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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인문기행]고려청자, 반도체, 김향수회장반도체와 고려청자, 韓·日의 미래가 있다
주희춘 기자  |  ju@nsor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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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8.08  11: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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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이 반도체 회로의 모습이고 우측이 고려청자의 운학문 상감 무늬다. 두가지 모두 셈세한 모습이 무언가 닮은 꼴이다. 반도체와 고려청자는 당대 최고의 기술력이 집약된 상품이란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한국과 일본은 이 반도체와 도자기를 두고 승패를 주고받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경제전쟁 중심에는 반도체라는 산업의 쌀이 있다. 일본은 우리나라에 경제보복을 하면서 반도체 소재로 허를 찔렀다. 우리 경제가 벌써부터 휘청하고 있다. 반도체가 한국경제에 차지하는 비중이 막대하다는 것을 일본이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또 한가지가 있다. 임진왜란에서부터 일제강점기, 현대를 이어오면서 반도체 만큼이나 두 나라 역사에 큰 그림을 남긴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도자기다.
 
반도체가 21세기의 금싸라기라면 도자기는 고려시대부터 다이아몬드였다. 우리나라와 일본이 경제전쟁이 벌어진 이때 반도체와 도자기는 묘한 상징성을 갖는다.

결론부터 말하자만 우리나라는 일본의 반도체 기술을 배워 일본을 제치고 세계 최고가 됐다. 도자기는 일본이 우리 기술을 가지고가 우리를 밀어내고 세계 최고가 됐다. 반도체는 D램시장을 90%까지 석권하고 있고, 도자기는 일본이 세계시장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흥미를 끄는 것은 반도체와 도자기의 묘한 상징성이 강진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묘하게도 그런 역사가 있다. 반도체와 도자기의 상징성이 어떻게 강진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우선 반도체 이야기를 해 보겠다. 아직도 우리나라의 반도체는 삼성의 이병철 회장이 시작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강진출신의 아남그룹 고 김향수 회장이 주인공이다. 김향수 회장은 어떻게 다른 사람보다 빨리 반도체에 관심을 갖게 됐을까. 강진의 청자 때문이었다.

   
80년대 중반 김향수 회장이 부인 오승례 여사와 전자공장 생산라인을 둘러보고 있다. 오여사 역시 강진읍 출신이다.<사진=엠코코리아 제공>
그는 1993년 4월 12일자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내고향 강진에 고려청자의 도요지가 있었기 때문에 반도체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됐다”고 말하고 있다. 참 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반도체와 도자기, 도자기와 반도체의 상징성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고려청자의 산지인 강진출신 기업가 아남산업 김향수 회장은 일찍이 고려청자를 산업화할 꿈을 가지고 있었다. 고려자기야 말로 고향 강진에서 나왔던 것이고 그것을 발전시키는 것은 자신의 한 책무라고 느꼈다고 한다.

60년대 중반은 지금의 대구 사당리 요지에 대한 발굴조사가 본격화된 시기로 양질의 고려청자가 강진에서 생산됐다는 소식이 전국의 큰 화제가 되고 있는 때였다.

김향수 회장은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빛나는 문화유산인 고려청자의 오묘한 비법을 재현해서 수출의 길을 트고 외화를 벌어들인다면 우리가 문화민족이었음을 세계에 알릴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1967년 1월 10일 차가운 겨울바람이 몰아치는 날 김 회장은 일본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이 일본의 세토시였다.

세계적 도자기 수출국인 일본에서도 가장 유명한 도자기 산지였다. 그러나 세토시를 천천히 돌아보면서 도자기산업은 장래성이 약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공해가 심각했던 것이다.

흙먼지가 공장 주변의 산야를 뿌옇게 물들였고 강물까지 흙탕물이었다. 도자기 산업은 미래지향적 첨단기술산업이 아니었다. 청자를 구워낸 장인정신으로 할 수 있는 첨단기술의 무엇을 찾기로 했다.

김 회장은 세토시에서 전자산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해서 만난게 반도체 공학학자들이었다. 일본의 반도체 공학자들은 “김 회장님 반도체를 시작하십시요”라며 반도체 사업을 적극 권했다.

반도체가 트렁크 하나만 채워도 1백만~2백만달러는 거뜬히 받을 수 있는 제품이라는 소개가 눈에 확 들어왔다.

당시의 수출품 이래 봤자 1차상품이 고작이었는데 배 한척에 가득 채워도 20만 달러 정도의 돈밖에 받지 못한 때였다. ‘이거다’ 싶었다.
 
처음 시작할 때 반대도 많고, 시작하고 나서 어려움도 컸지만 김향수 회장은 반도체야 말로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우리나라가 참여해야 할 사업으로 생각하고 밀어붙였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게 바로 대한민국의 반도체 산업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1983년 어느날이다. 삼성그룹의 이병철 회장은 본격적인 반도체 사업 진입 여부를 놓고 고심중이었다.

   
60년대 후반 아남반도체 공장에서 근로자들이 줄을 지어 반도체를 조립하는 모습이다.<사진 = 엠코코리아 제공>
엄청난 초기투자금이 들어가는데다 당시만 해도 반도체산업의 미래가 불투명할 때였다. 그때 이병철 회장을 만난 사람이 아남산업의 김향수 회장이었다.

