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두 선생 “내가 사카스단에 맞아서 다리가 이렇게 되었네”

1950년대 한국 서커스 공연 모습. 안충열 곡예사 외 5인. 스릴 만점의 서커스 공연은 많은 주민들에게 호기심의 대상이었고 강진읍에 서커스단이 내려오면 온 강진읍내가 떠들썩했다. <사진=서울문화재단 제공>
서커스는 뛰어난 설치물을 갖춘 가설극장이었다. 서커스를 곡마단이라고도 불렀다. 강진에 들어온 서커스단은 주로 쇠전머리(牛市場)에 천막을 쳤다. 오일시장내 지금의 군내버스 정류장이 있는 자리다.

서커스가 한번 들어왔다하면 온 읍내가 들썩였다. 당시 서커스단은 낮과 밤공연을 하기 전에 반드시 읍내를 한바퀴씩 순회했다. 서커스단 퍼레이드에는 반드시 삐에로가 앞장을 섰다.

고깔모자에 줄무늬 옷을 입고, 얼굴에는 주먹코에다 콧수염을 붙이고 뺨에는 붉은 연지를 바르고, 눈보 안경을 썼다. 다음에는 밴드가 자지러지게 구성진 유행가를 불러댔다. 

아이들이고 어른들이고 벌써 서커스의 매력에 정신이 홀딱 빠져버렸다. 학교에서도 쉬는 시간에는 서커스 이야기 일색이었다. 아이들의 고민은 돈없이 어떻게 구경을 할 수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잽싼 아이들이 서커스 경비가 소흘한 틈을 타서 서커스 천막의 포장 사이로 숨어들어가는 모험을 감행하기도했다. 

서커스는 ‘링’이라 불리는 원형 공연장에서 행해진다. 흔히 퍼레이드, 진기한 동물들의 쇼, 팬터마임, 곡예, 덤블링, 줄타기, 공중곡예, 연극, 창극 등의 구경거리들로 구성된다. 특히 팬터마임은 창작성과 예술성이 뛰어났다.

팬터마임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몸 짓이나 표정만으로 하는 연극을 말한다. 기원은 그리스이며, 당시 사람들의 기억에 가장 기억에 남는 팬터마임 배우는 세계적인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1889-1977, 영국)일 것이다.

그는 세계 2차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서 제국주의 범죄성을 거침없이 질타했다.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섰다. 그는 미국에서 공산주의자로 덧칠이 되어 추방되었고, 스위스에서 만년(晩年)을 보냈다. 1975년에는 영국 여왕으로부터 기사작위를 받았고, 1977년 생울 마감했다. 강진가설극장에서도 채플린 영화가 수차례 상영되었다.

강진에서 공연된 가설극장 팬터마임 중에 이런 것이 있었다. 공중변소(화장실)에 여러사람이 줄을 지어 서있다. 배변 직전의 급한 사람들 여러명이 변이 몹시 마려워 얼굴을 찡그리고 손으로 엉덩이를 붙잡고 쩔쩔매는 몸짓을 하면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강진읍 동성리 중앙지업사 건물이 미군정시절 미국공보원이었다. 6. 25전쟁 이후 반공영화, 대한늬우스, 계몽영화를 무료로 많이 틀어줬다.
갑자기 한 사람이 화장실 문에 걸려있는 모자를 찾으러 나타났다. 화장실 안에 들어가는 사람은 자신의 모자를 문밖에다 걸어놓게 되어 있는데, 이 사람은 일을 보고나서 모자를 그냥 놔두고 갖던 것이다.

사람들은 일제히 뒤늦게 나타난 사람을 비난했다. 관객들은 비로서 폭소를 터트렸다. 당시에도 상당히 차원 높게 웃겼던 것이었다.

‘서커스’라는 말은 고대 로마시대에 전차경주 경기장의 울타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쓰였으며 전통적으로 현대식 서커스와 관련된 서커스 연기들의 대부분은 고대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현대식 서커스는 1768년 영국의 한 말타기곡예사가 빠른 속도로 원형 공연장을 돌고있는 말 등 위에 서는 방법을 발견하면서 비롯되었다. 서커스 천막은 1825년 미국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19세기초부터 야생동물연기가 호랑이 사자와 같은 맹수들이 서커스 공연에 포함되었다고 한다. 원숭이와 앵무새는 곡마단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1859년 공중그네타기가 고안되었는데, 공중묘기는 서커스에서 가장 스릴 있는 묘기가 되었다.

강진에 자주 왔던 동춘(東春)서커스
 
극장문화연구가 위경혜에 의하면 1913년 곡마단이 일본을 통하여 조선에 소개되어 들어온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에 의한 최초의 서커스 공연은 1927년 전남 목포시의 박동수(故人)가 ̒동춘연예단̓을 결성하면서부터 시작한다.

일제강점기에 동춘연예단은 전라남북의 ̒도 등록단체̓로 묶여 있어서 이 지역에서만 공연을 할 수 있었으나, 이후 평양이나 만주까지 가서 공연할 수 있었다. 서커스는 1960년대가 전성기였다. 당시 손꼽히던 서커스 단체로는 태백서커스단, 중앙서커스단을 들 수 있다.
 
