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그들은 고려청자를 도적질 했다

‘청자음각연당초문정병(좌측)’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으로 유출돼 돌아오지 못했다. 일본의 중요문화재가 됐다. 12세기 강진의 대구 사당리에서 생산돼 개경으로 갔다가 무덤의 수장품이 됐다가 도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909년 도굴품인 ‘포도동자무늬 표주박모양 주자(우측)’는 이토 히로부미가 주도해 설치한 창덕궁 이왕가박물관이 950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구입했다고 한다. 역시 12세기 강진산으로 추정되는 청자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한일강제합병이 있기 전인 1907년, 이미 조선왕궁을 장악한 일제는 고종황제를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창덕궁에 식물원과 동물원을 지어 서서히 창덕궁의 모습을 파괴해 가기 시작했다. 창덕궁에는 박물관도 들어섰다. 처음에는 창덕궁박물관으로 불리다가 나중에는 이왕직박물관으로 불렸다.

이왕직박물관은 조선왕실의 문화재를 전문 관리하는 박물관이었다. 1909년 3월쯤의 일이다. 이때는 아직 창덕궁박물관을 일반에 공개하기 전이었는데 박물관에는 개성의 옛 무덤에서 도굴된 고려청자 여러 점이 전시돼 있었다. 고종은 어느 날 이토(伊藤博文)초대 통감의 안내로 박물관 진열품들을 먼저 구경하게 됐다. 순간 고종황제의 눈길을 끈게 있었다. 청자였다.

청자를 몰랐던 고종황제

고종이 청자를 보고 이토 통감에게 물었다. “이 푸른 그릇들은 어디서 만들어진 것이오” 이토는 “이 나라의 고려시대 것입니다”고 답했다. 고종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런 물건은 이 나라에는 없는 것이오”라고 말했다. 고종황제는 청자가 조선에서 만들어진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토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침묵했다. 남의 무덤을 파헤쳐 건져낸 도굴품이라는 사실을 밝힐 수 없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대화를 창덕궁박물관장으로 있던 스에마스 쿠마히코가 들었다. 그는 나중에 한국의 도자기 문화를 연구했던 일본인 아사가와 다카나리가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어 세상에 알려졌다. 고종황제와 이토통감과의 대화 이야기는 <한국 문화재 수난사, 돌베게·1997)라는 책의 한 귀퉁이에 수록돼 있다.

19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청자는 개경에서만 수집되는 것이었다. 개성상인들과 일본인들이 무덤에서 도굴돼 나도는 것을 매입했다. 조선왕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고종황제가 “이런 물건은 이 나라에는 없는 것이요”라고 대답한 것은 그렇게 무리는 아니였다. 특히 청자가 어디에서 만들어진 것인지를 아무도 몰랐다.

그후로부터 4년 후인 1913년 봄. 한일강제합병이 이뤄진 후였다. 강진 대구면 주재소원이었던 일본인 나카시마기군이 주민들의 제보를 받아 청자가마터를 발견해 총독부에 보고하면서부터 청자에 대한 관심이 폭증했다. 그 다음해 총독부는 이왕직박물관장을 강진에 내려보내 현지 조사를 하게 했다. 고종황제와 이토통감의 대화를 들었던 바로 스에마스 쿠마히코였다. 그는 대구를 조사한 후 이런 기록을 남겼다.

‘1914년 3월 이왕가에서는 덕수궁의 직원을 강진에 출장케 하였는데, 그 때 출장갔다 온 직원이 건네 준 자기파편 하나가 이 원대한 발견의 계기가 되었다. 나는 그것이 즉각 청자파편인 것을 알고 다시 유품 몇 점을 구했다.

강진이 청자생산지다

이토 히로부미의 모습이다. 1906년 초대 통감으로 부임한 후 고려청자를 싹쓸이했다. 한때 고려청자가 품귀현상을 빚기까지 했다. 그가 직접 일본으로 반출한 고려자기가 1,000점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의 영롱한 색깔과 상감의 예술성이 모두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정수품(精髓品)인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천재의 기회를 잃지 않고 대구면 현지를 답사하기로 하고 같은 해 4월에 출발했다. 이곳에 당도한 즉시 청자파편이 산재한 곳을 찾아 각처에서 파편을 수집하여 이를 시험하였다. 그 결과 많은 파편들이 개성과 강화 등지에서 발견한 것과 동일한 것임을 알았다. 나는 고려 고도요의 도기장이 바로 이곳이요, 명성을 세계에 떨친 고려청자의 원산지가 바로 이곳이었다는 점에 확신을 얻었다'

이왕직박물관은 그해 6월 강진에서 수집한 파편을 정리해 창덕궁 주합루에 진열하고 신문기자들을 초청해 언론공개 행사를 열었다. 강진청자요지는 다음날 신문에 대서특필 됐다. 강진이 고려청자의 생산지였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관심을 끄는 것은 이 자리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직접 참석했다는 것이다.(대한매일신보 1914년 6월 4일자) 

강진의 청자편을 만난 무렵 그는 이미 황제가 아니였다. 그는 1910년까지만 재위했다. 폐위된 순종은 창덕궁에 거처하며 망국의 한을 달래고 있을 뿐이었다. 부서진 청자편을 본 순종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고려청자의 화려한 파편은 조선의 처절한 앞날을 예고하고 있었다. 

