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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인문기행]최초 신식학교의 출발뜨거운 8월은 강진 금릉학교가 개교한 날
주희춘 기자  |  ju@nsor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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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8.01  11:2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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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최초의 근대식 사립학교였던 금릉학교가 처음 문을 연 강진읍 군청뒷편 금서당(琴書堂)의 모습이다. 금서당은 관서재(官書齋) 였는데 관에서 세우고 운영하는 서당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금릉학교는 재정적으로 사립학교 형태였지만 학교건물은 관서재인 금서당을 이용했던 것이다.
1907년 5월 11일, 강진군 도원리 배드리강 모래사장에서 큰 운동회가 열렸다. 강진읍장이 서고 강진의 큰 행사가 모두 열렸던 배드리강 모래사장은 지금의 강진종합운동장 역할을 했던 곳이다.

큰 운동회에 몇 명이 모였을까. 학생수는 95명이었으니 학생수로 치자면 그렇게 큰 운동회는 아니다. 그런데 관객이라 할 수 있는 주민들이 자그마치 5천여명이 몰렸다(황성신문 1907. 5. 24일자). 말 그대로 큰 운동회였다.

이날 운동회를 연 학교가 바로 강진 최초의 근대식 학교였던 금릉학교였다. 기존의 학교라는 것은 모조리 서당이라는 것이었고 그 다음 금릉학교가 있었던 셈이다. 운동회 모습은 당시 전국 일간신문인 황성신문에 비교적 자세히 보도되고 있다.
 
금릉학교는 지금의 군청뒷편 금서당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넓은 운동장이 있었을리 없었다. 그래서 강변으로 나갔다. 이변스러운 것은 관람자들의 숫자다. 황성신문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금릉학교가 성자강(星子江)가에서 춘계 운동회를 실시했는데, 학도가 95인이요, 관람자가 5천여 명에 달했다”.

   
1934년 4월 17일 강진유치원 학생들이 봄 햇살을 받으며 율동을 하고 있다. 1900년대 들어 금릉학교가 설립된데 이어 유치원들도 생기는 등 신신 교육기관들이 많이 들어섰다. <강진일보 자료사진>
학생들의 운동회를 관람하러 온 주민들의 숫자가 5천명에 달했다는 소식이다. 성자강(星子江)은 도원리 남동쪽 끝과 남포의 북서쪽을 말하고 있다.(양광식, 주교시장(舟橋市場)의 애환(哀歡), 강진우리신문 2018년 10월 10일자). 성자강에 대한 기록은 생소하지만 지금의 강진천 옛 이름으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남강사의 유례가 ‘순조 9년(1809)에 성자포(강진읍 남포) 앞바다에 나무궤가 떠밀려 왔는데 그 궤속에는 「주자경제잠목판」20매와 「대우수전」8매가 들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의 남포가 성자포고, 그 윗강이 성자강이었던 것이다. 

다시 내용으로 돌아가면, 당시 운동회는 강진에서 사상 최초로 열리는 운동회였다. 그 전까지는 면단위에 서당이 있을 뿐이여서 운동회라는 것은 생각하지 못할 시기였다. 큰 운동회 같은 행사라면 베드리강 모레사장에서 열리는 난전이 있을 뿐이었다.

금릉학교는 1906년 8월에 개교했다. 다음해 봄에 첫 춘계운동회를 열었던 것이다. 주민들의 호기심이 발동했다. 강진읍내 주민들은 물론 면단위에서 조차도 새벽길을 마다않고 금릉학교의 운동회가 열리는 곳으로 사람들이 몰렸다.

싱그러운 5월, 봄볕이 내려쬐이는 강변에서 5천여명의 주민들이 지켜본 가운데 열렸던 운동회를 상상해 보자. 음식을 어떻게 해결했는지 모르지만 그런 잔치가 없었을 것이다. 집에서 이것저것 싸온 음식을 풀어 이웃과 나눠 먹는 풍경하며, 주변에 장사꾼들이 모여 온갖 잡동사니를 파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조중관(趙重觀) 교장도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마이크를 잡았다. 조중관은 당시 강진군수였다. 금릉학교 설립에 열성적으로 주도적 역할을 했다. 황성신문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운동회를 마친 후에 조중관 교장이 열렬하게 연설하여 성황을 이루었다고 하더라.”

조중관 교장이 어떤 말을 했는지는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았지만 당시 금릉학교의 운동회에 보냈던 주민들의 관심과 열기가 지금도 전해오는듯 하다.

   
1923년 일본 도쿄에서 강진출신 유학생들이 함께 찍은 사진. 왼쪽부터 김광식, 김평식, 김영랑, 김안식이다. 김영랑과 김안식이 금릉학교 출신이다.(강진일보 자료사진)
이렇듯 금릉학교의 운동회에 주민 5천여명이 참석할 정도로 열성을 보였던 더 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광주교육대 김덕진 교수가 최근 호남사학회지에 발표한 ‘전라도 강진사립금릉학교의 설립과 성격’이란 논문에 금릉학교의 설립 역사에 대해 매우 구체적인 내용들이 나와 관심을 끌고 있다. 금릉학교 설립당시 강진의 각계각층이 참여했고, 당시의 뿌리가 훗날 강진의 뜨거운 교육열로 이어졌다는게 이 논문의 골격이다.

개항과 갑오개혁 이후 전국적으로 학교 설립이 확산된다. 학교를 세워 나라를 일으키자는 애국계몽 운동의 일환이었다. 이러한 추세속에서 1908년이 되면 전국에 사립학교 들이 속속 들어서는데 강진의 금릉학교는 이보다 2년이 앞선 1906년에 관내 최초의 근대학교로 설립됐다. 지금의 군청뒤 금서당 관서재 자리다.