지금의 동춘서커스 단장이 입단하던 1961년에는 동춘서커스 단원이 대략 250여명에 이르렀으니 상당한 규모였다. 동춘서커스 단원은 당시 상당히 선망의 대상이었다. 

 필자도 1950년대 중반부터 강진에서 서커스를 관람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어린시절 기억을 더듬어 보면 대형천막을 치는 일이 대공사였다. 나무기둥을 세워서 포장을 쳤다.

공중곡예를 하기 위해서는 30m 이상의 높이까지 천정을 올리지 않았을까 싶다. 500여명은 족히 앉을 객석에는 가마니 거적대기를 깔았다.

강진에서는 삐에로의 코미디 쇼, 접시돌리기, 턴불링(기계체조), 삼각구도로 인간탑 쌓기(맨 위에는 어린 소녀), 마술이 1부였다.

2부로는 신파극 또는 국악과 창(唱), 노래, 순서 등이었다. 3부로는 역시 서커스의 하이라이트인 공중곡예였다. 가슴이 조마조마한 묘기였다.

공중에서 그네를 탔고, 이 쪽 그네에서 몸을 던져 저 쪽에서 던져주는 그네에 옮겨타는 묘기를 보면서 관중들은 탄성을 토해내었다. 공중그네에서 남녀가 물구나무도 섰다.
 
이 때 즈음에는 객석에 어김없이 서커스 공연을 찍은 천연색 사진을 가지고 어린소녀들이 팔러 다녔다. 동정심이 많은 강진사람들은 소녀들이 애처로와서 외면하지 않고 잘 사주었다.

서커스에는 불상사도 따랐다. 지방주먹들과 서커스단과의 마찰은 상례적이었다. 강진의 주먹을 상징하는 강진농고 출신 김용두(중앙초 39회)를 비롯한 건달들이 돈을 내고 입장할려고 했겠는가?
 
서커스단들은 기계체조로 몸이 다져진 대단한 주먹들이 끼어있었다. 이들은 전국을 다니면서 지역의 깡패들을 상대로 싸움을 벌여야 했다.

강진에서 입심도 좋고 머리도 좋은 건달대표는 단연 김용두였다. 강진농고 재학시절 트럼펫도 잘 불고, 의리도 좋았다. 강진에서 선후배 기수를 따지려면 기준이 김용두였다. 김용두 동창 혹은 몇 년 위아래로 선후배 차수를 따졌다. 김용두는 서커스단과 대결에서 몰매를 맞고 많이 다쳐서 결국 다리를 절게 되었다.

필자의 중앙초 9년 선배였던 김용두 선생은 후배들을 만나면 자랑반, 푸념반 이렇게 말했다. “내가 사카스단에게 맞아서 다리가 이렇게 되었네”     

필자가 기억하는 강진 가설극장

가설극장이란 임시극장이다. 당시에는 창고같은 건물이나 공터면 가설극장으로 사용되었다. 대표적인 영화상영처는 단연 미국공보원이었다. 현재 중앙지업사(박상우) 자리이다. 여기에서 6. 25전쟁 이후 반공영화, 늬우스, 계몽영화 예컨대 위생영화 등이 상영되었다. 물론 무료였다.

일본강점기 당시에는 지금의 강진경찰서 건너편 공터에 공회당이라 불리는 건물이 있었다. 1950년대 중반에는 상무관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강진경찰서 직원들의 유도장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상무관은 국가기념일 행사장, 각종행사장 또는 공연장으로 이용되었다.

필자가 초등학교 시절 이곳에서 3. 1절 웅변대회를 개최했고 어린시절에 참석하여 입상한 기억이 있다. 심사위원에는 효암 차부진, 김병환(연수당한약방, 서예가), 마중현(장학사)등이 기억나고 기념사진에도 모습이 나와있다.

또한 고치판매 자리, 즉 누에고치 수매소자리 현재 강진읍 동성리 아름다운 교회터가 가설극장으로 사용되었다. 그곳에서 외국영화 ‘보물섬’ ‘징키스칸’ 같은 천연색영화를 변사의 해설로 본 기억이 난다.

이곳은 조선말에 감옥이었고, 그 건너편에 있는 옥샘은 죄수들이 물을 길르러 다녔다고 해서 ‘옥(獄)샘’이라고 불렀다.(독봉 이선웅) 현 중앙교회 아래에 ‘전도관’이 있었는데 원래는 ‘강진농공기술학원’이었다.

여기서 전도관의 ‘천년성’ ‘시온성’을 선전하는 영화도 했고 ‘콩클대회’도 열렸는데 양희봉 선배가 여기에서 성불사의 밤을 불러서 입상했던 것을 본 기억이 난다. 또 한 군데는 강진극장통에서 세무서로 올라가는 길 왼편에 관재국과 금천소주(김유홍)가 있었는데 그 공터가 가설극장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후 자유당 시절 정국이 요동치던 시국에도 강진사람들은 궁핍한 삶 속에서도 여유를 갖고 가설극장에서 영화도 보고 연극, 서커스도 관람하면서 어려운 시절을 잘도 극복해 내었다.  <계속> /출향인·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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