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인생의 큰 무대가 된 계기 됐다’

당시 강진거북 이승만 대통령이 큰 애착,
전국에 숫한 화제뿌리며 부산에서 살다 숨져


2012년 7월부터 부산에 있는 국립수산과학원에서 공개 전시중인 강진거북 박제. 안내 간판에 ‘이승만 대통령이 사랑한 거북이’란 글귀가 쓰여 있다.
7월 1일 다산강좌 강사로 나서는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은 바다에서 성공을 이룩한 강진의 대표적인 기업인이다. 군동 출신인 김 회장은 어떤 계기로 바다와 큰 인연을 맺게 됐을까.
 
그가 2016년 펴낸 자서전 ‘김재철 평전’에 ‘호기심 많은 소년, 바다를 만나다’란 글에 열쇠가 있어 흥미롭다. 그것은 다름아닌 바다거북이었다고 한다. 당시 사연은 이렇게 기술돼 있다.

‘초등학교 3학년때 쯤의 일이다. 고향집에서 20리가 넘는 도암의 바닷가에서 큰 방석보다 큰 거북이가 잡혔다는 소문을 들었다. 어찌나 보고 싶던지 하굣길에 책가방을 든 채 도암으로 달려갔다.

정말 큰 거북이었다. 거북이를 구경하느라 정신이 팔려 날이 저문줄도 몰랐다. 결국 그날 집에 못가고 어느집 돌담에서 뜬눈으로 밤을 세웠다. 다음날 집에 돌아와 부모님께 혼쭐이 났던 기억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김재철 평전 26페이지 참조)

김재철 평전을 기술했던 경제학자 공병호씨는 김 회장의 이야기를 종합해 “내륙에서 자란 시골소년이 바다와 거북을 처음으로 만난것은 훗날 큰 인연으로 이어져 바다가 김재철의 인생에서 큰 무대가 되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한마디로 어린 소년이 군동에서 도암까지 그 먼 길을 걸어가서 큰 거북을 봤던게 오늘날 김재철을 있게한 사건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자서전에 거북에 대한 추가적인 얘기가 없는 것으로 봐서 김 회장은 그 후에 전개되는 이야기는 모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 회장이 그날 봤던 그 거북이가 바로 훗날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승만 대통령 거북이’였던 것이다.(강진일보 2012년 7월 참조)

큰 거북이 도암 망호앞바다(송학리 앞바다라는 설도 있음)서 잡힌 것은 정확히 1949년 8월이었다. 김 회장의 연보에 따르면 군동공립보통학교(초등학교)를 입학한게 1943년(9세)이므로 김 회장이 거북을 본 것은 3학년이 아니라 6학년때였다는 계산이 나온다.

아무튼 8월 한여름에 어린나이에 방석보다도 더 큰 거북이를 보겠다고 군동에서 도암까지 걸어가는 것 자체가 범상한 일은 아니다.

그 후에 벌어진 사연을 요약해 보면, 망호앞바다에서 큰 바다거북이 어부의 그물에 잡힌 후  세계 최대의 큰 거북이 잡혔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펴졌다. 동아일보 등이 ‘신귀(神龜. 신령스런 거북)’가 나타났다며 크게 보도했다.

거북은 장수와 행운의 상징이어서 구경만 해도 장수한다는 믿음이 있었다. 구경꾼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뤘다. 이때 어린 김재철도 구경꾼들속에 있었을 것이다.

강진의 거북에 가장 큰 관심을 보인 사람이 바로 이승만 대통령이었다. 경무대 국무회의에서도 강진의 거북이 자주 화젯거리였다.

대통령의 측근들은 ‘건국 1주년을 맞이한 대한민국의 길조를 표증하는 것’이라며 이 대통령의 사기를 띄웠다.

1년 후 이 대통령은 장수와 행운의 상징인 이 거북을 부산의 영도에 있는 중앙수산시험장으로 옮겨서 키우게 했다. 6.25전쟁이 난 후에도 부산으로 간 임시정부는 거북이를 극진히 보살폈다.

정치인과 관료들이 전쟁통에도 강진거북을 알현하기 위해 줄을 섰다. 부산이 사수된 것도 거북때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강진거북이는 숱한 화제거리를 뿌리며 태평성대를 살다가 결국 병이들었다. 깜짝 놀란 이 대통령이 거북이를 살리려고 온갖 처방을 하게 했으나 1956년 8월 1일 끝내 숨졌다.

이 대통령은 거북이 죽은 후 4년뒤인 1960년 4.19혁명으로 하야하고 하와이 망명길에 오른다. 당시 호사가들은 ‘거북이 죽은 후 이 대통령의 운도 끝나갔다’는 말을 했다. 강진거북은 죽은 즉시 박제로 만들어져 지금은 부산에 있는 국립수산과학원에서 전시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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