당시 순종의 처지는 모든 권한을 일제에 빼앗긴 허깨비 신세였다. 그의 모습을 전한 글이 있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 5월 3일 독일 알게마이네 차이퉁의 기자가 순종을 인터뷰했다.(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발간 ̒독일어 신문 한국관계기사집(기사집)̓ 참조)

일본인들, 고려청자 대대적 도굴

̒'오늘의 서울, 황제를 만나다̓라는 제목의 이 기사에서 독일 기자는 순종에 대해 “80세 정도의 깡마르고 햇빛을 보지 않은 얼굴의 노인이었다. 황제는 그저 아편을 피우거나 정원을 가꾸는 일로 소일하고 있다”라고 했다. 인터뷰 당시 순종은 50세에 불과했다.

당시 기사는 또 “그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수염을 만지면서 힘없는 눈으로 나를 주시했다. 통역자가 나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그는 듣는 것 같지 않았다”면서 “황제는 너무 말랐는데 마치 해골을 보는 것처럼 혹은 아편을 피우는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상태였다”고 전했다. 인터뷰였지만 당시 독일 기자의 질문에 순종의 답변은 없었다고 한다.(조선일보 3월 15일자 인용) 우리의 문화와 전통이 모두 쑥대밭이 된 것을 순종의 모습이 생생히 전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촬령된 개성의 왕릉급 무덤이다. 오랫동안 아무렇게나 방치돼 고려청자를 찾는 도굴꾼들의 표적이 됐다.<문화재청 제공>
이때는 조선에 들어 온 일본인들이 고려 고분 도굴에 혈안이 돼 있었다. 고려청자에 관심을 쏟은 조선사람이 경성에도 없을 때다. 고려청자는 대부분 고려시대 고분속에 묻혀 있었다. 조선사람들에게 무덤을 파헤쳐 유물을 꺼내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던 일이다. 이 때문에 당시조선인은 고려청자를 본적 조차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달랐다. 도굴꾼을 앞세우고 개성 부근으로 몰려 들어 고분을 파헤쳤다. 이들과 연계된 유명한 일본인 수집가들이 서울 장안에서 활개를 쳤다.

고려자기의 도굴을 조장한 최악의 장물아비는 뭐니뭐니해도 이토 히로부미였다. 그는 부임한 후 틈만나면 일본인을 시켜 ‘얼마든지 좋으니 고려청자를 가져오라’고 했고 ‘몽땅 사자’는 식으로 마구 사들였다. 고려청자 광풍의 시대가 되었다.(미야케이 회고록, 그때의 기억- 고려고분발굴시대 참조)

이토의 하수인으로 니타(新田)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늘 이토의 술자리에 수행해서 노래와 춤을 추면서 좌흥을 돋구던 지금으로 치면 ‘술상무’였다.

최악의 장물아비는 이토 히로부미

이토는 니타에게 “고려자기를 보이는대로 다 사들이라”는 명을 내렸다. 니타는 개성과 강화, 장단 등에서 불법 발굴된 고려자기들을 좌에서 우로 50~100점씩을 손가락으로 지정, 한꺼번에 구입한 뒤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할 정도였다. 어떤 경우에는 한 점포의 고려자기를 싹쓸이 쇼핑하기도 했다.<2012.11 28. 경향신문 기사 참조>

일본의 도자전문가 고야마 후지오(小山富士夫)의 회고담을 보자. “이토 히로부미의 취임 이후 (고려자기를) 수집하는 이가 격증해서 1912~13년 사이 수집열이 절정이 이르렀다. 당시 그 발굴 판매로 생활해 온 자가 수백명이었다. 발굴 발견된 고려도자의 총 수는 몇십만이라고 헤아리기 곤란할 것이다.”(고야마의 고려도자서설 참조)

이토는 있는 대로 고려청자를 싹쓸이했다. 일왕가와 귀족들 사이에서 고려자기는 최고급 선물로 통했다. 고려청자 상품이 당시 서양에서 최소한 수백원에 거래됐는데 조선에서는 10원정도면 구입 가능했기 때문에 상업적으로 큰 이문이 남는 장사였다.

이토가 수집해 직접 반출한 고려청자가 1000점이 넘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토는 훗날 안중근 의사의 총탄을 맞아 죽었다.

개경에서 고분을 파는데 혈안이 돼 있는 일본인들에게 남쪽 땅 강진이 바로 고려청자를 생산하던 곳으로 확인됐다는 소식은 대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마수의 손길을 강진으로 뻗기 시작했다. 대구 주재원에 의해 강진의 청자요지가 알려진 후 일제는 강진에 관심을 집중했다.

19일부터 일제강점기 유물 전시

일제는 대구면 요지에 조선총독을 두 번이나 파견했다. 첫 파견은 1916년 제2대 총독이었던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이후 1934년에는 우가키 가즈시게 총독이 청자가마를 답사하기 위해 강진에 왔다. 조선총독부는 아가키 가즈시게 총독이 다녀간 다음해인 1935년 일본 애지현소속 기사 야마다란 사람을 강진에 보내 2개월 동안 대구 현지에 거주케 하면서 70여개의 요지를 발견해서 파편을 연대별로 구분해서 일본으로 반출한 일도 있었다. 

일본인들의 행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왕가미술관은 1930년에서부터 38년까지 대구 사당리 일대에서 매년 도토 백여가마씩을 채굴해서 배로 운송해 이왕가박물관에서 연구하는 고려자기의 모토로 사용했으며, 고려청자 모조품을 생산하기도 했다.

19일부터 고려청자박물관에서 일제강점기인 1914~38년에 대구에서 발굴된 청자 유물들을 전시한다. 한국과 일본이 경제전쟁을 벌이고 있는 이 시기에 의미있는 전시회가 될 것 같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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