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예술을 사랑하시는 강진읍민 여러~부~운”

놀이문화 즐겼던 강진사람들,  극장에서 희망을 보았다

1960년대 목포 평화극장에서 여학생들이 단체영화관람을 위해 줄을 서 있다. 강진극장도 학생들이 단체영화를 자주 보았었다.
1962년 7월 문을 열었던 강진극장은 90년대 초반 문을 닫기까지 강진 문화의 산실이었다. 근대들어 강진의 큰 역사가 강진극장으로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꿈과 희망, 눈물을 주었던 강진극장. 문을 닫은지 30년만에 강진읍 동성리에 소규모 극장이 들어설 예정이어서 주민들의 관심이 높다. 새로운 강진극장을 기대하며 추억의 역사를 되돌아 본다./편집자 주.

1950년대 말이면 필자가 강진중앙초등학교(48회) 5, 6학년 시절이다. 해가 서산에 꼴깍 넘어갈 무렵, 저녁놀이 서기산 위에 붉게 타오른다. 이 때 강진극장 스피커에서는 어김없이 유행가가 흘러나온다. 이어 변사풍의 구성진 방송멘트가 나온다.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시는 강진읍민 여러분! 오늘밤 극장에서는 서부영화의 거장 커크 다글라스와 버트 랑카스터가 주연하는 OK 목장의 결투가 상영됩니다.

보안관과 악당의 숨막히는 총격전이 벌어지는 서부영화의 대표작 ̒OK목장의 결투̓를 놓치지 말고 감상하시기 바랍니다” 이 무렵 빠지지 않고 이어지는 멘트는 “미국 에무지 에무사가 제작(MGM사, Metro-Goldwyn-Mayer로서 2차대전을 전후하여 할리우드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영화사)한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라는 부연설명이 꼭 따랐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는 잘 몰랐지만 강진극장 고성능 스피커 방송은 동문에서 서문까지, 평동에서 남포까지, 북산자락에서 시장통 쇠전머리를 지나 목리까지 들리도록 퍼져나갔다. 아이들은 물론이요, 중고생, 댕기머리처녀 ․ 총각들, 아저씨와 아줌마들의 마음까지도 흔들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굿보러 가는 것이 큰 낙이었다. 무료영화나 그냥 보는 굿, 공짜로 보는 굿을 “공굿”이라고 불렀다. 아이들이나 어른들까지도 관심은 “공굿이냐”였다. 오일장이면 어김없이 만병통치 약장사 패들이 와서 콧수염에 굴뚝모자, 나비넥타이 차림으로 연주하는 아코디언 소리와 구성진 유행가와 소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신통한 마술로 사람들은 넋을 놓고 구경거리에 몰입했다. 맑은 가을하늘 아래 만국기가 펄럭거렸다. 엿장사, 과자장사, 떡장사의 좌판이 벌어졌다.

군수, 경찰서장, 각 기관장, 지역명사들, 돈많은 유지들이 좌정하고 있었다. 필자의 1950년대 중반 유소년 시절부터 강진의 공식행사에서 연설순서는 단연 효암 차부진 선생의 몫이었다. 아이들은 만국기가 펄럭이는 가을하늘 아래서 청백군으로 나뉘어 뛰고 달리고, 어른들도 함께 즐겼던 가을운동회도 큰 볼거리요, 굿이요, 축제였다. 

강진극장은 1962년 7월 31일에 문을 열었다. 규모는 인근지역과 비교해서 가장 컸다. 당시로는 우람한 2층 붉은벽돌 건물이었다. 정확한 좌석의 규모는 499석. 500석에서 한석이 부족했다.(건축이전에는 그 터에 가설극장) 강진극장 건축 이전에도 강진사람들은 공회당에서, 여러 가설극장에서, 학교강당에서 영화도, 연극도 보았다. 악극단과 창극단, 서커스도 많이 들어왔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문화가 있고, 볼거리와 먹거리가 있다. 강진사람들은 일제강점기에도 민속적 노래와 영화와 연극을 보면서 국권을 상실한 아픔을 위로받고 시련을 극복해 내었다. 많은 사람들의 추억 속에 생생한 강진극장은 80년대 후반에 안방극장 TV에 밀려 문을 닫고 말았다.

