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근이 찢어지고 갓이 부서지며 이마가 넷치닷푼이나 찢어져 유혈이 낭자했다.

일본인이 군동농민 논 빼앗고 몽둥이로 폭행
‘동척이민’ 일본인의 대표적 만행으로 규탄

일제강점기때 강진에 일본인 정착마을 두 곳
일제, 주민들 땅 빼앗아 일본인에 경작권 줘

목포시 중앙동에 있는 일제강짐기에 세운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목포지점 건물이다. 목포의 동척이 강진을 관할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일제강점기에 1909년 일제가 식민지 수탈을 위해 만든 기관이다. 토지와 금융을 장악해서 대한민국의 경제를 수탈해 간 첨병이 바로 동양척식주식회사였다.

그런데 1922년 4월 강진의 한 주민이 일본인 농업 이민자로부터 폭행당한 사건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동양척식회사의 폐지운동이 일어난 적이 있다. 동아일보는 강진 주민이 폭행당한 일을 1면 톱기사로 보도하면서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폐지를 주장하기도 했다. 

일제는 당시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앞세워 일본인 농업 이민자들을 한국 각지에 정착시키는 사업을 추진한다.
 
이렇게 해서 1917년까지 전국적으로 매년 1천호, 1926년까지는 매년 360호정도의 이민을 받아 1926년까지 9천96호 2만여명의 일본인이 우리나라에 정착했다. ‘북간도 간다’라는 말도 이때 나왔다. 일본인들에게 토지를 잃은 사람들이 살 곳을 찾아 북간도로 대거 이동했다.  

강진에도 농업이민자들이 꽤 많아서 일본인 이민촌이 만들어졌다. 전남지역에는 26개의 이민촌이 있었고 강진에는 작천과 군동에 일본인 농업마을(이민촌)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동양척식회사 이주민으로 이민을 온 사람들이었다. 군동에는 8호, 작천에는 18호가 살았다.

이들은 강진에서 살아가며 동양척식회사의 지원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해 50정보 이상의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가 4명이나 됐다. 이들은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지원으로 지주가 되어 조선민중을 착취 압박한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

강진주민은 극도의 궁핍한 생활을 해야 했다. 1922년 5월에는 땅을 잃은 도암 주민 100여명이 일자리를 찾아 한꺼번에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기록도 있다. 또 박기환 선생의 회고록에는 ‘(일제강점기때) 강진땅은 일본으로 보내어지는 곡물의 집결지로서 그 피해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주민들은 대개 굶주리는 것이 다반사였고, 일본인들 앞에서 굽신거리며 못난 삶들을 하루하루 이어나갔다’고 적혀 있다. 1922년 4월 15일의 일이다. 군동면 삼신마을 김홍여(51)씨란 주민은 동양척식회사(이하 동척)의 논 여섯마지기를 수년째 짓고 있었다.

그런데 이날 소작을 관리하던 동척 이민자 다카하시(高橋末義)란 사람이 갑자기 논을 줄 수 없다고 통보해 왔다. 아무 이유없이 논을 빼안긴 김홍여씨가 다카하시의 집을 찾아갔다. 김홍여는 항의하면서 ‘논을 가져가려면 가져가는데 그 논에 들어간 비용과 비료대금 팔원사십전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다카하시는 ‘그런 돈은 당신을 위하여 쓴 것이지 나를 위해 쓴 것이 아니므로 모두 줄 수 없다. 삼원오십전을 받아가던지 아니면 그냥가든지 알아서 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홍여는 논을 잃고 손해까지 볼 수 없어 관청으로 가서 하소연이라도 해 볼 마음으로 마당을 나왔다. 그런데 이때부터 문제가 터졌다. 다카하시라는 사람의 집은 대문이 두개였다.

김홍여는 작은문으로 나올려고 한 참이였다. 그때 다카하시가 시비를 걸었다. 왜 작은 문으로 나가느냐는 것이였다. 김홍여씨가 사람다니는 대문인데 못가게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대들었다.

그랬더니 다카하시가 달려들어 김홍여의 가슴을 쳤다. 김홍여가 다시 왜 치느냐고 항의하자 다카하시는 ‘길이가 한발이나 되고 굵기가 팔목만한 몽둥이’를 가져오더니 김홍여씨의 이마를 사정없이 내려쳤다.

김홍여씨는 망근이 찢어지고 갓이 부서지며 이마에 넷치닷푼이나 찢어져 유혈이 낭자했다. 김홍여씨는 피투성이가 되어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김씨가 그렇게 누워있는 사이에 일본인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한치의 길이가 보통 3㎝ 정도를 의미하니까 넷치닷푼이면 이마가 12㎝가 넘게 찢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10여분 후에 겨우 정신을 차린 김홍여씨는 동네사람에게 된장을 얻어 붙이고 겨우 자기집으로 왔다. 이 모습을 본 김홍여씨의 부인이 분함을 참지 못하고 일본인을 고발해 버렸다.

이 사건은 당시 동아일보(1922년 4월 23일자) 사회면에 구체적으로 보도되고 있는데 기사의 제목이 ‘동척이민의 난폭, 논 뺏어가고 사람까지 때려’였다. 이어 동아일보는 며칠 후 이 사건을 계기로 동양척식회사의 폭압이 도를 넘었다며 이를 해체할 것을 주장하는 기사를 1면 머릿기사로 내보낸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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