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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봉사하는 삶, 공직자의 길강한성/강진군청 주민복지실 노인복지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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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4.11  14:5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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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27일은 나의 공직생활에서 아니 나의 삶의 자취에서 가장 소중하고 잊을 수 없는 날이다. 항상 열심히 본연의 업무에 임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아가자고 늘 생각하고 실천했지만 대한민국 지방공무원에게는 최고의 영예인 제33회 ‘청백봉사상’을 수상한 것이다.

강진군에서는 1992년에 이어 17년 만에 두 번째로 수상한 만큼 제 개인에게는 더 없는 영광이었고 지켜보던 지인들은 가문의 영광이라고 축하해주었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30여년의 공직생활을 돌아보고 앞으로도 봉사하는 삶속에 영원한 강진인(人)으로써 남고자 하는 다짐을 해본다.

1990년 성전면을 시작으로 편찬에 들어간 강진군마을사는 2001년 강진읍을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12년간 주요 필진으로 참여했던 저는 그 시절을 회고해 보면 ‘피를 말리는 작업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집필 시간이 일과 후와 공∙휴일에 이루어져 나에게도 지켜보는 가족에게도 정말 힘든 나날이었다. 조사, 원고정리, 편집 등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 한 일상에 개인 취미생활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

1999년 신전면마을사를 편찬했을 때로 기억된다. 늦은 봄 토요일 오후에 당시 탐진향토문화연구회 문희원 회원과 함께 용정마을에 조사를 갔는데 제보해 주시기로 한 어르신께서 ‘비가 금방 쏟아질 것 같아 마늘 작업을 해야 하니 다음에 하자’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
 
속으로는 ‘저희들이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되뇌이면서도 저는 ‘좋습니다. 저희들이 도와드릴 테니 끝난 후 조사를 하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땀을 뻘뻘 흘리며 마늘작업을 도와드리고 조사를 마치니 새벽닭이 울었다.

그런 노력 때문인지 저희 집에는 무엇보다 아끼는 17년 된 김치냉장고가 있다. 원고료는 고사하고 조사비도 제 호주머니에서 충당했는데 마지막 강진읍마을사를 발간할 때 봉사로 일관하겠다는 저의 의지와 관계없이 140만원이라는 조사비가 입금됐다.

그래서 고민 끝에 아내가 당시 제일 가지고 싶어 했던 김치냉장고를 선물했다. 많은 것을 바라지도 않고 묵묵히 옆에서 지켜봐준 아내가 지금도 고마울 따름이다.

1994년 『강진의 고인돌』이란 책자 발간을 위해 홍양식 팀장(당시 칠량면, 현 관광과 근무)의 도움을 받아 6개월 동안 들판과 야산을 헤매던 기억도 생생하다.

병영면 지로리 고인돌 평판측량을 나갔던 날 지금은 대학원생인 아들이 3살 때였는데 기어이 아빠를 따라가겠다고 해서 데려갔다가 측량에 열중한 나머지 아이가 없어진지도 몰랐다.

그런데 한창 찾다보니 어느 밭에서 매운 고추를 따먹고 있었다. 배가 고팠다는 아들의 말에 황당하기도 하고 아이를 찾았다는 안도감에 서로 웃고 말았다.

 2004년부터는 우리 군 칠량면 출신으로 서울에서 사회봉사단체인 푸른마음봉사대를 이끌고 계시는 안병원 이사장과 인연을 맺고 읍․면사무소, 금융기관, 마트 등에서 심장병어린이돕기 저금통 모금운동을 10여년 넘게 하였다.

이렇게 모여진 기금으로 10여명의 아이들에게 수술비를 지원하여 왔지만 특히 작천면 다문화가정인 황유라․기훈 남매의 지원은 보람과 뿌듯함이 앞선다.

두 아이가 모두 심실중격결손증으로 수술이 필요했는데 발 빠른 주선으로 생후 3개월도 안 된 시기에 심장병 전문의료기관인 부천세종병원에서 적절한 수술을 받아 현재는 모두 건강하게 자라나고 있기 때문이다. 저는 퇴직 후에도 심장병어린이돕기 운동을 계속 이어갈 생각이다.

공직자는 수동적이기 보다는 군민을 위해 찾아서 할 수 있는 긍정적 사고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장애인업무 실무자로서 군 단위에서는 전국 최초로 장애인시설인 「장애인생활이동지원센터」와 「수어통역센터」를 동시에 개소하고 제12회 전남장애인체육대회를 직접 유치하여 장애인들의 권익증진을 도모한 것도 아직도보람으로 남아있다.

 모든 일은 어렵게만 멀게만 느끼면 되는 일이 없다. 농촌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대도시를 수차례 방문해 2008년도에 1만2천개의(5억 원 상당) 쌀을 판매한 것도 결국 확고한 애향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영랑 김윤식 선생 독립유공자 포상을 위해 수년째 노력하여 결국 소기의 성과는 거두지 못했지만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서정시인인 영랑선생이 문화훈장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북에 소월, 남에 영랑’이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1930년 3월 용아 박용철 선생과 『시문학』지 창간, 1935년 『영랑시집』발간, 1930년대 말 13편에 이르는 저항 시를 발표하는 등 일련의 행적은 한국 서정시인의 거목으로서 그리고 늘 나라를 걱정하고 독립을 열망하는 민족 시인으로서 문화예술 발전에 크게 기여 하셨기에 의외였다.

그 후 문화관광부, 대한민국예술원, 한국시인협회 등 관련기관과 단체를 수차례 방문하는 등 노력을 기울여 2008년 10월 문화의 날을 맞이하여 문화훈장중 가장 으뜸인 금관문화훈장을 수여하는 쾌거를 이루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필자는 청백봉사상 수상 당시 부상으로 받은 2백만 원을 사회복지시설에 전액 기부했다. 공직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큰 상을 받아 부끄럽고 어려운 이웃이 있어 제가 상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저는 우리 강진군의 발전과 군민 복지증진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퇴직 후에도 고향을 사랑하고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하기 위해 오늘도 내일도 쉼 없이 달려갈 생각이다.

진정한 이 시대의 공직자는 남이 귀찮아하는 일을 찾아서 하고 남이 어려워하는 일을 스스로 맡아서 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쉬운 일은 누구나 다 맡겨주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평범한 속담처럼 사람의 능력은 한계가 있지만 우리 공직자 한명 한명이 봉사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강진의 미래는 더욱 밝아지리라 생각한다.

제가 태어난 강진이 자랑스럽고 공직자로서 본연의 업무도 중요하지만 미력이나마 봉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어 정말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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