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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균의 ‘추억의 강진극장’]6. 강진에 온 하춘화“저는 이제 여섯살 이름은 하춘화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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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8.08  11:0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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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춘화가 1961년 여섯 살에 가수로 데뷔해 무대 위에서 공연하는 모습이다. 이때 하춘화는 강진극장 무대에서 섰다. 우측사진은 하춘화가 성장해서 무대에 선 모습이다.<하춘화 제공>
국민가수 하춘화(1955년생)가 무대에 데뷔한지도 어언 58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하춘화가 강진극장에 왔을 때가 6세 때였으니 1961년 무렵이었다. “제 이름은 하춘화예요. 올해 여섯 살이예요.” 너무나 예쁘고 깜찍스러운 아이가 나와서 어른스런 가요를 막힘없이 불렀다.

현재 70세 이상의 강진사람이면 거의 하춘화의 어린시절을 기억할 것이다. 하춘화의 아버지 하종오는 101세로 세상을 떠났다. 하춘화의 어린시절 그의 곁에는 반드시 아버지 하종오가 있었다. 그는 둘째 딸을 국민가수의 반열에 올려놓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아버지 하종오가 시종일관 매니저 역할을 했던 것이다. 아버지 하종오는 국민가요 ̒영암 아리랑̓을 탄생시킨 음악가이다. 하춘화의 60년 가요 활동을 모든 귀중한 자료를 고향인 전남 영암군에 기증했다. 국내 최초로 ̒한국 트로트 가요 센터̓가 설립되는 토대를 마련했던 것이다.

하춘화는 당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음악성을 갖고 선배 가수 이미자, 패티김, 김상희, 문주란과 함께 대한민국 가요계를 대표하는 정상급 여가수로 성장한 것이다.

하춘화가 한참 이름을 떨치던 23세 무렵에도 강진극장 쇼 무대에 왔다. 아마「하춘화 쇼」였을것이다.  1960년대 이후부터 악극단이란 이름은 거의 사라지고 쇼 공연이 영화와 함께 극장무대를 차지하게 된다.
 
쇼 단체가 공연을 할 때에 흥행 수익을 위해 영화배우를 초청하기도 하였는데, 보통 한 명이나 두 명이 출연하였다. 극장 운영관련자들은 쇼 공연의 전성기를 1968년경부터 1975-6년경으로 보고 있다.

이후에는 TV 안방극장에 밀려 쇼공연도 극장사업도 사양화(斜陽化)의 길로 가게된 것이다. 당시 대표적인 쇼 단체로는 ‘아세아 쇼’ ‘서울 쇼’ ‘쓰리에이 쇼’ ‘라이언 쇼’ 등이었다.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의 쇼 단체들로는 ‘중앙 쇼’ ‘낙랑 쇼’ 그리고 ‘쓰리세븐 쇼’ 등이 있었다. 이 중에서도 ‘서울 쇼’가 지방공연을 가장 많이 했으며 인기를 누렸다(위경혜, 호남극장사). 필자의 기억에는 아직도‘낙랑 쇼’가 기억에 남아있다. 

 1970년대 초중반은 보릿고개를 넘기기가 어렵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대중가요 강진에 “가수 하춘화와 코미디언 이주일”이 온다고 하니 강진극장은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강진극장이 개장한 초창기 서울에서 연예인들이 대거 내려와 공연을 했다. 좌측부터 왕년의 스타 구봉서, 배삼룡, 제일 오른쪽 여성이 백금녀다. 앞의 화동들은 모두 강진의 어린이들이다.<서영창 님 제공>
당시에는 극장도 만원이면 포개져서 보고, 만원버스에는 사람과 사람이 완전히 엉겨서 탔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차장이 들어가지도 못하고 차문에 매달려서 승객들을 밀어넣던 시절이었다.

사람을 짐짝처럼 쟁여 넣었던 것이다. 아무튼 강진극장에는 ‘하춘화’를 보러 온 사람들이 가득차 있는데, ‘가수 하춘화’는 시간이 되도 나오지를 않았다.

물론 다른 가수나 쇼단의 밴드 플레이로 시간을 매웠지만 정작 주인공인 ‘하춘화’가 안나타나는 것이었다. 극장 안에서는 “돈을 도로 물어 내라”고 아우성이었다. 극장에서는 관객들을 잠시만 기다리라고 겨우 무마시켰다.

당시 하춘화같은 유명가수들은 남해안 극장을 순회했다. 보성극장에서 잠깐, 장흥극장에서 잠깐, 강진극장에서 잠깐 인사하고, 노래 두어곡 부르고 해남극장으로 가는 바쁜 일정을 소화해 내야 했다.

강진극장에서 급히 장흥에 사람을 보냈더니, 하춘화는 당시 장흥에서 행세 깨나 한다는 유지들에게 붙잡혀있었다. 당시에 공화당 실력자이던 장흥 길전식(吉典植, 5선국회의원, 원내총무)의 친형이 장흥에 살았는데 가족행사를 치르고 있던 중에 하춘화를 붙잡아 놓고 가무(歌舞)를 즐겼던 것이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남해안의 극장을 순행(巡行)하면서 공연하는 유명가수를 사사로운 잔치에다 붙잡아 놓을 수가 있을 수 있냐는 말이다.

