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안 사장나무 주변에 살던 김성준 가족의 슬픈 이야기

강진읍 서성리에 서 있는 서문한 사장나무다. 7월의 햇살에 사장나무의 푸르름이 더 하고 있다. 6.25 당시 사장나무 주변에 살았던 김성준의 가족들은 뜬금없는 전쟁통에 총살당하고 바닷물에 수장되는 참변에 휘말린다. 그때 뜬금없는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1950년 7월 말, 강진은 폭풍전야였다. 6.25 전쟁이 터져 거침없이 남하를 계속한 인민군이 영암을 점령하고 이제 강진으로 곧장 진격할 태세였다. 그때 강진읍에서 10대 후반의 소년 네명이 만나 불안한 호기심을 나누고 있었다. 그때는 입소문이 요즘의 SNS 보다 위력을 떨칠때다.  

이들은 친구사이였다. 한명은 박창환이란 소년이었고, 또 한사람은 어머니가 무당이었던 김장옥이였다. 또 목포 문태고 2학년이었던 김성준, 또 한명은 아버지가 강진세무서에 다니고 있던 이효묵이란 아이였다. 그저 평범한 10대 후반 친구들이 모여 소문으로 들은 전쟁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던 중에 문태고에 다니던 김성준이란 아이가 이효묵이란 친구에게 걱정스럽게 말을 건냈다. “효묵아, 인민군이 영암에서 금방 강진으로 온다고 소문이 많던데... 인민군이 오면 너희 아버지가 세무서 다니기 때문에 네 가족이 큰일난다고 사람들이 그라더라”

읍내에서 도는 소문을 걱정이 되어 친구에게 전해준 말이였다. 이 말을 들은 이효묵이란 친구도 보통 걱정이 되는게 아니었다. 그래서 그날 밤 집에 가서는 세무서에 다니는 아버지에게 “인민군이 오면 우리 가족이 큰일난다고 합디다”라고 역시 걱정반 우려반하면서 말을 했다.

그게 큰 화근이었다. 놀란 효묵 아버지가 “누 누가 그러더냐”고 다그쳐 물었다. “서, 성준이가...” 그렇지 않아도 안절부절 하던 효묵이의 가족들은 그 길로 문태고에 다니던 김성준이란 아이를 경찰서에 신고해 버렸다.

성전초등학교 주변은 6.25때 민간인이 가장 많이 학살됐던 장소중의 하나다.
당시 강진경찰은 월출산 풀치재에서 인민군과 대치하며 수시로 총격전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빨갱이라면 이를 갈고 있을 때였다. 그런 신고를 그냥 지나칠 상황이 아니었다. 경찰은 그날 밤 신고를 받자마자 집으로 찾아가 김성준을 체포해 유치장에 가둬 버렸다.

성준의 집은 지금의 강진읍 서성리 사장나무 주변이었는데 50대 초반의 홀어머니가 있었다. 지금이야 서문 사장나무 주변이 상전벽해가 됐지만 당시에는 강진읍에서도 초라한 변두리에 불과했다. 

일찍이 혼자가 된 어머니는 지금의 강진고 아래 강진장애인복지회관 자리에 작은 텃밭이 있어서 푸성거리를 재배해 이를 시장에 내다 팔며 아이를 고등학교까지 가르치고 있던 촌부였다. 강진고 자리에는 강진읍의 공동묘지가 있었다.

큰아들은 일제강점기부터 좌익운동을 하다 행방불명이 된 상태였고, 둘째가 성준이었는데 유일하게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는 아들이었다. 막내 성옥이는 해방직후부터 대한청년회에 가담해 우익 활동하고 있었다.

주변사람들이 보기에 어머니는 성준이에게 모든 것을 바치며 살고 있었다. 막내 성옥이가 우익단체인 대한청년회 활동을 열심히 한 이유가 있었다. 큰형이 좌익활동을 하다가 행방불명이 되면서 형제들이 언제 잡혀갈지 모를 상황이 되자 집안을 지켜볼 요량으로 대한청년회 활동을 누구 보다 열심히 했던 것이다.

강진청년단은 1947년 창단된 전국적인 우익단체로 좌익탄압에 가장 선봉에 있던 조직이었다. 성옥의 나이는 어렸지만 대한청년단을 열심히 해서 감찰부 일을 맡고 있었다.  

성옥은 유치장에 갖혀 있는 형을 지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상황이 그게 아니었다. 청년단 간부들 중 누구도 성옥의 사정을 들어줄 형편이 되지 못했다. 강진경찰과 영암에 주둔하고 있는 인민군의 대치상황이 그만큼 심각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음식을 준비해 밤낮으로 아들 성준이 있는 강진경찰서 유치장을 찾아다녔다. 집에서 압구재를 넘어 지금의 경찰서를 왔다갔다하며 통곡을 했다. 이를 본 서성리 주민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지만 난리통이라 누구하나 무슨말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강진경찰은 김성준을 체포한 지 사흘 후 강진읍 옥치마을 뒷산으로 데리고 가 총살시켜 버렸다. 경찰은 이어 항의하러 온 김성준의 어머니도 체포했다. 다음날 경찰은 피란길에 올랐다.

