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일보
종합종합
[김병균의 ‘추억의 강진극장’] 2. 난장, 그리고 가설극장베드리장에 난장 열리면 이선웅씨가 주름을 잡았제
강진일보  |  webmaster@nsori.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9.07.11  10:38:00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네이버밴드

   
1950년대 여수시로 통합되기 전 여천시‘가설극장’의 모습이다. 흔히‘나이롱 극장’이라고도 불렀는데 나이롱은 가짜를 의미했다.(사진= 위경혜, 호남의 극장문화사)
 
내 고향 강진을 떠난지도 40년이 훌쩍지났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강산이 네 번이나 변한 셈이다. 1970년대 말에 강진을 아주 떠났으니, 한국현대사의 굵은 사건들, 말하자면 5. 18광주민중항쟁, 6월 항쟁, 촛불혁명은 강진이 아닌 광주와 나주와 서울에서 겪었다.

고향을 떠난 40여년동안 필자는 농촌목회자로서, 변혁운동가로서, 신학연구자로서 생각하고, 기도하고, 선포하고, 글을 쓰고, 현장에서 몸으로 부대끼면서 살아 왔다.

실은 고향에서의 삶보다도 나주와 광주와 서울에서의 삶이 더 오랜 기간이었다. 그런데 잊어버릴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니 오히려 또렷이 나의 기억장치 속에는 1950년대 한국전쟁 이후의 강진의 모습이 16㎜흑백영화처럼 어른거린다.

회고하건대 1970년대 말까지만도 강진에는 일제강점기의 거리와 상가와 관공서와 공공시설, 가옥들이 거의 그대로 남아있었다. 필자는 강진신문에 이어 강진일보를 지금까지 구독하고 있다. 내가 가장 관심을 갖는 기사는 지난날 강진의 역사와 문화였다. 강진이란 DNA를 가진 사람이라면 공통적인 본능일 것이다.

강진극장을 추억하면서 강진사람들의 이야기를 글로 써보려하니 사실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필자와 선후배님, 친구들이 함께 겪어온 역사인데도 정작 기록이나 사진이 책자로 남아있는 것을 발견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강진극장에 관한 사진이나 포스터 한 장도 어느 기관에서 보관하고 있는지 어떤 분이 소장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다행히 필자는 수년 전에 전남대학교 위경혜 교수가 쓴 ̒호남의 극장사̓라는 책을 구해서 대충 보고 서가에 꽂아 놓았다.

다시 보니 이 책은 호남극장의 역사와 함께 한국의 판소리, 무용, 창극, 서커스, 악극단, 영화, 연극을 비롯한 근현대 토착예술의 발굴과 연구와 현장을 정리한 노작(勞作)이었다. 특히 강진극장 이야기는 당시 사람들의 증언이 중요하다.

극장주, 간판사, 기도, 영사기사, 운영관리자 들을 만나야 한다. 다행히 필자의 초등학교 동창인 서영창(조제약국)을 오랜만에 만났다. 그는 강진극장 대표사장 서정완(徐正完)의 3남으로 청년시절 강진극장의 관리운영에 상당한 역할을 했다.

강진극장 이야기를 쓴다고 하니 여러 선후배, 동창들이 기억의 창고를 열어 보였다. 필자는 강진극장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우리가 잊어버렸던 우리의 놀이문화와 정신문화의 맥(脈)을 찾아가 보려는 것이다.

무성영화와 변사에 얽힌 기억들
 
극장연구가 전남대 교수 위경혜의 저서 ̒호남의 극장문화사̓에 의하면 영화 상영과 관람, 그리고 수용의 지역성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지표 가운데 하나가 변사(辯士)라는 존재이다. 변사는 영사기사와 호흡하며 관객의 반응을 살피고 설명의 재미를 위해 영사 속도를 늦추기도 하고 빠르게도 진행했던 극장이라는 ‘놀이판’의 연행자(演行者)였다. 

