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자의 질곡, 대한민국의 아픔

1914년 4월 대구면 일대에서 일제에 의해 처음으로 시작된 청자요지 발굴 모습이다. 제일 왼쪽 사진이 당전마을, 중간 사진이 황동마을에서 발굴하고 있는 사진이다. 제일 오른쪽은 정산(庭山) 제2요 발굴 현장이라는 당시 사진설명이 있다. 일제는 이렇듯 마을이나 산의 이름을 붙여 요지의 이름을 만들었고, 여기에서 발굴된 청자편에 요지의 이름을 크게 써 놓았다.<고려청자박물관 제공>
일본인들이 개경일대에서 도굴해 일본으로 밀반출한 고려청자가 수만점이 넘을 것이라는 주장은 틀린말은 아니다. 사학자 이홍직 선생은 일본의 민간인 소장 고려자기만 수만점이 넘는다고 기록했다.

지금 국내 모든 박물관과 민간 소장의 고려자기를 모두 합친다 해도 2만점에 불과하다는 것을 감안해보면 일인들이 빼돌린 고려청자가 어느정도 규모인지 짐작할 수 있다.

지난 2007년 충남 태안앞바다에서 발견된 태안선에서 인양된 12세기 최고급 청자가 무려 2만3천여점이었다. 이런 배가 일년에 최소한 서너차례는 갔을 것이고 한세기가 100년이므로 이를 시간으로 계산하면 고려시대 강진에서 생산돼 개경으로 갔던 강진청자의 양은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일본으로 간 고려자기는 수만점

12세기 강진에서 생산돼 개경으로 실려가 일본인들의 손에 들어간 다음 미국에서 판매돼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강진으로 돌아왔던 <청자상감국화문과형주자>의 모습이다. 이 청자는 다시 서울로 돌아갔다. 고려청자가 걸었던 전형적인 역정을 보여준다.<강진일보 자료사진>
강진에서 생산돼 개경으로 간 고급 청자는 귀족들의 소장품이었다. 그들이 죽으면 함께 땅속에 묻혔다. 그것까지만 해도 기구한 운명이다. 왜 하필 땅속이었을까. 강진에서 가난한 도공들의 꼼꼼한 손길을 거쳐 생산한 청자는 목숨을 걸고 개경까지 배로 운송된다.

강진~개경 뱃길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이렇게 개경에 도착한 강진청자는 오랫동안 고려의 귀족들의 삶과 함께 하다가 그들이 죽으면 함께 묻혔다. 강진청자는 땅속에 묻히면서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을 위로했다.

그렇게 500년 이상을 땅속에서 숨죽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다시 도굴돼 이사람 저사람 손을 거쳐 이리저리 거래되고 바다를 건너 해외로까지 대량 유출됐다.

청자 한점이 있다. 이 청자는 고려시대 강진에서 생산된 청자가 얼마나 기구한 운명을 살았는지를 보여준다. 2017년까지 강진의 고려청자박물관에 소장돼 있던 것이다.

고려청자는 무덤에서 파 헤쳐진 후 이를 수집하는데 가장 혈안이 됐던 집단은 일본인들이었다. 그 다음이 당시 개항과 함께 막 들어왔던 미국 외교관이나 선교사들이었다. 일본인과 미외교관, 선교사들에 의해 고려청자가 미국으로 유통됐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 미국에서 한국 예술품 수집가들 사이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인물은 뉴욕과 보스턴에서 골동품 가게를 운영하던 사다지로 야마나카(Yamanaka Sadajiro, 1866~1936)였다고 한다.

사다지로 야마나카는 야마나카 상회란 골동품 가게를 운영하며 전시 판매전을 열고, 이를 위해 카달로그까지 만들어서 미국사회에 배포했다. 이 야마나카상회가 1915년 출판한 미국 현지 판매용 카달로그에 바로 ‘청자상감국화문과형주자’가 있다.

청자상감국화문과형주자의 사연

이 자료는 2016년 열린 청자축제 학술세미나에서 고려대학교 김윤정 교수(고고미술사학과)가 발표한 ‘근대 미국에서 고려청자 소장품 형성과 연구성과’란 논문에 근대 미국에서 청자가 유통된 사실을 설명하면서 하나의 예로 설명된 내용이다.
 
김 교수는 야마나카상회의 카달로그 청자가 당시 고려청자박물관에서 소장중인 것과 동일하다고 확인했다.

고려청자박물관에서 소장했던 <청자상감국화문과형주자>는 강진군이 2007년 서울의 수집상으로부터 10억원에 구입한 바로 그 작품이다.

그러다가 감정가 사기사건에 휘말렸다가 2017년 다시 주인에게 되돌아 갔다. 강진군도 10억원을 되돌려 받았다. <청자상감국화문과형주자>의 족적이 어렴풋이 그려진다. 그 행보가 참으로 모질고 슬프다.

이 청자는 강진에서 상감청자가 가장 화려하게 발전한 시기인 12세기 강진 대구의 사당리 일대에서 만들어 졌다. 강진의 이름없는 도공은 참외모양의 청자를 만드는 단계에서부터 섬세한 공을 들였을 것이다.

청자는 어느 봄날 강진에서 개경으로 가는 청자선에 실렸다. 배는 다행히 아무런 사고도 없이 개경에 도착했다.

이 고급스런 상감청자는 고려의 왕족이나 어느 귀족에게 넘겨져 가장 귀중한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기를 수십년, 또는 기백년. 이 청자는 왕(또는 귀족)이 죽으면서 무덤속에 함께 매장됐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무덤속에 묻힌채 수백년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날 느닷없이 땅 밖에서 쇠침봉이 들어오더니 자신의 몸을 건드렸다. 조선말이나 일제강점기 초기에 활동했던 일본인이나 조선인 도굴꾼들이었다. 

