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길/작천보건지소

4월 봄 벚꽃이 한창 피어오를 무렵 올해 난 첫 의료봉사를 베트남으로 떠났다. 베트남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어보았지만, 내가 갈 남부 하우장성의 풍힙현은 듣도 보도 못한 곳이었다.

처음 그곳으로 의료봉사를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호기심도 생겼지만 걱정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강진군과 강진군의사회에서 6년째 활발히 의료봉사를 하는 곳이란 것을 듣고 한번 다녀오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출발하기 전 나는 그곳에 대해 간단하게나마 알아보기 시작했다.

베트남은 미국과의 전쟁 이후 76년 7월 사회주의 공화국을 건설하고 아직 까지 그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곳이다. 다만 서방국가의 제제와 이웃 캄보디아와의 전쟁 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은 이후에 86년도부터 개혁, 개방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내가 간 하우장성의 풍힙현은 베트남 남부의 대도시 호치민에서 5시간 이상 버스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곳이다. 이곳의 날씨는 덥고 습하며, 비가 많이 오는 아열대성 기후 덕분에 1년에 3모작도 가능한 농업의 중심지이다.

이로 인해 많은 지역민들은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또 쌀뿐만이 아닌 고무, 과일, 커피 등의 다양한 작물이 자라나는 축복받은 곳이자 베트남의 전라남도가 이 하우장성이다.

그 이후 나는 우리가 가게 될 하우장성과 여기의 지역민 분들을 위해 어떤 자세로 어떻게 일을 해야 할지 걱정이 많이 되었다. 따라서 사전모임을 통해 일정과 진료 내용, 의약품 준비 현황 등을 확인하고, 드디어 4월 1일 베트남으로의 일정을 시작하였다.

인천국제공항에서 아침 7시 비행기를 타려 밤 12시부터 버스를 타고 이동하였으나, 첫 해외 의료봉사의 설렘 탓인지 긴장하여 잠이 하나도 오지 않았다. 내가 다른 나라에 의사로서 나가는 것은 처음이기에 도통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공항에 도착하고 나서야 드디어 실감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상황을 실감하고 난 가족들과 여자친구의 모습이 떠올라 이른 아침임에도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분들이 새벽시간임에도 응원과 격려를 해주셔서 마음은 무척 가볍게 출국할 수 있게 되었다. 설렘 반 기대 반의 베트남 첫 걸음을 드디어 뗀 것이다.

총 13분의 강진군 우호협력단은 그 인원 수 만큼이나 수화물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강진군의사회의 지원으로 가져온 의약품과 진료기구들, 강진군새마을지회의 지원 물품과 강진군기독교연합회의 물품들까지 합하면 15개나 되는 박스가 비행기로 운반되어졌다.

많은 양의 짐을 옮겨야 하기에 인천공항과 호치민공항에서 어려움이 많았지만, 우여곡절 끝에 모든 짐을 안전히 현지로 옮길 수 있었다. 단원분들 모두가 쉬지 않고 짐을 옮기고 이동하느라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전에 지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 걱정은 기우로 끝났다. 우리 단원 분들은 지치기보다 우호협력행사들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상기되어 있었고, 서로를 격려하며 행사를 준비할 수 있었다.

베트남 현지의 관심과 지원도 너무나 감사했다. 매년 우호협력행사를 이어오는 강진군 우호협력단을 현지 담당자 분들이 호치민 공항에 나와 마중하였고, 이동하는 중의 맛있는 식사도 준비해주었다. 협력단 전체가 묵을 수 있는 숙소뿐 아니라 이후 일정도중 불편함이 없도록 세심히 배려해주었다.

그리고 다소 냉담할 수 있는 현지 공무원사회와 현지 의료진들에게도, 담당 고위 공무원분들의 참여와 독려가 분위기의 변화를 이끌었음을 느꼈다. 이는 우리 협력단의 단장님이신 이건섭 부군수님과 풍힙현 응웬 찌 훙 인민위원회 위원장님의 우호협력 강화합의까지 이끌어 내었다.

현지 방송사는 이를 촬영하고 지역 주민들에가 알리기도 하였다. 이 모든 상황들은 강진군과 풍힙현의 수년에 이르는 헌신과 배려의 결과물이며, 현지 주민과 양측 관계자분들의 지속적인 관심 덕분이라는 것도 알았다.