강진에서도 변사가 해설하는 영화는 흔히 상영되었다. 변사는 토키(talkie, 有聲映畵)가 없던 시절에 외국영화 대본을 해석하던 영화해설사였다. 또는 토키가 있더라도 자막(字幕)이 없는 외국영화에는 반드시 변사가 있어야 했다.

영화 스토리를 변사가 주연과 조연, 남성과 여성 그리고 어린이의 목소리를 변조해 가면서 대역을 하는 것이었다. 요즘 같으면 라디오 드라마나 만화영화의 성우를 연상하면 될 것이다. 필자는 어려서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변사를 흉내내곤 했었다.

   
강진읍 학명리 도원마을 강진천변에 있는 배드리. 예전에 배가 들어왔던 곳으로 강진장이 원래 있던 자리다. 이곳에서 난장이 자주 열렸다.
강진극장 이전에 강진의 문화와 풍물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원형(原型)은 난장(亂場)이었다고 본다. 필자는 청년시절, 또는 낭인시절 독봉 이선웅(1912년생)에게서 ‘베드리장’(배다리)이야기를 들었다. 난장은 요즈음의 ‘축제’라고 보면 대충 들어 맞는다. 난장이 열리면 하이라이트가 씨름대회였다.

올림픽의 꽃이 마라톤이듯이 말이다. 해방 직후 강진치안대장이었던 독봉 이선웅은 일제 강점기에 이름난 씨름꾼이요, 건달이었다. 강진 부자 아니 조선의 부호였던 동은 김충식의 장남 김병채의 호위무사 격이었던 것이다.

가설극장 이전의 무대‘난장(亂場)’

“이선웅이 술이 취하면 강진 장이 세 번 깨진다”는 말이 있다. 강진 인근에서 주먹으로 이선웅을 당할 자는 없었다. 그는 강진 아전집안 출신이요, 독서를 끊임없이 해온 인물이었다. 부풀린 말이 아니라 문무쌍전(文武雙全)이었다. 학력은 볼품이 없으나, 무척 박식했다.

특히나 정치적 감각이 뛰어났다. 이선웅의 삼국지 이야기는 일품이었다. 불의한 권력이나 인간들에게는 거침없는 독설을 퍼부었다. 그는 야당투사였다. 아무튼 이선웅은 강진 베드리장 씨름판의 제왕(帝王)이었다.

이선웅은 원래 힘이 좋고 운동신경이 발달한데다, 젊은 시절 일본에 머무는 동안 일본유도장에서 수업을 받았다. 상시름판의 승자에게 돌아가는 황소는 수년 내리 이선웅의 몫이었다. 베드리 난장에서 풍물패, 농악대가 상모를 돌리면서 북, 징, 꽹가리, 장구를 치는 소리로 신명을 돋구었을 것이다. 우리 강진의 선인들은 난장에서도 삶의 역동성을 발현했던 것이다.
 
필자는 얼마전 1962년 강진극장이 건축되기 전에 영화상영, 창극단, 악극단, 서커스 등을 공연했던 장소를 한번 확인해 보았다.
 
필자는 효암(曉蓭) 차부진(車富鎭)의 저서 『금릉유방(金陵遺芳)』에 게재된 1960년대 말 보은산(북산) 중턱에서 금사봉을 마주보고 촬영한 강진읍 전경이 담긴 흑백사진을 가슴에 품고, 반세기 후 변화하고 발전된 강진을 보면서 “강진극장과 사람사는 이야기”를 써내려 가고 있다. 내 기억에 남아있는 강진의 가설극장을 대충 둘러보자면 이러하다. 

 중앙초등학교에서 버스터미널을 바라보고 오자면 남포로 내려가는 길 모퉁이에 강진소주(차준성)가 있었고, 그 아래에 1957-8년 무렵 자동차 정비공장이 있었다. 바로 그 마당에서 악극단이 공연을 했던 기억이 난다. 무대에서 권총을 쏘는 액션을 하면 무대 뒤에서 화약에 불을 붙여서 폭팔음을 낸 장면을 처음 보았다.

