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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문 기 행]<1>표류인을 기억하라(하)강진사람들이 서양인의 조선인식을 바꿨다
주희춘 기자  |  ju@nsor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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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6.27  15:4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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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9년 일본으로 표류한 강진사람들이 나가사키의 표류민 수용소에서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습이다. 남자들이 둘러 앉아 장기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볼트가 남긴 기록에는 대화를 나눈 남자 여섯명의 모습뿐 아니라 멀리서 노닐고 있는 다른 일행들의 그림도 남겼다. 이 그림은 아이가 엄마의 손을 잡고 재롱을 부리는 모습이 보인다. 아이의 모습은 머리를 길게 따고 엄마의 오른 손을 한손으로 잡고 열심히 재롱을 떨고 있다. 아기 엄마의 전체적인 체형도 느껴진다. 강진의 여성을 그린 것으로는 가장 오래된 그림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그림은 특히 체색을 넣은 것이여서 더 귀한 그림으로 평가받고 있다.
1828년 3월 27일 일본의 나가사키 표류민 수용소에서 강진사람들을 만난 지볼트는 개개인에 대한 생김새와 성격, 옷차림, 언어등에 대해 꼼꼼한 기록을 계속한다.
 
김치윤에 대해서는 학자이면서 진정한 한국민족의 골상(骨相)을 지녔다고 평가했다.(고영근, 지볼트의 한국기록연구, 1989) 김치윤은 지볼트가 일행 중에서 누가 가장 서민적인 모습이냐고 묻자 스스로를 꼽으면서도 자신이 신분이 높은 계급의 전형이라고 뽐내는 자신감을 잃지 않았다.

지볼트는 김치윤이 학자이면서 선생(훈장)이어서 꽤 꼼꼼하게 보인다고 했다. 허사첨과 김치윤이 지볼트에게 공통적으로 보인 것은 스스로 자존감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허사첨은 자신이 상인이지만 지체가 낮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고, 김치윤은 자신이 신분 높은 계급의 전형이라고 뽐내기도 했다. 서양사람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하려했던 당시 강진 사람들의 마음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자존감 잃지 않은 강진사람들

‘의기잃은 상인’은 또 다른 남자인데 이름이 나와 있지 않다. 지볼트에 따르면 이 상인은 정신이 나갔다고 할 정도로 시무룩해 있었다. 그는 표류 중에 자기의 소지품을 모두 잃어버렸으며 배가 난파당했을 때 부상까지 입었다고 털어놓았다. 아마도 상인이었으면 목적지에서 판매할 상품을 많이 실었을 것이고, 물건을 풍랑을 만나 표류중에 잃어버렸으나 충분히 그럴만한 입장이었을 것이다.

   
강진사람들이 타고 일본으로 표류했던 목선의 모습이다. 닻을 두 개 단 큰 배인데, 배가 아주 견고하게 생겼다. 배 위에는 비바람이나 더위를 피하기 위한 용도인듯 견직물을 덮었다.  
배의 선장 역시 이름이 나와 있지 않다. 나이가 60세로 소개돼 있다. 지볼트는 선장의 모습속에 한국인의 머리, 이마, 턱, 뺨의 전형이 보인다고 했다. 선원 역시 이름이 나와 있지 않지만 지볼트는 이 선원도 한국인의 대표적인 얼굴 모습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나이는 23세이고 키는 5피트7인치로 기록돼 있다. 요즘 단위로 계산하면 170.18㎝다. 191년전 23세된 강진청년의 키가 170㎝였다면 당시로서는 결코 작은 키가 아니었을 것이다. 지볼트는 강진사람들을 보면서 조선사람들이 백인종과 몽고족의 중간형 정도가 될 것으로 판단했다.

이 자료들이 중요한 것은 1800년대 초반 조선 서민들의 얼굴을 실물에 가깝게 그린 그림이 우리나라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해지는게 있다면 양반들의 초상화가 전해질 뿐이지만 그것 마저 섬세함들이 떨어진다. 김홍도의 풍속화에 서민들이 등장하지만 지볼트가 대동한 화가가 그린 것에 비하면 세밀함이 한참 떨어진다. 지볼트는 강진사람들의 눈썹, 머리카락, 눈매, 광대뼈 등을 거의 사진에 가깝게 그리게 해서 기록으로 남겼다.

이 기록들은 조선시대 서민들의 모습을 연구하는데 큰 자료가 되겠지만, 우리 강진 지역에서 활용하기에 따라서는 다른 지역이 없는 문화자산을 가지고 있는 셈이여서 이를 활용할 방법을 적극적으로 찾는 게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강진사람들의 모습생생

   
강진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소지품들의 모습이다. 위쪽으로 물병과 술병과 함께 크고 작은 그릇이 보이고, 아래쪽에는 작은 불상들이 있다. 바다를 항해하는 사람들은 위급한 상황에 기도를 하기 위해 불상을 가지고 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또 한가지 지볼트의 그림중에 중요한 것은 대화를 나눈 남자 여섯명의 모습뿐 아니라 아이가 엄마의 손을 잡고 재롱을 부리는 장면도 있다.

