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됴션국 젼나도 강진현 허사첨이 쓰다’

강진주민 6명이 방에 둘러 앉아 건너편에 있는 지볼트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장면이다. 당시에 그린 것이다. 좌측에서 첫 번째가 김치윤, 두 번째가 허사첨, 다음이 상인, 선원, 선장, 선원순이다. 서양사람들은 당시 사진기가 없었기 때문에 화가들을 대동하고 그림을 구체적으로 그리는게 일반적인 일이었다. 1800년대 중반 강진사람을 그린 그림으로 가장 오래된 실물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 고영근의 저술에서 인용)
바다에 인접해 살아 온 강진사람들은 오랫동안 저 위험한 바다를 실감하며 살았다.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동력선이 도입된게 1900년대 초다. 그러니까 그 이전에는 무조건 돛을 달고 바람에 의지해 배를 움직여야 했다.

나침반도 없고 일기 예보도 없던 시절, 지금 보다 훨씬 많은 해난사고가 났을 것이고 인명피해도 많았다. 대표적인 사고가 해양표류 사건이다. 표류는 어떤 목적지를 향해 가다가 예상치 못한 풍랑을 만나 예상하지 못한 곳에 도착하는 경우다.

일본측 기록에 의하면 1627년부터 261년동안 일본 남쪽지방으로 표류해 온 조선인들의 표류건수가 1017건이다(정성일, 일본에 표착한 강진출신 표류민의 송환과 한일관계, 2008).
 
이중 상당수가 강진현 사람들이 표류해서 일본에 도착한 경우다. 일본뿐이 아니다. 종합적인 통계는 없지만 중국이나 필리핀, 대만등으로 표류한 사례도 많다. 이번 인문기행은 강진사람들과 연관이 많은 표류의 역사를 따라가 본다. 

허사첨은 강진의 어디 사람일까

완도군 군외면 당인리에서는 매년 6월 초 허사겸(許士謙· 1842~1884)이란 사람을 기리는 제를 지낸다. 허사겸은 당인마을에서 태어나 42세되던 1884년 가리포(완도의 옛 이름)첨사 이상돈의 탐학에 대항해 민란을 일으켰다가 체포돼 전라병영으로 압송돼 사형을 당한 인물이다.
 

1827년 3월 나가사키에서 강진사람들을 만나 그 내용을 기록으로 남긴 폰 지볼트는 의학자이자 자연과학자였다. 셈세한 관찰력으로 강진사람들과의 대화기록을 남겼다.
완도에서는 그를 지금도 ‘의사(義士) 허사겸’이라고 부른다(광주일보 2018년 11월 7일). 5월 말이되면 완도 곳곳에 허사겸을 기리는 프랭카드가 여기저기 붙어 완도주민들이 갖는 허사겸에 대한 중요성을 나타내고 있다.

필자는 최근 완도 군외면 면소재지 일대를 지나다 프랑카드에 걸려 있는 허사겸이란 이름을 처음으로 접했다. 물론 한말 가리포첨사에 대항했던 민란의 역사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관심사는 그의 이름이었다.
 
필자는 그동안 허사겸이 아니라 허사첨(許士瞻)이란 사람을 수년째 찾고 있었다. 같은 허씨에 사자 돌림이라면 한 집안 사람일 가능성이 컸다. 허사겸을 통해 허사첨의 역사를 알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에 설레었다.

허사첨은 누구인가. 허사첨은 1827년 겨울에 일행 36명과 함께 배를 타고 강진을 출발했다가 갑자기 강풍을 만나 표류해 일본의 나가사키 지역에 표착했던 사람이다(강진일보 2012년 12월 20일). 당시 허사첨은 나가사키의 조선표류인 수용소에 수용돼 있었는데, 네덜란드 출신의 폰 지볼트(Fr. von  Siebold)라는 의학자이자 자연과학자에게 발견돼 대화를 나눴고, 당시 인물의 그림과 기록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허사첨 일행의 훌륭한 민간외교

허사첨 일행의 기록이 중요한 것은 그들이 지볼트와 나눈 대화기록이 1832~1851년 사이에서양에서 수차례 발간돼 조선을 알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고영근, 지볼트(Fr. von Siebold)의 한국기록 연구, 1989).

우리는 흔히 하멜이 1668년 펴낸 ‘하멜표류기’를 조선을 최초로 서양에 알린 책으로 알고 있는데, 말그대로 최초일 뿐이다. 실제 조선의 언어와 조선사람의 생김새, 여러 가지 문물을 구체적으로 전한 것은 의사출신의 지볼트가 강진사람들을 만나 보고 듣고 구체적으로 기록한 ‘조선견문기’란 책을 통해서 였다(류상희 번역, 조선견문기, 1987).

하멜표류기가 발간된 1668년을 전후한 시대는 서양국가들이 동방을 향해 본격적으로 대항해를 시작하기 전이다. 대항해시대는 1800년대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주경철, 대항해시대, 2014). ‘조선견문기’란 책은 서양국가들이 조선을 이해하는 나침반 같은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지볼트가 강진사람들의 옷을 그림으로 그린것들이다. 두툼하게 솜이 들어간 누비옷과 부채, 짚신, 참빛, 곰방대 등이 보인다. 한 겨울이었지만 부채를 많이 가지고 있었던게 관심을 끈다.<사진=고영근의 저술에서 인용>
이에 대해서는 후술하기로 하고, 허사겸과 허사첨이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알아내는게 급한 일이다. 6월 10일, 완도 당인마을로 향했다. 조선시대 강진현에 속했던 곳이다. 그러니까 일본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 강진현 출신으로 소개했을 것이다.