금서당은 이름이고 관서재란 관에서 설치한 서당이란 뜻이다. 금릉학교는 금서당의 이름을 바꿔 1906년 8월 정식 개교했다. 그러니까 이 달이 금릉학교가 문을 연지 113주년이 되는 해다. 

금릉학교는 그 성격을 규정할 때 관과 민이 함께 참여한 ‘공립형 사립학교’라 할 수 있다. 당시 다른 지역의 사립학교들이 한 사람의 독지가에 의해 설립된 운영된 곳이 많았다는 것을 감한 할 때 상당히 진보적인 형태였다 평가할 수 있다. 관이 참여했다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당시 군수였던 조중관이란 분의 혁혁한 공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중관(1868년~?)은 강진사람이 아니었다. 본관은 양주이고 거주지는 경기도 과천이었다. 순창군수와 풍천군수를 거쳐 1906년 4월에 강진군수로 왔다가 1908년 11월에 해남군수로 이임했다. 그러니까 조중관 군수는 4월에 강진군수로 왔다가 그해 8월에 금릉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단 4개월만에 사립학교 건립이라는 역사를 이룩한 것이다.

김덕진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그는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군수 조중관은 관내 일부 식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방관하는 유림들을 설득하여 학교 설립에 참여시켰고 무엇보다 조 군수는 본인이 데리고 온 책실 방규석을 개교 작업에 투입했다. 또 자신의 지휘 아래에 있는 현직 향리들도 학교 설립에 참여시켰다. 1906년 10월 26일자 황성신문에 찬성원으로 보도된 김채문은 1903년에 강진군의 이방이었다.

조중관은 교사를 초빙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그는 서울에 학교 임원을 보내서 유능한 교사를 초빙하여 역사, 지리, 산수, 일어 등을 가르쳤다. 신식학교를 졸업하고 신학문을 이수한 사람을 교사로 초빙했다.

정부부터 국장을 역임한 손붕구(孫鵬九)를 일어 교사로 초빙하자 그가 학교에 도착한 날에 백여 명의 학도가 일제히 환영식을 연 일도 있었다. 손붕구는 독립협회에 참여했던 적이 있으며, 농상공부 광산국장을 역임한 사람이었다. 나중에는 동경대학교를 졸업한 일본인을 일어 교사로 초빙하기도 했다. (황성신문, 1908년 8월 29일)

이러한 군수의 노력에 부응하여 강진군내의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금릉학교 설립에 동참했다. 군수의 역할도 컸지만, 관내 각계각층의 동참이 금릉학교 개교와 안착에 가장 큰 동력이 되었다. 우선 그 동안 지역의 최고 집단으로 군림해온 양반, 구학문을 고집하는 유림층이 대거 참여했다.

한문와 유교사상을 가르치는 서당이 마을 곳곳에 포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신신학교의 등장은 전통유림들에게 그렇게 달가운 일이 아니었음은 분명했을 것이다.

해남윤씨 윤단 가계를 중심으로 한 개신유림들이 선도적인 역할을 했지만, 보수적인 전통유림도 일부 가문을 제외하고는 상당수 가문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강진의 이족들이 광범위하게 참여했다. 그 가운데 김해김씨 김일엽 가계를 중심으로 한 사람들이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들은 후원금만 내는 것이 아니라 그간의 행정경험을 토대로 총무⋅서기⋅회계 등을 맡아 학교 실무를 맡기도 했다.

유림이건 이족이건 간에 참여자 가운데는 과거 합격자나 관직 역임자 또는 지주경영이나 포구상업 및 사채업을 통해 재력을 축적한 이가 적지 않았다. 그들은 구휼이나 토목사업을 통한 자선활동으로 민심을 끌어 모으는 데에 기여했다. 이렇게 출범한 금릉학교는 학생 수가 나날이 증가했다.

개교 2년차에는 학생수가 1백여 명에 이르렀다. 이에 대해 대한매일신보(1907년 5월 8일자)는 ‘금릉학교는 군수 조중관이 전참서 윤주신 및 여러 유지들과 협의해서 설립한 학교인데, 넓은 교사를 신축하고 고명한 선생을 계속 초빙하여 매우 열심히 교육하니, 생도가 날로 증가하여 백여 명에 달한다고 했다’고 보도했다.

금릉학교는 1909년 8월에는 강진공립보통학교로 개칭되었다. 이후 1914년 현재 해남세무서 강진지서 객사의 위치로 이전·확장된 후, 1926년 강진읍 평동으로 이전하여 강진중앙초등학교가 되었다(류시현, 금릉학교의 운영과 학생활동).

이후 금릉학교의 졸업자는 물론 설립자들도 이후 강진 지역사회의 주도층으로 부상했다. 이들은 1900년대에 국채보상운동을, 1910⋅20년대에 학무위원⋅면장⋅기업가 등을, 4.4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강진의 지도층으로 자리잡았다.

금릉학교를 졸업한 김안식씨(金安植)는 4.4 강진독립만세운동을 사실상 주도한 주인공이었다. 금릉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동경에 유학중이던 그는 조선청년독립단의 핵심멤버였다. 1918년말에 한국으로 밀파되어 독립운동기금을 모으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1919년 3월 20일 동경에서 유학중이던 김안식이 귀향하면서 상황이 급격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강진 최초의 근대학교인 금릉학교의 역사를 제대로 아는것도 강진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일이다. /글 사진= 주희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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