‘뚜레쥬르’ 자리서 외국영화 상영  

 강진 버스터미널 아래 현재 “뚜레쥬르”란 빵집이 있다. 그 자리가 1970년대 자전차포 자리요, 그 전에는 자동차 수리공장이었다. 요즘은 같으면 카센터인데 당시에는 타이어가 터지면 안에서 튜브를 꺼내다가 공기를 주입시켰다. 튜브를 꺼내려면 망치로 타이어를 내리쳤다. 거기서 외국영화를 상영했던 기억이 난다.  

 농협 건너편은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만 다녔던 동소학교(東小學校)였다. 중앙초등학교는 당시에 남소학교(南小學校)로 불리웠다. 해방직후에는 강진경찰서였다. 필자가 4학년 때인 1956년에는 강진중앙초등학교 분교가 있던 자리였다. 당시 분교는 4학년만 다녔다. 4학년 1반 담임선생님은 윤재일이었다.

이후로 교육청과 도립병원이 되었다. 현재는 상가건물이 들어서있다. 이곳 운동장에서 늬우스도 하고, 반공영화도 했다. 반공영화는 간첩이 엿장사로 변장을 해서 가가호호 문마다 표시를 해놓으면 형사가 역공작으로 암호를 바꿔서 간첩을 잡는다 등의 스토리가 어렴풋이 생각난다.

밤에 영화를 하다가 발전기가 꺼지는 수가 있었다. 순간 칠흑같은 어둠이 덮쳐온다. 이 때 사람들은 후레쉬를 켜서 화면에 비추었다. 수십개의 후렛쉬 불이 스크린에 비친다. 그 때 누군가가 익살맞은 투로 “야! 후라씨깨나 모였구나”하고 소리지르면 모두들 와그르 웃었다. 이 분교 운동장에서는 해마다 강진, 장흥, 해남, 영암, 완도까지를 포함한 5개군 배구대회가 열렸다.

심판에는 6. 25 당시 강진농고 연대장을 했고, 이리농대 출신에다 강진농고 교사였던 김채성이 위아래 하얀 츄리닝에다 흰모자를 쓰고 호르라기를 불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배구시합 스코어는 흑판에다 백묵으로 기록했다.
 
강진농고 보라스밴드가 웅장하게 “품파 품파” 흥을 돋구었고, 밴드에 맞춰 농고생들은 열렬히 응원가를 불렀다. 당시 볼거리가 없던 시절이라 국민학생들이 관중의 절반을 차지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강진농고 응원가 “나가자 씩씩히 강농학도여! 선배얼을 이어서 이 땅 빛내자”를 제창할 때면 강진천지가 축제분위기 속에서 뒤흔들렸다. <계속>  /자유기고가

< 저작권자 © 강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강진일보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네이버밴드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가장 많이 본 기사
1
읍 서성리 도시계획도로 공사 본격화
2
성전 출신 곽동진 향우 남양주서 총선 출마
3
향우 자녀 김명지, 드라마 ‘미스터 기간제’ 출연
4
“논 구하기 이렇게 힘들 줄이야…”
5
“화합과 사랑으로 뭉친 강진 사람들”
6
[김병균의 ‘추억의 강진극장’] 2. 난장, 그리고 가설극장
7
청소년상담복지센터, 지역자활센터와 협력망 구축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 · 이메일무단수집거부
전남 강진군 강진읍 영랑로 35 강진버스여객터미널 2층 강진일보  |  대표전화 : 061)434-8788
사업자등록번호 : 415-81-43025  |  발행인 : 황민홍  |  정보관리 책임자 : 주희춘  |  청소년보호책임자 : 주희춘
Copyright © 2011 강진일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nsor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