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자의 은은한 빛깔 처럼…한여름 시원한 향기가 널리 퍼진다

은은한 향기가 진동한다. 여름 더위에 지친 사람들에게 시원한 향수다. 역사는 지나간 세월이라고 했던가. 고려청자는 옛 이야기일 수 있다. 그러나 이곳에 향기나는 나무가 있어 오래된 역사에 생명을 불어 넣는다. 녹나무는 사철 푸르다. 겨울에는 추위를 막아주고, 여름에는 더위를 쫓아낸다. 천년 고려청자가 여전히 생명을 발하는 곳, 청자가 생산되던 가마를 감싸고 있는 녹나무가 무심하게 보이지 않는다.

어렵게 심어 애써서 기른 나무

1960년대 초반 청자가마 발굴이 본격화 될 때 지금의 청자박물관 주변은 아주 삭막한 곳이었다. 문화재발굴팀들이 허허 벌판에서 청자파편을 찾는 흑백사진을 보면 이곳이 나무 한 그루 없는 야산이나 들판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곳에 녹나무가 심어진 것은 1975년 경이었다. 장흥군 대덕에 위행량(80년 초반 작고)씨라는 사람이 살았다. 과수원을 하고 있던 위씨는 평소에 나무에 대한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우연한 일로 일본을 가게 됐다. 원래 녹나무는 일본에서 아주 중요한 나무로 취급 받는다.

천왕의 거쳐 주변에 녹나무가 둘러 쌓여져 있고, 주요 관광지에는 예외없는 거대한 녹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일본에서 가장 귀하게 대접받는 바둑판이 녹나무로 만든 것이고, 녹나무로 만든 각종 목조가구들이 시중에 많이 나와 있다.

녹나무의 재목·가지·잎·뿌리를 수증기로 증류하여 얻은 기름을 장뇌라고 한다. 향료·방충제·강심제를 만드는 원료로 쓴다. 장뇌의 강한 방향으로 썩지 않고 벌레가 먹지 않아 옛날부터 왕족의 관을 만드는 데 많이 이용하였다.

위행량씨는 주변 사람들의 조언을 들어보니 녹나무가 틀림없이 우리나라 남부지방에서도 잘 자랄 것이라는 반응들이 돌아왔다. 귀국한 위씨는 돈을 몽땅 끌어모아 일본으로 다시 건너갔다. 어린 묘목을 수만그루 구입했다. 묘목을 배에 실어 부산항으로 가져왔다.

인부들을 사서 녹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대덕 자신의 땅에 녹나무를 많이 심은 위씨는 홍보를 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찾아온 게 대구 당전마을에 사는 친척 이용희 선생이었다.

당시 청자박물관 주변은 아직 본격적인 개발이 되지 않은 허허벌판이었지만 중앙박물관 발굴팀이 이용희 선생 집과 주변에서 고려시대 청자기와를 굽던 가마를 발견하면서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곳이었다. 위씨는 이곳에 녹나무를 심어 놓으면 좋은 홍보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시원한 그늘과 은은한 향기 선사

이용희 선생은 위씨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 일대에 묘목 500여 그루를 심었다. 비교적 속성수인 녹나무는 빠른 속도로 자랐다. 그러나 마을주민들이 염소를 나무 주변에 묶어 놓으면서 상당수 나무들이 염소밥이 되고 말았다. 염소는 녹나무의 잎은 물론 나무 밑둥까지 먹어치워 나무를 고사시켰다.

간신히 집 주변의 나무들이 살아 남았다. 1978년 들어서는 강진군에서 나무를 매입해 주었다. 그때 돈으로 130만원을 받았다. 그러나 큰 돈을 들여 녹나무를 일본에서 가지고와 심었던 대덕의 위행량씨는 나무가 대부분 죽어 버렸다. 팔리는 나무도 없었다. 결국 위씨는 홧병에 걸려 80년대 초반 운명을 달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렇게 위행량씨는 떠났지만, 녹나무는 독야청청을 자랑하고 있다. 녹나무를 심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씨를 받아서 묘목을 만들기도 한다. 그런데 녹나무는 어릴때 냉해피해를 쉽게 받는다. 강진지역에 녹나무를 많이 퍼트리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으나 번번히 실패했다. 겨울철 영하로 떨어질때가 많으면서 냉해피해를 입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정부분 자라면 냉해에 강해지기 때문에, 청자박물관 주변 녹나무들은 냉해를 입지 않고 아주 잘 자라고 있다. 지금도 계속 커가는 중이다.         <사진· 글= 주희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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