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월출산 마애불을 찾아서

국보 144호로 지정
월출산 738m 지점에 위치


마애여래좌상에서 바라본 월출산 삼층석탑.
찬바람이 불어오는 겨울. 성전면 경포대 입구, 낙엽이 모두 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았다. 계곡을 오른다. 언제 비가 내렸을까. 계곡물이 제법 세차다. 바위틈을 휘돌아 내달리는 물줄기, 맞서지도 거스르지도 않고 제 길을 찾아 흐르는 물의 경전(經典), 말씀은 거기에도 있었다.

인적이 없다. 새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얼마나 걸었을까. 저만치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초로의 여인 둘이 길가 바위에서 지금 막 몸을 일으키고 있다. 쑥물 든 바지를 입고 있다. 이 근방에 어디 절도 없는데 웬 보살님들일까. 그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온다.

국보 144호인 마애여래조상, 석불 무릎 옆에 선재동자상.
조금은 쑥스러워하는 표정이다. “등에 진 짐이 하도 무거워 그냥 뱃속에 담아 버렸네요.” 묻지도 않은 말을 한다. 그러고 보니 큼지막한 배낭들을 메고 있다.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대구에서 새벽밥 먹고 나왔소” “대구요?” 내가 놀라자, 정수사가 있는 대구에서 왔다고 한다. 경북 대구가 아니라 강진 대구면에서 온 것이다. “그런데 지금 어디 가시는 길입니까?” “절에 가는 길이요” “아니, 요쪽에 무슨 절이 있어요?” “구정봉 너머에 있답디다.” “영암읍 쪽에 천황사가 있고, 군서면에 도갑사가 있는 건 알고 있는데, 어디 산꼭대기에 절이 있답니까?” “있어라우, 마애불이 절이지요. 그 절에 가고 있소.” 아, 그랬다. 난 생각지도 못했다.

석불이 절이라?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험한 절벽, 월출산 마애여래좌상. 우연도 참 특별한 우연이다. 이게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인가 보다. 지금 나도 그 벼랑을 찾아가는 길인데, 누구는 석불을 찾아가고 누구는 사찰을 찾아가고...,

떡갈나무 사이에서 물소리가 굴러온다. 좀 더 깊은 계곡으로 들어간다. 집터였을까. 허물어진 언덕바지 대숲에서 바람소리가 걸어온다. 손짓을 한다. 언제였을까. 누가 살다 갔을까. 잠시 생각에 잠긴다. 다시 산골짝을 오른다. 비탈길이 이어진다. 벼랑에 너덜겅이 나타난다. 애추(崖錐)이다. 이들은 언제 또 이곳으로 왔을까. 어디에서 건너 왔을까. 우연일까. 필연일까. 만남을 생각한다. 인연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징검돌을 지나간다. 가로질러 올라간다. 숨이 차다. 계곡물소리 여전하다. 산길 바위에 걸터앉아 하늘을 바라본다. 오래된 소나무 가지 사이에 흰구름이 걸려있다. 

한 시간 반 남짓 올라온 것 같다. 깔끄막 콧잔등쯤에서 찬바람이 불어온다. 능선이 가까워진 것이다. 바람재에 도착했다.

명성 그대로 회오리바람이 거세다. 잿등에서 바라보니 우측으로 809미터의 천왕봉이 덩두렷하다. 왼편엔 향로봉과 구정봉이 턱 버티고 서 있다. 바람재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천왕봉과 구정봉 사이에 구름다리가 놓이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며 2수로 된 졸작 내 연시조 ‘바람재’를 읊조려본다. 

“갈필을 번쩍 들어 일필휘지 흘림체로 이 봉과 저 봉 사이 그어놓은 외줄 하나 훅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잿등이 거기 있다. 먼 길을 건너온 어느 생(生)의 몸짓일까 회오리 휘익 휘익 모서리를 쪼고 있다 온전히 바람이 빚은 초승달이 거기 있다.”