그러나 당시 서슬이 퍼렇던 유신독재 공화당 세상에서는 그런 비상식과 억지가 통했던 것이다. 누가 감히 길전식의 친형을 거슬르랴! 강진극장측에서 사정사정해서 겨우 하춘화를 데려와 극장무대에 세웠다.
 
길전식의 친형은 강진에 까지 하춘화 일행을 따라 왔다. 하춘화는 무대에서 노래를 부른 후, 누군가의 청탁을 받았든지 갑자기 “나를 사랑해주시고 돌봐주시는 길○○ 선생님을 소개합니다”라고 멘트를 하자, 넉살좋게도 길전식의 친형이 무대에 나와 마이크를 잡고 대중가요를 불렀던 웃지못할 권력형 넌센스가 강진극장에서 벌어졌던 것이다(서영창 증언).

하춘화와 이주일이 겪은 이리폭팔사건

 1977년 11월11일 밤 전북 이리(지금의 익산시)역 구내에서 대형폭발 사고가 일어났다. 화약수송열차에서 다이나마이트 22톤과 폭약 등이 터져 역에서 반경 10km 내에서 사망 59명, 실종 2명, 중상184명, 경상 1,156명의 인명피해와 수많은 가옥파손을 일으켰다.

이 폭발사건은 한국화약 직원의 호송원이 촛불을 켜놓고 잠을 자다가 촛불이 넘어지면서 화약상자에 옮겨 붙으며 일어난 대형사고였다고 경찰이 언론에 발표했다. 실은 아직도 이 사건은 미스테리이다.

한데 이 자리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미담이 있었다. 당시 폭발사고 때 이리역 인근에 있는 산남극장에서 하춘화가 쇼를 펼치고 있었다. 하춘화는 자신의 이름의 쇼로 전국을 도는 투어를 펼쳤다.
 
지금은 고인이 된 코미디언 이주일이 보조MC로 하춘화쇼에 기용됐다. 당시 하춘화는 이미자의 대를 이을 가수로 소문이 나 23세의 나이로 한참 주가를 올리고 있었다.

이주일은 무명의 사회자였는데 보조 진행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 하춘화쇼에서 메인 MC가 사정이 있어 자리를 비우게 되자 이주일이 대신 MC로 무대에 올랐다. 하춘화는 막간을 이용해 분장실에서 쉬고 있었다.

그 때 느닷없이 폭발사고가 난 것이다. 엄청난 화약의 폭발력으로 이리역은 물론이고 그 근처가 융단폭격을 맞은 것처럼 쑥대밭이 됐다.

   
하춘화는 고 이주일과 아주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사연은 1977년 1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무명이었던 고 이주일은‘하춘화 쇼단’에서 진행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전북 이리(지금의 익산)에서 공연을 하던 중 폭발사고가 발생했다. 사고 당시 고 이주일은 두개골이 함몰되는 부상을 입었음에도 하춘화를 구했다.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아찔한 순간, 생명의 은인이었던 것이다.<하춘화 제공>
이 난리로 갑자기 변을 당한 하춘화는 폭발의 여진으로 극장이 붕괴되는 바람에 건물잔해에 깔려있었다. 이때 이주일은 쓰러져있는 하춘화를 발견하여 하춘화를 들쳐 업었다.
 
그 때 이주일은 오직 하춘화를 살려야 한다는 의지 하나로 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던 것이다. 응급처치를 취한 결과 약간의 골절상은 입었지만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고 한다.

그 후 하춘화는 그때의 악몽을 딛고 ̒이리 이재민돕기 자선쇼̓를 개최해 수익금 100만원을 기탁하기도 했다.

이 자선쇼에서 하춘화는 생명의 은인인 이주일을 자신의 쇼에 붙박이 MC로 기용했다. 이를 계기로 해서 이주일은 특유의 재치와 익살로 MC와 코미디계를 평정하기까지에 이른다.
 
우리 국민 모두가 알다시피 이주일의 케릭터는 “못생겨서 미안해요”였다. 후에 이주일은 국회의원까지 지냈다. 참으로 이것은 진짜 코미디였다. 당시 강진극장 ‘하춘화 쇼’에서 하춘화는 당시 무명(無名)을 겨우 벗어난 코미디언 이주일을 자신의 생명의 은인으로 소개했다.

이 후로 이주일은 인간미와 희생정신이 넘치는 인물로 기억되게 되었다. 이주일은 특유의 코믹한 연기력과 타고난 끼, 그리고 밑바닥 인생체험을 밑천삼아 특히 서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면서 결국 한동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코미디계의 탑 스타가 되었던 것이다.