강진극장은 사람들의 정신문화와 생활문화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사극, 비극, 코미디, 창극, 애정영화, 서부활극, 외국영화 등이 공연되었다. 영화상영은 물론 3.1절 기념식이나 8.15광복절 기념식 등이 극장에서 열렸고, 선거철이 되면 유명 중앙 정치인들을 만날 수 있는 곳도 바로 강진극장이었다. 학교에서 단체영화를 봤던 기억도 가슴을 설레게 하는 일이었다.       

필자는 40여년 전에 출향한 사람으로서 고향신문에다 아련한 옛 기억을 더듬어서 6. 25 직후 미국공보원이 보급한 뉴스와 계몽영화, 가설극장의 국극단과 악극단, 서커스 등의 이야기에 이어 강진극장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목포극장은 전라남도 목포시에 위치했던 극장으로 1926년 11월 처음 개업한 극장이다. 목포극장은 당시 전국 6대 도시에 들었던 목포시의 자랑 중 하나로서 자리했으며 지금은 메가박스 목포점으로 바뀌었다.
당시 영화상영 전 반드시 대한늬우스에 이어 본 영화가 상영되었다. 또 버라이어티 쇼, 강진에 왔던 유명 배우와 가수방문에 얽힌 이야기 등등을 엮으려고 한다. 한 말로 영화는 인생역정 가운데 울고 웃고, 사랑과 미움, 선행과 악행, 행복과 불행, 타락과 회심, 빈자와 부자, 효도와 불효, 결혼과 이혼·재혼, 성공과 실패, 인간이 절망 가운데 신앙을 갖는 신앙극 등 희노애락이 교차하는 인생극장이었다.

한 말로 사람들은 우리가 살아왔던 격동의 시기에 영화와 볼거리는 우리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고, 애환의 삶 속에서 위로가 되고, 우리의 인생관을 바꾸는 역할을 했을까하는 단상을 모아서 몇 차례에 나눠서 기고하고자 한다. 이 기고문을 시작으로 더 풍성하고 정확한 자료에 의해 기록된 강진문화예술의 이야기꺼리들이 출현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우선 멍석부터 펴보자는 생각이다.   
   
호남문화의 특성 
 문화란 어느 특정한 지역의 구성원이 경험하는 공동체적 생활양식을 말한다. 문화에는 언어, 사람이 먹고, 입고, 잠자고 사는 의식주 문화, 춤, 노래, 놀이 등이 있다. 종교적으로는 제천행사, 굿, 예배의식 등도 포함되는 것이다. 역사, 철학,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등 인간의 삶의 영역에 있는 모든 인간 삶의 양태를 ̒문화̓란 언어가 함의하고 있다고 본다. 

 문화가 형성되는데 있어서 지리적 자연환경이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호남은 동쪽의 산악지대와 서쪽의 평야지대라는 동고서저의 지형을 갖추고 있다. 호남만이 아니라 한반도의 지형이 그렇다. 금강, 만경강, 영산강 등이 만들어낸 온난다우(溫暖多雨)한 기후로 인해 일찍부터 논농사가 발달하여 호남평야와 나주평야와 같은 비옥한 곡창지대를 이뤘던 것이다.

호남은 서해안과 남해안이 들쑥날쑥한 리아시스식 해안선과 수천의 섬들로 이뤄진 다도해를 포함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부터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중국과 일본의 해상무역을 담당하였다. 백제와 고려시대부터 한반도에서 해상을 통한 외국문물이 왕성하게 교류된 지역이 또한 호남이다. 

 특히 호남지방은 물산이 넉넉하고 개방적이며 진취적이었다. 반면에 넓은 농경지를 무제한 소유한 천석꾼, 만석꾼 지주들에게 수탈 당했던 소작농민들의 한 맺힌 설움은 일제의 침탈에 대한 민족적 분노와 맞물려 1894년 동학농민혁명으로 분출하지 않았던가? 동학도와 농민군이 내건 구호는 척양척왜(斥洋斥倭), 보국안민(輔國安民)이었다.

