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수선생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시는 읍민 여러부~운”

강진극장은 “극장계”(劇場契)로 설립되었다.

1959년 강진읍내의 모습이다, 강진극장 대표사장이었던 서정완 선생이 운영했던 서약방과 금성여객 간판이 보인다. 금성여객의 개찰직원이었던 김춘수 선생은 특유의 걸죽한 목소리로 유명했는데, 금성여객에 걸려 있는 스피커를 이용해 그날밤 강진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를 홍보하는 방송을 했다.
강진극장은 1962년 7월 31일에 문을 열었다. 강진극장 건립은 처음에 강진읍사무소가 주도해서 시작된 일이였다고 한다. 강진경찰서 아래에 공회당이란 극장을 대신했던 공공건물이 있었다.

강진공회당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건물로 경성 부민관(府民館)과 같이 관공서가 주관하는 강연회나 공연장으로 이용했던 일종의 강진군민회관이었다.

1950년대 중후반 자유당 시절, 경찰들에게 유도(柔道)훈련을 시키던 건물로서 상무관(尙武館)으로도 불리웠다. 이 무렵 모든 영화상영이나 공식행사는 이곳 공회당에서 열렸다.

남북이 긴 직사각형 형태의 콘크리트와 목조가 병행된 건물이었다. 현관 왼편에는 화장실, 바닥에는 항상 유도연습용 매트가 널따랗게 깔려 있었고 남단에는 높이가 1m 쯤되는 연단 겸 무대가 장치된 강당용 건물이었다.
 
그러다가 점점 인구가 늘어나고 건물이 노후 되면서 1960년대 초에 강진유지들은 강진극장설립에 대한 필요성을 갖게 되었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극장계’라는 것을 만들어 극장건립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던 것이다. 일종의 주식회사를 만들었다.

극장계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서약방을 경영하던 서정완(徐正完), 강진소주 김유홍(金攸洪), 광명상회 명원채(明元埰), 모란다방 한고식(韓高植), 강진공업사 김영호(金英鎬), 천일의원 김성수였다.

대표사장은 서정완이었다.(본 기고문에서는 존칭생략) 서정완은 ‘서약방’과 ‘금성여객’을 운영하였다. 명원채는 광명상회를 운영했는데 요즈음 같으면 대형마트 정도 규모였다.

한고식은 모란다방과 서민금고를 운영했고, 김성수는 천일의원 원장이었다. 김영호는 강진공업사를 운영했는데 당시에는 센방공장(鐵工所)이라고도 불렀다.

이들 모두는 강진에서 알아주는 부자들이었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의 강진부자가 수백 ․ 수천 ․ 수만석의 대토지를 소유한 땅 부자였다면, 해방 후 토지개혁이 된 다음 신흥부자들은 대부분 자수성가형 상인들이었다.

강진극장의 주주들은 모두 타계하였고, 최근까지 백수(百壽)를 누리고 살면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세상을 떠난 인물은 김유홍이었다.

당시만해도 강진극장 터는 강진에서 제일 비싼 땅이었다. 특히 비싼 땅에 500석(席)의 객석을 갖춘 2층극장을 짓는다는 것은 상당한 자본이 들어가는 일이었다.

강진의 부자들은 의기투합하여 돈을 갹출했던 것이다. 대표사장은 서정완이 맡았다. 규모는 인근지역과 비교해서 가장 컸다. 정확한 좌석의 규모는 499석. 500석에서 한 석이 부족한게 흥미롭다.

아마도 건축법상의 어떤 규정 때문에 그렇지 않았는가 추정해 본다. 아무튼 그 정도의 규모는 여수의 시민극장(961석), 중앙극장(522석), 목포의 평화극장(667석), 호남극장(679석), 순천의 맘모스극장(749석), 시민극장(538석)에 이어 군단위에서는 가장 큰 규모였다.

인근 해남의 중앙극장(435석), 장흥극장(386)도 강진을 따라오지 못했고, 영광극장이 498석으로 강진극장 다음을 기록한 정도였다. 초창기에는 벤치형태의 긴 나무의자가 놓였고, 몇 년후 접이식 개별의자로 바뀌었다.(강진일보 자료) 여하간에 강진극장의 건립은 강진 사람들의 생활양식과 문화를 바꿔놓은 일대 큰 사건이었다.

영화 마부(馬夫)는 민초들의 신분상승을 희구하는 작품이었다. 

1960년초 강진극장에서 상영된 영화 중 가장 특이한 영화로 기억되는‘마부(馬夫)’. 불과 7-8년 전에 한국전쟁이란 민족의 비극을 체험한 강진사람들은 이런 영화를 보면서 삶의 상처를 차츰 지워갔다.
1960년초 강진극장에서 상영된 영화 중 가장 특기할만한 것은 ‘마부’(馬夫)였다. 이 작품은 박서방(1960년)을 감독한 강대진(姜大振) 감독의 역작이었다. 마부는 베를린 영화제에서 특별 은곰(銀熊)상을 수상하므로 전국적으로 션세이션을 일으켰다.