「영암 아리랑」과 자랑스런 하춘화의 인생역정(人生歷程)

 영암(靈巖)이란 지명 자체가 월출산에 온 말이다. 영암 월출산은 영암만의 월출산이 아니다, 남월출산은 강진 월출산이다. 영암읍에서 보는 월출산은 남해의 소금강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기암괴석(奇巖怪石)으로 이루어진 장쾌하고 호방한 산이다.

운무(雲霧)에 휘감긴 월출산 천왕봉은 참으로 신령스럽다. 월출산 천왕봉은 해발 809m요, 월출산은 국립공원이다. 영암 풀티재(草嶺), 누릿재(黃峙)를 훌쩍 넘어서 성전을 향해 가다보면 오른쪽에 남월출산이 보인다. 여기가 월남리(月南里)요 여기에 그 유명한 월남사지(月南寺止) 삼층석탑이 나온다.

고려시대의 탑이지만 백제양식이라고 말한다. 가까이 돌거북을 이고있는 비가 있는데, 바로 월남사를 창건한 진각국사의 비(碑)이다.

여기서 본 월출산 산봉우리는 남월출산이요, 그 산자락이 경포대(鏡布臺)이다. 이곳을 강진 월출산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영암 월출산이 남성적이라면 남월출산은 구강포를 품어 안은 여성적이고도 포근한 산이다.
 
1801년 다산 정약용이 강진땅으로 유배를 가다가 이곳을 지나면서 시를 한 수 지었다(유흥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누리 땅 산봉우리는 바위가 우뚝 우뚝 / 나그네 뿌린 눈물도 언제나 젖어 있네
월남리로 고개돌려 월출산을 보지 말게 / 봉우리 봉우리마다 어쩌면 그리도 도봉산 같아
   
 하춘화가 부른「영암 아리랑」온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노래이다. 1972년 월출산을 소재로 백암이 작사하고 고봉산이 작곡한 대중가요이다.

하춘화는「영암 아리랑」을 17세에 불러 고향을 빛내고 대중의 사랑을 받는 불후의 명곡을 남긴 것이다. 2011년 데뷔 50주년을 맞이한 하춘화는 SBS「여유만만」에 출연하여 말하기를, 1961년 여섯 살에 가수로 데뷔하여 총 2,500곡을 불렀는데, 이 중에 베스트 3위로「영암 아리랑」을 꼽았다.

하춘화는 이 노래를 고향 영암을 그리워하는 아버지를 위해 불렀다고 한다. 영암군민들은 2010년에 영암 아리랑 노래비를 제작하여 월출산 자락 기찬랜드에 세웠다.

하춘화는 2006년 성균관대학교에서「현대 대중가요를 주제로 한 논문」으로 예술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므로 박사학위를 소지한 최초의 대한민국 가수가 되었다. 

달이 뜬다 달이 뜬다 / 영암 고을에 둥근 달이 뜬다 (×2)
월출산 천왕봉에 보름달이 뜬다
아리랑 동동 쓰리랑 동동 에헤야 데헤야 어사와 데야
달 보는 아리랑 님 보는 아리랑

 하춘화는 2016년 1월15일, 16일 세종문화회관대극장에서 「하춘화 노래 55 나눔, 사랑 리사이틀」을 가졌다.

하춘화는 기부 동기를 “제가 16살 때 아버지께서 저에게 사회로부터 받은 사랑을 되돌려주는 게 인간 된 도리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사회와 온 세계가 더 많은 기부 활동으로 다 함께 사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가면 좋겠다는 아버지 당부를 실천했다”고 아버지께 그 공을 돌렸다.

나는 이 대목에서 가슴이 뭉클해 왔다. 하춘화는 대중음악을 위해 “대중음악전문학교를 설립하는 게 꿈이다” “이를 통해 한국 K팝이 세계적 문화로 대접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서양에 카루소나 파파로티, 마리오란자, 마리안 엔더슨, 엘비스 프레스리, 톰 죤스가 있다면 우리 지역에게는 하춘화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필자는 하춘화를 인생을 참 잘 살아온 사람으로 부르고 싶다. 첫째 자신의 전공인 노래에 성공했고, 둘째, 200억원이란 거액을 이웃을 위해 아버지의 유언을 마음에 새기면서 헌납했다.
 
재벌도 하기 어려운 일을 한 것이다. 셋째, 박사과정을 마치고 음대교수로 출강하는 끊임없이 배우고 가르치면서, 자신을 개발하려고 하는 창의성과 열정을 높이 평가하고 치하하는 바이다.

하춘화는 이듬해 1978년 연예인 고소득자 1위에 올랐는데 대학을 진학하기 위해 돌연 은퇴를 선언하고 열공끝에 경남대학을 졸업했다.

이윽고 1981년에는 결혼을 했고 1991년에는 1,260회라는 가요사상 가장 많은 공연기록을 가져 무대공연 신기원을 기록해 기네스북에 등재됐으며 2000년에는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에서 ‘한국가요의 원류와 변천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가요계에 박사 3명이 있는데 1970년대 <망부석>을 부른 김태곤, 요즘 핫한 가수 홍진영, 그리고 하춘화가 박사학위를 받았다.<계속>    /자유기고가·출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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