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부터 3년간 1,226억 투입, 농업기반시설 구축됐다

금곡저수지에서 바라본 들녘. 이 곳은 1980년대 중반 경지정리가 돼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나는 본청 사회과에서 근무를 하다가 1984년 2월 농산과 산업행정계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전남도청출신 김창중 과장님과 정성태 계장님과 함께 근무했던 기억이 난다. 이때 농산과에는 농사계, 산업행정계, 원예특작계로 나눠져 있었다. 주로 농업과 관련된 업무를 담당했다.

내가 농산과에서 근무를 시작하던 1980년대 중반은 전반적으로 사회가 혼란스러웠던 시대였다. 내가 군대에서 제대하고 난 후에는 전두환 대통령이 집권하고 있었던 때였고 김식 국회의원이 지역구 국회의원이었다.

이때에는 전국농민회 활동이 활발하게 시작됐던 때였고 강진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때 사회적 분위기는 중앙정부의 힘이 강했기 때문에 농민들은 아무런 힘이 없었고 일방적으로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때부터 농민들이 하나로 뭉쳐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주로 농민들은 추곡수매가 인상 등을 요구하며 농민운동을 펼쳤다.

내가 농산과로 자리를 옮기자마자 가장 큰 일은 농어촌종합개발실험사업지구에 선정됐던 일이다. 이때 전국에서 3곳이 선정됐는데 경북 청송군과 충남 부여시와 함께 강진군이 사업대상자가 됐다.

1980년대 중반 만들어진 금곡저수지의 모습.
당시에 기초조사를 위해 전 청와대 농림수석비서관을 지낸 최양부 연구관과 이동필 전 농림부 장관이 당시에 담당 공직자로서 강진군의 조사를 위해 찾아왔다. 약 10여명이 강진을 찾아와 1개월동안 조사를 실시했고 농산과 직원들은 실무협조를 위해 거의 매일 야근을 했다.

다음해인 1985년 내무과에 TF팀인 ‘농어촌종합개발계’가 신설돼 사업을 본격 추진하게 됐다. 이 사업은 주로 농업기반시설을 구축하는 사업들이었는데 1985년부터 1987년까지 3년동안 67건 1천226억원의 막대한 예산이 강진군에 쏟아졌다. 국비가 808억, 도비가 206억, 군비 54억 등이 들어가는 엄청난 사업이었던 것이다.

사업의 주 내용을 살펴보면 군동 금곡지구를 비롯한 9개소 704㏊ 경지정리가 됐고 금곡저수지를 비롯한 9개소 482㏊의 저수지가 생겨났다.

또 6개소 127㏊ 양수장이 신설, 용수로 13개소 8,537m, 배수개선 5개소 2,713m, 생산시설 5개소, 집하장 5개소, 도로 17개소 131.3㎞ 등 이었다.

이들 시설 대부분이 오늘날까지도 사용되고 있는 농업기반시설들에 대한 집중 투자였다. 이 사업을 계기로 강진군의 농업기반 시설은 전남도내에서 최고수준으로 뛰어올랐고 도로포장율도 상위권으로 상승하게 된 계기가 됐다.

특히 이때 포장된 도로는 성전 명동~강진읍 솔치 도로와 칠량면~명주리간 도로, 군동 라천~작천간 도로 등으로 오늘날에도 군민들이 자주 사용하는 도로들이다.

1984년 강진군의 전체 예산액은 1410억이었는데 사업이 진행된 3년동안 농업기반시설 사업에 투자된 예산은 1,226억으로 강진군 1년예산의 87%에 해당하는 막대한 예산이 집중투자됐던 것이다.

만약 이 시기에 이 사업이 진행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농업기반 시설을 확충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고 농민들은 농사짓는데 훨씬 더 불편하고 힘들었을 것이다.

이 사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나를 비롯한 농산과 직원들은 거의 매일 야근을 하며 힘든 나날을 보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상당히 보람되고 뿌듯한 일이었던 것 같다.

아무튼 이때 다양한 농업기반시설 확충 사업들이 진행됐고 농토도 보다 넓어졌다. 이때는 농어촌공사의 전신인 농지개량조합에서는 농민들에게 물세를 받았다. 물세가 만만치 않았다. 1987년당시 농토 300평당 쌀 23㎏을 수세로 내야했다.

견디지 못한 농민들의 수세폐지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고 강진도 마찬가지였다. 이때 농민운동은 카톨릭농민회와 기독교농민회 2개 단체가 활발하게 활동했다.

카톨릭농민회는 70년대부터 활동했었고 기독교농민회는 80년대 들어서 생겨난 단체였다. 강한 정부의 정책에 맞서 농민들의 권익을 위한 단체로 오늘날 농민운동의 선구자라고 볼 수 있다. <정리=오기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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