당인마을은 지금도 매우 큰 어촌마을이다. 이장님의 이름이 허흠용이었다. 이 마을에 허씨가 많이 살고 있다는 신호였다. 마늘밭에서 일하고 돌아오는 허흠용 이장을 만났다. 의사 허사겸 어른에 대한 역사를 경청한 후 본론으로 들어갔다. “집안에 허사첨이란 조상님이 계십니까. 혹시 아주 오래전 일본에 떠내려 갔다가 돌아왔다는 이야기 같은 것 들어본적이 있습니까” 나름대로 간절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의사 허사겸의 직계후손이나 가까운 친족들은 허사겸이 처형된 후 역적의 후손으로 몰리는 바람에 모두 고향을 떠나 지금은 살고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또 조상들 중에 일본으로 표류해서 어렵게 살아 돌아온 사람이 있다는 말도 듣지 못했다고 했다.

혹시 족보에 허사첨이란 인물이 있는지 볼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족보를 설명할수 있는 사람이 마을에 살고 있지 않다는 답이 돌아왔다. 아쉬운 순간이었다. 허사첨이 강진현 어디 출신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또다른 어떤 계기를 끝없이 기다려야 할 일이었다.     

하멜표류기와 조선견문기

다시 ‘하멜표류기’와 ‘조선견문기’로 돌아가 보자. 하멜표류기는 상선(商船)의 서기였던 하멜이 밀린 월급을 받기 위해 조선에서 억류생활을 했던 과정을 기술했던 내용이다. 하멜은 자신이 고생했던 일들을 집중적으로 기술하면서 조선을 미개한 비기독교국가로 표현했다(강준식, 다시 읽는 하멜표류기, 2002).

그러나 의학자이자 자연과학자였던 지볼트는 이와는 달리 매우 객관적 입장에서 강진사람들을 만나 조선인에 대한 보편적인 사실을 기록으로 남겼다.

지볼트는 강진사람들과 접촉한 후 “나는 강진사람들과 접촉한 덕택에 조선의 문화, 학문 및 예술등에 관하여 한층 더 자세히 조사하고, 이 미지(未知)의 국가에 관해서 확실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고 그의 저서에 적었다.

강진사람들이 지볼트를 만난 과정을 다시한번 살펴보자. 부산과 가까운 지역이었던 나가사키에는 일본의 서남부 각 지역으로 표류해 온 조선인들을 수용하는 시설이 있었다. 겨울에 표류해 온 조선인들은 몇 개월을 수용소에서 생활하다 봄이 오면 부산으로 송환되는 식이었다.

지볼트는 수용시설 인근에 있는 데지마란 네덜란드 상관에서 근무하던 중이었다. 지볼트는 조선인과 접촉을 금지하고 있는 일본관리를 설득해 어느날 조선인 네명을 만나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그날이 1828년 3월 17일이었다. 지볼트는 통역관은 물론 자연과학자답게 친구인 화가 카를 위베르 드 빌네브(Carl Hubert de Villeneuve)를 대동하고 조선인들과 대좌한다.

지볼트와 통역이 강진사람들을 상대로 열심히 뭍고, 답하고 있는 사이 화가는 열심히 강진사람들의 모습을 세심한 필치로 그려나갔다. 지볼트의 기록이 오늘날 더욱 가치있게 평가되는 것은 글과 함께 당시에 사진이나 다름없는 그림을 함께 남겼기 때문이다. 

서양사람에 당당했던 강진사람들

지볼트를 만난 강진사람들은 김치윤, 허사첨, 고응양, 곽성장등 남자 3명과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선원과 견습사원등 모두 6명이었다. 지볼트는 강진사람들에게 염색된 옷감과 네덜란드 사람들이 즐겨마시는 게너버란 음료수를 선물로 주었다. 선물을 받은 강진사람들도 그냥 있지 않았다.

자신들이 난파 당시 거친 풍랑속에서 어렵게 지켜냈던 몇 권의 필사본 책과 두루마리 그림 몇 폭, 작은 소반 한개, 몇 개의 항아리와 사발을 선물로 건네 주었다. 당시 선물로 받았던 물건들 중 당상수는 지금도 네덜란드의 한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강진사람들의 물건과 옷이 지금도 해외 박물관에 보관돼 있는 것이다.
 
우리가 관심을 갖기에 따라 강진의 훌륭한 문화유산이 될 수 있는 것들이다. 아무튼 지볼트는 시종일관 진지한 자세로 강진사람들을 만난다. 그는 이렇게 기록으로 남겼다.

“이 불행한 사람들은 저고리 몇벌을 두껍게 껴 입고 있었다. 하늘과 물의 반사빛으로부터 눈을 보호하려는 듯이 눈썹이 쳐지고 상대방으로부터 눈을 피한 채 움직이지 않은 모습과 서민계급의 거친 골격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사람들이다.(유상희, 앞의 책)’

지볼트는 여섯명의 강진사람들에 대한 각각의 생김새, 성격, 직업등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중 김치윤(金致潤)과 허사첨에 대한 설명이 구체적이다. 지볼트는 허사첨에 대해 ‘오늘의 불행을 깡그리 잊어버린 듯 쾌활하면서 진지한 태도를 보여주었다’고 했다.

허사첨은 자신이 상인이지만 지체가 낮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서양사람에게 보여주려고 많은 노력을 하고 있었다. 허사첨은 종이를 펼치더니 한시를 적고 끝 부분에 낙관형식의 한글을 적어 지볼트에게 선물했다. 그의 한시끝에는 ‘됴션국 젼나도 강진현 허사첨 씀’이란 글귀가 선명하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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