이가 날 수 있다)

스펙타클(spectacle)과 휴머니티를 겸한 벤허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벤허’라는 영화는 1959년 작품이다. 영화사 MGM은 경쟁사인 파라마운트사가 ‘십계’(十戒)라는 영화로 대성공을 거두자, 더 큰 대작을 만들기로 하고 엄청난 투자를 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벤허인데, 당시 평균 영화 제작비의 5배에 가까운 1500만 달러가 투입되었다. 상영시간만 해도 222분에 달하며 10만 명이 출연을 하였다. 2년의 촬영세트 제작기간과 기획에서부터의 제작기간 10년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다.

영화 벤허는 1억 4천만 달러의 흥행수입에 아카데미 11개 부분 수상이라는 기록까지 세웠다.  필자가 처음에 벤허를 보았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인지는 짐작도 못했고 말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나중에야 보니 전차경주와 같은 웅대한 스펙타클도 결국 불행한 벤허의 가정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치유되고 회복되었다고 하는 구원의 메시지를 보조하는 부분적인 설정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벤허는 웅장한 스펙타클과 휴머니티, 그리고 신앙심이 교차하는 대 서정시요 드라마였다. 세계적인 영화사 MGM의 로고는 사자(獅子)가 표호(豹虎)하는 영상이다.

여기에 동원된 사자의 이름은 ‘재키’였다. 재키는 ‘타잔’ ‘침팬치’등 다수의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했던 스타 사자였다.

영화의 백미(白眉)는 당시 기술력이 총동원된 해상 전투 장면과 전차 경주 장면이다. 15분여에 달하는 경주 장면은 배경음악 없이 관중 함성과 말발굽 소리만으로 경기의 긴장과 박진감을 표현한 영화사의 명장면이다.

윌리엄 와일러 감독은 휴머니즘을 통해 종교적인 메시지를 끌어내는 방식을 취했다. 인간의 고난에 관심하는 신, 고난을 통해 신을 찾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윌리암 와일러는 ‘벤허’의 시사회(試寫會)를 마친 다음 이렇게 기도했다고 한다. “하나님! 진정으로 제가 이 영화를 만들었습니까?” 사람은 빵으로만 살 수 없다. 감동을 먹고 사는 존재가 인간이다.

감동이란 위대한 사랑과 정의 그리고 진리를 체험했을 때 감동이 밀려오는 것이다. 한반도의 최남단 강진 사람들에게도 불후의 명화 ‘벤허’는 커다란 감동으로 성큼 다가왔던 것이다.   /출향인.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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