이 청자는 조선에 살며 고려청자 수집에 혈안이 돼 있던 일본인들에게 넘겨졌을 것이며,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유통되다가,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서 활동중이던 야마나카의 수중에 들어갔던 것이다. 

미국으로 건나가 다시 고향행

<청자상감국화문과형주자>의 기구한 운명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야마나카상회가 카달로그까지 만들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청자는 미국인이 구입해 갔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다시 세월이 흘렀다.

그 후 미국에서의 족적은 지금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이 청자가 다시 태평양을 건너 왔다는 것이다. 언제 어떻게 왔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청자는 서울의 개인 소장자 품으로 돌아갔다.

그러다가 강진군이 2007년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이 소장자로부터 <청자상감국화문과형주자>를 구입했고, 고향으로 돌아와 청자박물관의 주요 유물이 됐다.

청자가 강진을 떠나 개경과 일본, 미국을 거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기까지 장장 90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다가 법정싸움에 휘말려 다시 서울로 되돌아 갔으니 청자의 기구한 운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총독부, 대구요도지 치밀한 조사

일본인들은 1914년 대구면 일대의 요지를 첫 발굴하면서 인근 주민들의 신체를 측정하기 위해 사진을 따로 촬영했다. 그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일제는 조선에 대한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었다.<고려청자 박물관 제공>
이 유구한 역사의 고려청자 뿌리를 일본인들이 가장 먼저 관심을 보였던 것은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913년 봄 강진 대구면 일본인 주재소원의 보고로 ‘강진이 고려청자를 만든 곳이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 일본은 조선총독을 두명씩이나 강진에 내려 보내며 매우 체계적인 조사를 했다. 그들은 1914년 4월 전문가들을 강진에 보내 정식적인 발굴조사를 했다. 

고려청자박물관이 지난 19일부터 전시회를 시작한 ‘하늘의 조화를 빌리다’라는 전시회에 1910~30년대에 조사된 청자들이 전시되고 있는데, 전시회 도록에 당시 발굴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게재돼 있다.

청자박물관이 고생해서 수집한 자료들이다. 몇차례 이미 공개된 자료들이지만 당시의 유물들과 함께 한자리에서 보니 감회가 새롭다.

이미 그때는 대구 일대에 청자편만 수두룩하게 있을 때다. 최고로 좋은 것은 고려때 모두 개경으로 모두 실려갔고 어쩌다 전해 오는 물건이나 무덤에 있던 것들이 파편과 함께 뒤섞여 있을 뿐이었다.  

1914년 당시 발굴모습을 보면 일련의 주민들이 땅을 파헤치고 있다. 손에는 집에서 사용하는 산태미와 쇠스랑이 들려 있다. 복장은 전형적인 흰옷이다.
 
머리에 땀흘리는 것을 막느라 그랬는지 당전마을 발굴에는 두사람의 모습이 보이지만, 항동마을 발굴현장은 10여명 이상이 보인다.

옆에서 발굴작업을 감독하는 것으로 보이는 양복차림의 일본인들의 모습도 보인다. 현지 주민들이 일본인들에 의해 고용돼 발굴 작업에 참여했던 것이다.

당시 강진 사람들이 고려청자에 대해 어느 정도의 인식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민담이 있다. 강진문화원이 발행한 ‘강진의 민담’이란 책에 전해 온다.

일제강점기때 일이다. 어느날 대구의 한 농부가 묘를 이장하면서 고려청자를 한점 파냈다. ‘귀신붙은 물건’을 처리할 방법이 고민이었다. 언뜻 생각한게 읍내 일본인이었다.

농부는 청자를 팔아 먹걸리 값이나 할 요량으로 읍내 일본인을 찾아갔다. 읍내에 도착한 농부는 일본인 집으로 가서 가져온 청자를 내려놓았다.

일본인은 청자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태연하게 “막걸리 값이나 하소”라고 말하면서 봉투를 한 장 건네주었다.

농부는 봉투까지 넣어서 주는 것을 보고 감지덕지하고는 주막에 와 막걸리나 한잔할 생각으로 봉투를 꺼내보았다. 농민은 깜짝 놀랐다. 봉투안에는 종이돈이 몇장 들어있었다. 종이돈 한 장(10원)이면 밭한마지기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 

경색한 농민은 일본사람이 돈을 잘 못 넣은 것으로 알고 막걸리고 뭐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아 나살려라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 농부는 집에 도착해서도 방문을 잠그고 누가 돈을 다시 찾으러 오지 않나 전전 긍긍했다고 한다. 그런 강진사람들이었다.

주민들의 체격까지 사진으로 기록

그러다가 청자편이 땅속에서도 쏟아지는 것을 보며 발굴에 동원됐던 주민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일본인들은 사당리 일대를 발굴한 후 1925년에는 현지 지표조사를 통해 가마분포도도 개략적으로 정리했다.

또 1939년에는 조선총독부가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을 근거로 대구 일대를 고적 제107호로 지정했다. 나름대로 청자요지를 체계적으로 관리할 계획을 세운 것이다.
 
청자박물관이 발행한 전시회 도록에는 특이한 사진도 있다. 남자와 여자의 정면과 측면사진이 있다. 일제가 청자요지를 발굴하면서 강진사람들의 체격도 측정해 이를 사진으로 남겼다. 청자발굴만 한게 아니라 강진사람들의 체격까지 조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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