아이의 모습은 머리를 길게 따고 엄마의 오른 손을 한손으로 잡고 열심히 재롱을 떨고 있다. 아마도 엄마의 행상길이나 여행길에 따라나서 함께 표류인 신세가 된 이 아이는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일본의 표류민 수용소에는 국가에서 정한 규정에 따라 하루 필요한 쌀과 반찬 등을 구체적으로 정해 지급하고 있었기 때문에 배고픔은 겪지 않았을 것이다.(이훈, 조선후기 연안주민의 일본표착과 조일교류-전라도인을 중심으로-, 2008)

이 그림이야 말로 조선시대 강진의 여성을 그린 최초의 그림이다. 골격이 커 보이고, 머리는 뒤쪽으로 낭자를 한듯 보이며, 두툼한 저고리와 아래는 군청색 계통의 치마를 입고 있다. 더욱이 이 그림은 다른 그림과는 달리 천연색으로 그려져 있는 유일한 그림이다. 강진의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또 한가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지볼트가 강진사람들을 만나고 적은 조선에 대한 느낌이다. 당시 조선은 외국사람들이 공식적으로 한발도 내딛을 수 없는 쇄국의 나라였다. 서양에 알려진 게 있었다면 당시 기준으로 160여년전 발행된 하멜표류기를 통한 것으로 ‘조선에 들어가면 사람을 억류하고, 철저한 감시속에 반 인간적인 대접을 받는다’는 이미지가 거의 전부였다. 

하멜이 전한 부정적 이미지 순화

그러나 지볼트는 훗날 남긴 저서 ‘조선견문록’을 통해 조선은 그런 나라가 아닌것 같다고 적극적으로 해명한다. 지볼트는 ‘자국의 생산품과 기술, 나라안의 교역만으로 삶에 만족하고 있는 국민에 대해 정부가 평온, 무사한 나날을 확보해 주려면 외국인에 대한 엄격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당연하다’며 조선의 쇄국정책을 우회적으로 두둔해 주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조선인들이 유럽인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지만 고의든지 우연이든지 바닷가에 표착한 서양인들을 불행하게 만들기는커녕 되도록 헤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며 좋은 점을 부각시켜 조선을 소개했다. 또 ‘한국인은 오랜 옛날부터 자신의 고유한 문화와 종교를 가지고 있고 지적 수준이 오히려 일본보다 앞서고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또 지볼트는 ‘한국민과 교섭을 하려면 미개인나 유목민족을 대하듯이 무력을 행사하거나 호의를 베푸는 식으로 하지 말라’고 권장한다.

대신 조선의 정신, 다시말해 왕권중심이라는 통치원리를 탐색하고 조선인들의 풍습과 관습, 언어 등에 대한 이해를 충분히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결론짓고 있다.(유상희 번역, 조선견문기, 1987)

지볼트는 강진사람들로부터 전해들은 말과 일본에서 취합한 자료를 근거로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산업, 사회, 문화의 각 방면에 걸친 내용을 그의 저서 ‘일본’에 삽입한 형태로 1832~1851년 사이에 발간했다.

당시 지볼트가 소개한 한국관련 자료는 서양에서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고영근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러시아에서는 1854년 번역본이 발간됐다. 프랑스에서는 지볼트의 저서를 근거로 1864년에 ‘한국어 문법’이 나오는등 여러 분야의 연구에서 지볼트의 한국기술이 인용되고 참고됐다.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고영근 명예교수는 ‘지볼트의 <한국기록>이 나온 이후부터 서양의 조선에 대한 관심이 시작됐으며 조선말 서양인들이 조선과 교역을 하기 위해 집중 공략을 한 것도 이 책이 나온 것과 관련이 있다고 보고 있다.

1880년대 서양의 조선인식 바꿔

일본학계에서 표류연구의 대가로 꼽히는 일본 나고야 대학의 이케우찌 교수는 “지볼트가 강진사람들을 만나 기록한 내용들이 서양인들의 한국인식을 크게 바꿔 놓아 1880년대 들어 서양선박들의 조선근해 출몰이 잦아졌고, 이때부터 조선의 근대화가 본격화됐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고영근의 앞의 책 참조)

하멜이 1668년 강진 생활등을 종합해 ‘하멜표류기’를 발간하면서 조선을 서양에 최초로 알렸다면, 지볼트가 강진 사람들을 만나 발행한 ‘한국기록’이 조선을 서양에 아주 구체적으로 알리고 홍보했던 것이다.

강진은 이렇듯 표류의 역사가 오롯이 살아 있는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다와 접해 있는데다 일찍이 고려시대 고려청자 운송부터, 조선시대 상업이 발달했던 강진 사람들에게 해양표류는 일상적인 사건이었다.

특히 강진은 제주와 오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이 구간에서 표류사건이 다반사로 일어났다. 2008년 지역신문이 주최한 ‘표류의 역사, 강진’ 국제학술대회에서 중국의 유서풍(劉序楓) 중앙연구원 인문사회과학원 연구원은 강진의 남포마을에서 표류해 중국 절갈성에 표착한 강진주민들의 사례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표류관련 역사자료는 아주 많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자료도 상당수 해양문화와 연관이 있다. 해양문화의 큰 축을 차지고 있는 분야가 바로 표류다. 표류문학은 한국문학의 큰 줄기를 이룬다. 이를 관광자원화한 지역이 아직 없다. 

이러한 해양문화, 표류의 역사를 주제로 해서 표류박물관을 강진에 만들면 강진의 큰 관광자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강진은 남포마을 주변에 강진만생태공원을 잘 조성해 놓았기 때문에 이곳에 표류박물관을 지으면 강진의 역사를 알리는 큰 관문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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