용암사지 동편 언의 삼층석탑(보물 1283호)있다.
구정봉이 저기 저 눈앞이다. 걸음을 재촉한다. 가파른 나무 계단을 오른다. 계단을 만들어놓지 않았다면 정말 오르기 힘들겠다. 79개의 계단을 오르니 다시 능선이다. 문득 고개를 들고 쳐다봤다. 큰바위 얼굴이 건너편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언제부터 저 모습이었을까. 바람이 깎고 무수한 눈비가 다듬었을 저 얼굴. 수수만년 천황봉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저리 골똘히 하는 걸까. 무심한 저 눈빛의 속내가 궁금하다.

구정봉에 닿으려면 도갑사 가는 방향 능선까지 올라갔다가 우측으로 가는 길과 베틀굴을 오른쪽에 끼고 가파른 바위를 오르는 방법이 있다. 어디로 가든 큰 차이는 없다. 구정봉 능선은 바람재에서 30여분 거리에 있었다. 그곳에 마애여래좌상 안내 표지판이 있다. 국보 144호인 마애여래좌상은 해발 738m 지점에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국보란다. 마애불은 500m 정도 서북쪽 능선을 타고 다시 내려가야 한다. 그래서일까. 대부분의 등산객들은 구정봉만 올라갔다가 그냥 돌아간다. 그만큼 마애불 가는 길이 험하다는 얘기일 수도 있겠다.

저 멀리 우뚝 솟은 천황봉을 바라보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마애불로 가는 등산객은 없었다. 경포대 삼거리에서 헤어진 보살님들은 지금 어디쯤 오고 있을까. 다시 길을 서둘렀다. 북풍 때문일까. 세월의 풍상을 견디며 명품 분재로 자란 소나무들이 기암괴석들과 어우러져 풍경을 만들고 있다. 밧줄에 매달려 내려간다.

줄을 놓치면 자칫 계곡 아래로 추락할 수도 있겠다. 다시 능선, 또 내리막이다. 외줄에 몸을 맡기고 내려간다. 30여분을 내려왔을까. 마애여래좌상 0.1㎞ 표지판이 나타났다. 꼭꼭 숨은 석벽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천 년 전으로 걸어 들어갔다.    

국보 144호인 마애여래좌상의 모습. 웅장하고 섬세한 조각이 눈길을 끈다.
석불은 거대했다. 자그마치 높이가 8.6m나 됐다. 경포대 등산로 초입에서 만난 보살님들이 말한 바로 그 천년고찰이다. 좀 더 떨어져서 올려다봤다. 눈은 약간 치켜 올라간듯 하고 지그시 내리뜨고 있다. 콧날은 오뚝하고 입은 꽉 다물고 있다. 떡 벌어진 어깨와 풍만한 가슴은 당당해 보이기까지 했다. 무엇보다도 이 높은 곳, 험한 절벽에 석불을 새겼다는 사실이 경이로웠다.

이 마애불은 전체적으로 안정되고 장중한 느낌을 주는 데다 조각 수법이 섬세하고 치밀해 보이지만 신체에 비해 얼굴이 비교적 크고 경직된 모습이었다. 이게 바로 고려시대 거불(巨佛)들의 특징이란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이 마애불을 통일신라 말기 혹은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려의 건국 연도가 918년이니 이 석불의 나이는 어림잡아도 천년이 훌쩍 넘는다.