해창앞 바다다. 1950년대에는 해창이 각 섬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 인민군이 강진으로 들어오면서 강진의 경찰들이 고금도로 후퇴했는데, 해창에서 배를 탔다. 당시 유치장에 있던 사람들을 함께 배에 태웠는데 상당수 사람들을 바다에 수장시킨 것으로 전해온다.
김성준의 어머니와 함께 몇몇 수감자들을 도암 해창에서 배에 태웠다. 경찰은 강진만을 지나며 김성준의 어머니를 수장시켜 버렸다. 그 유명한 해창 수장사건이다. 그때 바다에 수장된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다. 이때 살아남은 윤금아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훗날 당시 상황을 주민들에게 증언했다. 아들과 어머니가 불과 오일 정도 차이를 두고 경찰에 의해 죽음을 당한 것이다.

김성준의 동생 성옥이 이런 상황을 지켜보고, 듣고 있었다. 그는 맏형이 지하운동(공산주의 운동)을 하다가 행방불명이 된 후 가족을 지키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우익단체인 대한청년단에 가담해 열심히 활동하고 있던 터였다. 어린나이였지만 대한청년단을 열심히 해서 감찰부 일을 맡고 있었다. 누군가 지켜줄지 알았지만 아무도 그의 집안을 지켜주지 않았다. 하늘이 무너진 일이었다.

동생과 어머니가 경찰들의 손에 죽은 것을 확인한 김성옥은 더 이상 강진에 있으면 자신도 해를 당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야밤을 이용해 인민군들이 주둔하고 있는 영암으로 넘어갔다.
 
일반적으로 강진읍~성전을 오간 길이었던 솔치길을 이용해서가 아니라 지금의 고성사 좌측 산길을 통해서 넘어갔다. 지금도 고성사 좌측길을 넘어가면 성전의 명동마을 뒷산으로 나온다. 행여 경찰을 만날 수 있는 길을 피한 것이다. 

그리고 며칠 후, 1950년 8월 1일이 됐다. 풀치에서 인민군과 대치하던 경찰병력이 철수해 해창에 대기하고 있던 배를 타고 고금도로 철수하자 인민군이 강진에 무혈 입성했다. 1일 오전의 일이었다.

인민군들이 성전을 지나 강진읍 솔치마을을 거쳐 강진읍으로 들어올 때 인민군 행렬 가장 앞에 있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며칠전 형과 어머니의 죽음을 보고 고성사 골짜기를 통해 영암으로 넘어갔던 김성옥이었다.

주민들의 표현 대로라면 그는 기고만장해 있었다. 당시 모습을 지켜본 주민들에 따르면 성옥은 인민군 대열의 앞쪽에 서서 꾕과리 비슷한 것을 치며 분위기를 돋우며 행렬을 이끌고 있었다.  좌익의 누명을 씌워 어머니와 동생을 죽인 경찰들이 떠나고, 좌익의 본산인 인민군이 들어온 상태였다.

그는 피해자였고 한편으로 인민군에게 영웅이 아닐 수 없었다. 김성옥은 내무서(지금의 경찰서)에 배치됐다. 정확한 직책은 알 수 없으나 자전거를 타고 자주 읍내 순찰을 다녔다.

그의 어깨에는 항상 칼빈총이 메달려 있었다. 자전거나 칼빈총이나 누구나 함부로 이용하던게 아니였다. 김성옥은 강진인민위원회에서 상당한 직책을 가진 사람처럼 보였다. 주민들은 그의 눈치를 봤다. 많은 사람들은 김성옥이 형과 어머니를 잃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누가 될지 모르겠지만 어떤 보복을 해도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위기였다.

인민군이 강진을 점령한 3일 후인 8월 4일, 강진장날 오후 강진읍시장에서 인민재판이 열렸다. 국민회장 차래진씨와 부회장이던 배영석 목사, 칠량청년단장 황호윤씨, 경찰관 1명등 10명이 포승줄에 묶여 강진시장 한켠에 줄줄이 앉혀 있었다. 그들은 모두 현장에서 처형됐다. 좌익과 우익, 우익과 좌익의 죽고 죽이는 유혈사태가 본격화되는 순간이었다.

당시 인민재판에서 김성옥이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그러나 형과 어머니를 경찰의 손에 의해 잃은 성옥이 어떤 행동을 했을지는 상상이 되고도 남는다. 수많은 우익인사와 그의 가족들이 총살을 당했다.

인민군은 정확히 두달 후 인 9월 30일 퇴각했다. 좌익들은 인민군과 퇴각하면서 역시 많은 사람을 죽였다. 김성옥도 인민군이 퇴각할 때 함께 강진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0월 1일 강진경찰이 해창을 통해 강진에 상륙했다. 인민군이 강진을 점령한지 2개월만의 일이었다.
 
다시 경찰에 의해 대대적인 좌익색출 작전이 진행됐다. 무고한 주민들이 많이 죽임을 당했다. 전남도가 지난해 6.25를 전후해 각 지역의 민간인 희생자를 개괄 조사한 결과 강진군의 경우 652명이 사망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중에서 성전면이 306명으로 압도적으로 높은 수치가 나왔다.

이 수치들 중에서 김성옥의 어머니와 형이 들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명단에는 그날 옥치뒷산으로 끌려가 경찰에 총살당한 김성준이란 이름은 들어 있지 않다. 아직도 피해자 집계에 들어가지 않은 사망자들이 많다는 뜻이다.

김성준과 그 가족들의 한을 달래주고, 인민재판에서 총살당한 사람들의 원한을 달래줄 위령비 건립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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