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동사람 김홍여의 고통이 조선인민 1천700만의
고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일제강점기 조선농민 수탈 상징
‘동양척식주식회사 폐지하라’ 목소리
그러나 해방되던 해에 동척폐지

군동주민이 동양척식주식회사(이하 동척) 소속 일본인 지주에게 폭행 당한 것은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탄압하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회자돼 전국적인 이슈가 됐다.

1922년 4월 23일 이 사건을 사회면에 보도한 동아일보는 다음날 1면 톱기사로 ‘동양척식회사 폐지를 재론하라’고 보도한다. 군동주민이 폭행당한 것을 동척폐해의 상징으로 다룬 것이다. 그만큼 전국적으로 동양척식회사의 조선인 농민수탈이 심각했다.

동아일보는 강진군 군동면 김홍여씨가 동척 소속 주민에게 폭행당한 것을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고 일갈했다. 낙엽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가을이 온 것을 안다는 표현도 했다. 군동 주민의 폭행사건 하나만으로 동척 일인들의 폐해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다는 의미였다.

신문은 ‘강진사건의 일례를 들어말하자면 조선에 들어온 일본인 이민자들은 황무지를 개척하기 위해 들어온 것도 모범적인 농사의 사례를 보여주기 위해서 온 것도 아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조선총독부는 일본인 농업이민을 추진하면서 조선의 황무지를 개척해서 조선인들에게 모범적인 농사를 보여주겠다고 떠벌였던 것이다.

동아일보는 이어 ‘이들은 조선 농민이 경작하는 전답을 빼앗아 농사를 짓기 위해 온 사람들로 그 폐해가 말이 아니다. 조선 농민도 전답을 경작하고 수확해서 처자를 먹여살리고 세금을 내야하며 원료를 구입해야 하지만 그것을 못하고 있으니 그 생활이 참혹하고 비통하다’고 전국적인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신문의 호소는 계속된다. ‘농민들은 취미도 없고 오락도 없고 오직 작은 토지를 열심히 경작하는 일 뿐인데 이것을 일시에 빼앗겨도 어디에 호소할 곳이 없고 구호할 곳도 없으니 남은 것은 기아에 빠질 것밖에 더 있겠는가’

<동아일보>는 또 ‘이러한 난폭을 행하는 것을 조선 인민에게 잔혹함 그 자체이며 강진의 사건은 일개인의 감정으로 일어난 일이 결코 아니다. 강진 군동사람 김홍여의 고통이 곧 1천700만의 고통이며 한 지방의 사실이 조선전지역의 사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고 설명했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이주한 일본인들이 농업외에도 문화를 보급하기 위한 것이고 조선인들은 일본들과 어떤 차별도 받지 않을 것이라고 홍보하고 있었다.

신문은 이에대해 ‘당국은 문화의 보급을 선언하며 차별대우 철폐를 역설하면서 실제로는 조선농민이 소작권을 잃고 가산을 파산해 아사상태가 되고 있지만 보호책은 아무것도 내놓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일본인에 대해서는 이주를 장려하면서 이주비를 빌려주고 토지를 양도해주고 있으니 이는 조선인민을 죽이는 처사아닌가’라고 질타했다. 신문은 ‘당국이 차별대우를 철폐하려면 조선인을 경제적으로 압살하고 있는 동척회사의 폐지를 절실히 요구한다’고 글을 맺고 있다.  

일제강점기 언론탄압이 횡횡할 당시 이런 정도의 기사를 1면 머릿기사에 내보낼 수 있었던 것은 동아일보의 상당한 용기로 보인다. 그만큼 전국적으로 일본인들의 폐해가 컸고, 군동사람 김홍여씨가 폭행을 당한 사건은 조선인의 가슴에 불을 지른 것이였다.

이같은 일이 벌어졌지만 동척은 해체되지 않고 해방되던 해까지 그 악명높은 기능을 다하며 끝까지 살아 남았다. 동척은 1948년 3월에야 해체됐다. 김홍여씨 폭행사건 이후에도 25년 이상 조선의 농민들을 수탈한 것이다.

중간에 동척의 경제수탈을 응징한 사건도 있었다. 독립운동가 나석주는 1926년 12월 28일 서울에 있는 동양척식주식회사 본사 건물에 폭탄을 던졌으나 실패했다.

강진에도 해방전까지 적지 않은 일본인들이 살았다. 일본인들 중에는 농민들을 수탈한 사람도 있었으나 일부는 강진사람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상업을 했던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지금도 강진읍내 주요 중심가 주택은 상당수가 일본식이다. 간판이 일본식 지붕을 감추고 있을 뿐이다. 당시 인연을 계기로 지금도 강진을 찾는 일인 후손들도 있다. 역사는 흘러갔다.

조선을 식민지화 해서 배를 불렸고, 그런 것들을 기반으로해서 경제대국을 이뤘던 일본이다. 그러나 이제 국제사회에서 우리나라의 신용등급이 일본을 앞질렀다고 한다. 그때 일인으로부터 몽둥이로 이마를 얻어맞았던 군동의 김홍여씨의 한이 조금이나마 풀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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