아남산업은 우리나라 반도체산업의 선구자였으나 자본력이 삼성 만큼은 되지 못했다. 김향수 회장은 이병철 회장에게 “삼성 같은 대기업이 반도체 사업을 벌여야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다”며 강력히 권고했다. 삼성은 결국 반도체산업에 진출했고, 오늘날 세계적인 반도체 D램 수출국이 되는데 일등공신이 됐다.

김향수 회장이 반도체를 배웠던 일본은 1980년대 중반 세계시장에서 1등을 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개인용 컴퓨터(PC)가 증가하며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1998년 삼성전자 등 한국의 반도체 업체들이 가격 경쟁력에서 일본을 제치고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 1위를 차지했다.

그 결과 일본업체들은 낸드플래시를 만드는 도시바를 제외하고 모두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철수했다. 더 이상 일본은 스스로 D램을 만들지 못한다. 일본은 반도체 분야에서 우리나라에 패전국이 됐다.

그러나 도자기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이겼다. 12세기 강진에서 최고급 상감청자가 만들어 지고 있을 때 일본은 불과 흙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 나라였다.
 
토기에 가까운 그릇을 만들어 내 것 네 것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을 서로 빼앗겠다고 내전을 벌린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서양도 마찬가지다.
 
병영의 하멜기념관에서 네덜란드산 도기를 보면 19세기 대항해시대가 열린 때까지도 고려청자와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도기만 생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은 임진왜란때 조선의 사기장들을 대거 납치해 갔다. 이를테면 원천기술을 폭압적으로 훔쳐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일본의 도자기는 1616년 조선의 도공들에 의해 사가현 아리타에서 시작되었다.

일본은 그것을 서양으로 수출했다. 1800년대 후반 들어서는 중국을 앞섰다. 1970년대에는 세계 도자기 시장의 70%를 점유할 정도로 이 사업을 성장시켰다. 그때만 해도 우리는 고령토를 일본으로 원료만 수출했다.

17세기 중반 이삼평을 시조로 하는 조선 뿌리의 일본 도자기 유파인 ‘아리타야키’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든다. 중국 경덕진에서 유행하던 오채자기를 모방한 ‘가키에몬’ 양식 등 화려한 채색 자기가 생산되면서 조선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의 도자기 산업은 세계시장에서 훨훨 날았다.

그런 일본이 1910년 조선을 강제합병 한 후 개경에서 쏟아지는 고려청자를 보고 감탄과 함께 욕심이 발동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그 와중에 그토록 신비한 고려청자가 강진 대구에서 생산됐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또한번 놀랐던 것도 임진왜란때 조선도공을 강제로 데리고 가 도자산업을 발전시켰던 역사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은 도자산업을 국가의 기간산업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지금도 유럽의 도자기 시장은 일본이 석권하다시피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도자산업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고려청자는 1970년대 재현된 이후 내수시장에서만 유통되고 있다. 현대의 몇몇 도자기 회사들이 본차이나등을 생산해 수출하고 있지만 세계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미미하다.

다시한번 마무리하자면, 우리나라는 일본으로부터 반도체를 배워서 일본을 이겼고 세계 1등이 됐다. 그러나 일본은 우리나라에서 도자기의 원천기술을 빼내가 세계 최고가 됐다. 오늘날 세계경제의 틀이 어떻게 짜여져 왔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그럼 우리나라와 일본은 어떻게 지내야 할까. 정답은 아닐 수 있지만 고려청자를 만들어 국가 경제를 발전시켜 보려다 반도체를 해서 그 역할을 충실히 해낸 김향수 회장의 삶을 들여다 보면 그 방법을 조금이나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김향수 회장은 보통학교(지금의 강진중앙초등) 5학년 시절에 만난 닷다 기요또(立田淸人)라는 스승을 평생 존경하며 살았다. 닷다선생은 소년 김향수에게 간디의 책을 정독하도록 권했다. 또 어린 김향수의 손을 잡고 다산초당과 청자도요지, 백련사등을 돌며 유적지를 구경시켜 주었다.

당시만 해도 문화재라는게 아무런 관심을 받지 못할 때여서 강진사람들도 강진에 어떤 문화재가 있는지, 어떤 가치가 있는지 모르고 있었지만 닷다 스승은 강진의 문화재 가치를 누구보다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김향수 회장은 집안이 어려워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닷다선생이 조용히 김향수를 불러 경성으로 가서 경성사범학교에 응시해 보라고 권했다. 닷다선생은 제자 김향수에게 학생복 한 벌과 서울까지의 여비까지 마련해 주었다. 우리나라에 반도체의 씨앗을 뿌린 출발은 그렇게 시작됐다.

김향수 회장은 훗날 자서전에 “나의 인생에 있어서 신의와 집념, 검약과 인내가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덕목이라는 교훈을 고향에 계신 부모님으로부터 배웠고, 민족자주, 정의, 지성일관의 사상의 싹을 심어준 분은 닷다 스승이었다”고 회고했다.
 
훗날 김향수는 대기업 사장이 된 후에도 일본에 사는 닷다 선생을 한국으로 자주 초청해 예의를 차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둘은 평생 우정을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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