강진극장은 발디딜 틈없는 초만원이었다. 동부로는 군동 ․ 영포, 호동, 남부로는 목리 ․ 남포, 물건너 금사리, 서부로는 서기산 기슭 지전안통(장전, 부춘리, 자래부리, 송덕마을 등), 도원리 ․ 학명에서까지 밤이면 후랏쉬를 켜고 관객들이 모여들었다.

당시 강진극장 포스터는 김승호가 마부로 분장하여 벙거지 모자를 쓰고 말구루마를 몰고가는 사진이 곳곳에 붙었다.

간판사는 천연색 뺑끼(페인트) 그림을 그려서 극장 이층 전면에다 대형간판을 걸게그림으로 붙여놔서 흥미를 더욱 유발시켰다. 당시에는 강진중, 강진농고 성요셉 여학생들도 단체관람을 하였다.

강대진 감독은 목포고등학교와 서라벌예술대학을 졸업한 목포출신 영화감독이었다. 시장통길 물감집 사위이자 필자의 이종매형인 당시 강진농고 교사 박동오(朴東五)와 목고 동창이었다.

매형이 강대진이 ‘목고동창 내 친구’라고 자랑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강대진은〈해 떨어지기 전에, 1960〉를 비롯하여〈박서방, 1960〉〈마부, 1961〉등을 감독하며 서민영화감독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유명감독 ․ 배우, 히트한 영화가 강진에 들어올 때면 강진극장의 스피커에서는 불튀는 멘트가 강진읍내에 널리 울려퍼졌다.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시는 강진읍민 여러분! 오늘밤 당극장에서는 베를린 은곰상에 빛나는 강대진 감독 ‘마부’가 상영됩니다. 한국영화 사상 가장 인기있는 배우 김승호, 황정순, 신영균, 조미령, 김희갑, 주선태가 총출연하여 열연하는 명화 ‘마부’를 꼬옥 감상하시기 바랍니다.”

이 멘트는 대표사장 서정완이 운영하는 금성여객에서 날마다 목이 터져라고 버스를 안내하는 개찰원 김춘수의 몫이었다. 십년 이상 개찰직원으로 근무하던 사람이었다.

목소리가 어찌자 구성지고 컬컬하던지 “개나리, 도암, 신전, 좌일, 남창가실 손님들은 시방 곧 출발하는 금성여객에 승차하세요. 아자씨 언능 타시란말이요. 자아아 출발합니다. 오라이!” 소리로 잔뼈가 굵었다. 그런 김춘수가 극장으로 옮겨와서는 강극(강진극장)에서 낭낭한 목소리로 홍보 마이크를 잡았던 것이다. 

마부의 내용은 이러했다. 시집가 남편에게 구박받는 벙어리인 큰 딸 조미령, 고시공부를 하는 큰아들 신영균, 결혼으로 출세하려는 작은딸 엄앵란, 쌈으로 소일하는 작은 아들 김진, 이렇게 네 남매를 거느리고 홀아비 마부로 살아가는 김승호의 생활은 고달프기만 했다.

춘삼의 마음에는 두 가지 꿈이 있다. 하나는 맏아들의 고시 합격의 꿈이다, 다른 하나는 마주댁(馬主宅)의 과부 식모인 수원댁 황정순과 사랑을 나누는 바램이 있었다.

춘삼이가 조석(朝夕)으로 마주댁에 들를 때마다 황정순은 김승호의 사람됨에 호의를 가지고 언제나 호의와 인정을 베풀어 주었다. 말을 몰고 가는 춘삼이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한다.

춘삼에게 잘못이 없음에도 누명을 쓰고 더 이상 말을 몰지 못하게 되는 위기도 맞는다. 큰 아들 신영균은 세 번이나 고시에 낙방했지만 결국 고시에 합격하여 아버지 김승호에게 보답을 한다.

큰아들 신영균은 외로운 아버지와 수원댁 황정순의 재혼을 주선했다. 결국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인생의 행운이 찾아오므로 마부 춘삼의 가정엔 다시 밝은 웃음꽃이 피게 된다는 해피 앤딩 스토리였다. 불과 10여년 전에 한국전쟁이란 민족의 비극을 체험한 강진사람들은 이런 영화를 보면서 삶의 상처를 차츰 지워갔다. 강진극장 팬들에게 ‘마부’와 같은 영화는 “내 인생에도 언젠가는 태양이 뜬다” 희망을 안겨 주었던 것이다.<계속>  /출향인·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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