내가 속한 의료봉사 팀은 강진읍 성모의원 박금철 원장님, 조은경 강정진료소장님, 마량보건지소의 조원재 주무관과 공중보건의인 나로 총 4명으로 구성되었다. 또 의료통역을 해주신 4명의 베트남 자원봉사자 분들도 계신다.

우리 의료팀은 풍힙현에서도 좁은 도로를 통해 1시간을 더 달려 들어간 화미마을에서 의료 봉사를 시작하였다. 나는 그곳에서야 많은 사람들이 우리진료를 기다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전에만 작은 진료소에 150여명의 인원들이 몰려 시장통을 방불케 하였다.

우리 의료팀은 6년간 의료봉사를 매년 자원하신 박금철 원장님의 지도 아래 일사분란하게 업무를 시작하였다. 나와 원장님이 진료를 담당하여 처방전을 작성하면, 조은경 소장님과 조원재 주무관이 의약품을 조제하여 주는 식으로 진행하였다.

에어컨도 없이 선풍기 하나로 열대의 더위와 싸워야 했지만, 밝고 깔끔한 우리나라의 진료실과는 다른 긴장감과 설렘이 있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진료를 하면서 난 여러 가지 특이한 점을 볼 수 있었다. 이정도 무더위 속이라면 포기하고 집에 돌아갈 만한데도 수많은 환자들이 작은 진료소로 몰려들었고, 그런 와중에 베트남 자원봉사자들 중 누구하나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다.

수 시간이 지나 늦은 점심시간이 돼서야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런 오지에서는 의료 환경에 접근하기 굉장히 어렵고, 경제여건상 의약품 처방을 받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곳의 의료환경은 이분화되어 부자들은 비싼 의료비를 지불하고 좋은 진료를 받지만, 일반 서민층은 질이 낮은 국가의료체계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곳에서의 진료가 다 마치고 난 풍힙현 중앙의료원에 초청을 받아 그곳으로 이동했다. 그곳은 우리나라와 비교했을 땐 많이 낙후되어 있는 환경이었다. 비록 내가 경험하지 못했지만, 과거 우리나라의 진료환경이 그러했으리라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의료봉사를 꼭 필요한 곳으로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 중앙의료원장인 리 밍 꽝 센터장님은 우리 의료 팀의 봉사에 많이 감사해하며 간단한 다과를 대접해 주셨다. 센터장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곳의 의료상황이 이해가 되기 시작하였다. 하우장성은 농업중심지이며 육체노동을 하는 분들이 많아 근육통과 관절질환, 외상이 많이 발생함을 알게 되었다.

또 원하는 만큼 충분히 약을 처방하고 입원시키기엔 시설이 부족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다년간 이곳에 방문하신 박금철 원장님 덕분에 필요한 약물들을 적절히 챙길 수 있었던 것은 큰 다행이었다.

내가 진료실에서 느낀 아쉬움은, 이 상황의 본질적 개선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관절염과 근욱통으로 고생하는 50-60대의 베트남 분들에게 소염진통제를 주는 것 외에는 도움 될 수 있는 것이 없었다는 인식이 크게 다가왔다. 그럼에도 현지주민 분들은 아쉬움이나 불평을 하기보단 ‘신 깜 언(감사합니다)’이라는 말과 미소를 전해주었다. 나는 그분들의 미소에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졌다.

모든 일정이 마친 저녁 시간에는 단원 분들과 하루 있었던 활동들을 나누고 격려하는 시간을 가졌다.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위해 타지에서 고생한 모든 단원 분들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묻어있었다. 우리들에겐 풍힙현 지역민 분들에 대한 나눔의 기쁨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 담당 공무원 분들의 환영 만찬 덕분에 하루의 피로가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았다. 이후의 시간은 감사함의 연속이었다. 베트남을 떠날 때까지 현지 공무원분들의 세심한 배려와 도움 덕분에, 예정된 우호협력행사들을 모두 마칠 수 있었다. 또 우리는 아름다운 기억을 가지고 우리나라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이번 우호활동을 위해 노력해주신 모든 분들께 특별한 감사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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