민족자주의을 확립하고 공평한 세상이 열리기를 바라고 투쟁한 땅이 바로 호남이었다. 거슬러서 임진왜란 당시 나라가 왜놈의 총칼에 유린되었을 때, 1597년 9월 해남 울돌목에서 이순신 장군은 12척의 전선을 가지고 왜선 133척을 격파시킨 명량대첩이란 역사적 쾌거를 이루지 않았던가! 이순신은 “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역시 나라도 없었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사헌부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에 남기지 않았던가! 이러한 불의와 박해에 대한 저항정신은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에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남에서는 춤보다는 노래가 발달했다. 판소리의 유파 가운데 동편제와 서편제가 호남에서 태동했다. 여기에서 ‘판’은 놀이판인 무대, 그것도 원형의 무대를 가리킨다. 동편제는 전북 무주, 남원, 순창, 전남 구례, 곡성 등에서 발달했다. 이에 반해 섬진강 서쪽의 영산강 ․ 만경강 ․ 동진강 등 평야지역에서 서편제가 발전됐다. 동편제의 창법은 특별한 기교를 부리지 않으며, 남성적이며 위풍당당하며 템포가 빠르고 잔가락보다는 대마디 장단이 주축을 이룬다. 이에 반해 서편제는 기교적이며 여성적이고, 동편제보다 소리 템포가 느리고 잔가락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한국극장의 초기역사와 호남지역 극장시대의 여명기(黎明期)
 한국사회에 극장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02년 대한민국 황실이 마련한 협률사이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우리 전통 연회에는 극장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판소리, 가면극, 무용, 줄타기, 땅재주 등은 특별한 무대가 필요하지 않았고 멍석만 깔면 그게 무대였다.

고종 재위 40주년 경축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현재의 광화문 새문안교회 자리에 있었던 황실건물 봉상사의 일부를 터서 우리나라 최초의 옥내 극장 ‘협률사’를 설립하였다. 모양은 콜로세움처럼 벽돌로 동그랗게 지은 2층, 500석 규모의 소극장이었다고 한다. 1897년 개항한 목포시에 1904년 목포좌가 등장하여 지역 극장의 효시가 되었고, 이후 1926년 목포극장이 세워져 엄밀한 의미에서 상설 영화관의 역사가 시작됐다.

목포보다 2년 늦게 개항한 전북 군산시는 1914년 이전에 군산좌가 문을 열어 지역 극장의 역사를 시작했다. 광주에는 1917년경에 광주좌가 생겨 영화를 시작했고, 전북 전주시는 1925년 제국관이 등장하면서 영화를 선보였다. 이처럼 호남의 극장들은 1900년대 초반부터 1920년대 중반에 걸쳐 등장했다.

̒아도로꾸 쇼̓와 ̒버라이어티 쇼̓
 군산시에서 3개의 극장을 운영한 경험을 갖고 있는 박주일이 기억하는 ̒아도로꾸 쇼(attractive show)̓의 모습은 이렇다. “이것은 무대에서 영화를 돌려주고, 또 무대에서 연극을 하고, 영화하고 연결해. 예를 들어서,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이 올거 아니여, 영화에 출연한 사람들이, 그라믄(그러면) 영화를 상영해, 영화가 딱 끝나면서 연극으로 들어가는거여, 아! 그 때가 50년대에 나왔을거여. ‘아도로꾸 쇼’를 아는 사람이 있을랑가 몰것네(모르겠네)”. ̒아도로꾸 쇼̓는 무대조명이 꺼지면서 산을 넘거나 물을 건너는 장면이 영화장면으로 이어지는 식으로 연극과 영화가 연쇄적으로 반복되는 극이었다.
 
1960년대 액션 배우 황해가 자신이 출연한 극장 무대에 나와서 ̒삼팔선의 봄̓을 부르다가 중간에 총을 들고 나와 “어머니 --”하고 외치는 액션이 대표적인 모습이다. 1958년도에 나온 ̒삼팔선의 노래̓는 박시춘 작곡, 최갑석의 노래였다. 70대 이상에게는 추억어린 노래이다. 황해도 최갑석도 강진극장 무대에서 본 기억이 있다. 한국전쟁의 비극으로 가족이 붕괴되고 이산의 고통을 겪은 대중들의 심금을 울리는 노래가사요, 노래였다.

눈 녹인 산골짝에 꽃이 피누나 /
철조망은 녹슬고 총칼은 빛나 /
세월을 한탄하랴 삼팔선의 봄 /
싸워서 공을 세워 대장도 싫소 /
이등병 목숨 바쳐 고향을 찾으리

당시에는 ̒바라이디 쇼̓라고 통용되었는데 정확한 영어 발음은 ̒버라이어티 쇼(variety show)̓였다. ̒바라이디 쇼̓는 악극단의 흥행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하였다. 악극의 레퍼토리가 권선징악을 주제로 하는 것이었다면, 악극 공연이 끝나면 노래와 희극(코미디)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바라이디 쇼를 하였다. <계속>

김병균: 강진읍 출생
              신학박사
              전 고막원교회 목사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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