찬찬히 보니 석불은 오른쪽 무릎 옆에 87cm의 동자승을 품고 있었다. 부처님을 향하여 예배하는 모습으로 조각된 동자상, 수행자의 이상(理想)이라고 하는 그 선재동자이다. 조금은 아래를 향한 시선이라든지 입가의 부드러운 미소가 내 마음까지 신심(信心)으로 물들게 한다. 천 년 전 벼랑 끝에 아슬아슬 매달려 석불을 새긴 이 누구일까. 이름 없는 석공의 불심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용암사지 입구의 절구(돌확)
석불에서 백여 미터 아래에 용암사지가 있다. 가파른 내리막이었지만 돌계단으로 길을 내놔 별 어려움은 없었다. 길옆으로 잡풀이 우거져 있다. 용암사지는 또 어떤 모습일까. 입구에 들어서자 절구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빗물이 고여 있었다. 무슨 용도로 쓰였을까. 천년의 세월 고였다 말랐다를 반복했을 빗물의 양은 얼마일까. 어쩌면 이 산자락을 수없이 덮고도 남았으리. 월출산 자락의 뭇새들이 찾아와 목을 축였을 것이고 다람쥐 등 동물들의 생명수 역할도 톡톡히 해냈을 것이다.

주변을 살펴봤다. 절터 곳곳에 초석이 노출돼 있고 기와조각이 흩어져 있다. 사지(寺址) 뒤편은 자연 암반을 그대로 활용하고 있어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당시 식수로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우물지가 지금도 남아 있었다. 깊이가 1미터는 족히 넘어 보였다. 암벽에 마애불을 새기던 석공도 이 우물가에서 목을 축였을 것이다. 이곳에서 물이 솟아나지 않았다면 절이 존재나 했겠는가. 모두가 인연이다.  

주변을 다시 돌아봤다. 볼수록 신기했다. 도대체 누가 이 높은 곳에 절을 세웠단 말인가. 50여 미터 떨어진 입구에 ‘죽암당(竹岩堂)’이라고 새겨진 석종형(石鐘形) 부도 등 2기의 부도가 보인다. 조선 후기에 조성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부도였다. 그러니까 용암사가 언제 어떻게 폐사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조선 후기까지는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산세 때문인지 절터는 그리 넓어 보이지 않았다. 400여 평 정도라는 기록도 있으니 말이다. 

용암사는 대체 어떤 절인가. 조선 후기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에 ‘용암사(龍嵒寺)는 월출산 구정봉 아래에 위치하며, 9층 부도가 있다’라고 기록돼  있다고 한다. 1985년에는 용암사라는 평와(平瓦)가 이 절터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문헌과 유물이 일치한 순간이었다. 마애불과 용암사지 삼층석탑이 고려 초의 것으로 추정됨에 따라 용암사도 그때 번창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신라 말에 도선국사가 비보도량으로 호남에 삼암사(三岩寺)를 창건하였는데 영암 월출산의 용암사, 광양 백계산의 운암사, 순천 조계산의 선암사가 이에 해당된다는 기록도 있는 걸 보면 용암사는 단순한 사찰이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폐사지 주변에 찬바람이 지나간다. 산새 몇 마리가 천 년 전 그 기왓장에 앉아 희미한 햇살을 쪼고 있다. 절터 동쪽 언덕의 삼층석탑에 구름 그림자가 내려와 있다. 보물 1283호인 ‘용암사지 삼층석탑’이다. 이 깊은 산중에 저토록 아름다운 걸작을 남긴 이는 또 누구일까. 

마애여래좌상 맞은 편 언덕에는 ‘월출산 삼층석탑’이 서있다. 마애불에서 직선거리로 150여 미터 정도나 될까. 이 석탑은 1.8미터 정도의 자연 암반을 기단으로 삼고 있다는 것 자체부터가 특별했다. 그 탑에서 바라보는 마애불의 모습은 또 얼마나 신비로운가. 마애여래좌상을 건너다보며 경배하듯 서 있는 월출산 삼층석탑, 그 긴 세월 그들은 마주보며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는 걸까. 

마애좌상 건너편 월출산 삼층석탑 앞의 필자.
삼층석탑 아래서 마애여래좌상을 건너다보며 삼배를 올렸다. 아침나절 경포대 계곡에서 만났던 보살님들의 말처럼 저 석불이 바로 절이다. 세상 그 어느 곳의 사찰보다 더 크고 넓은 절, 그 마애여래좌상이 나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다. 마애불에 삼배를 올리고 돌아서면서 ‘마애불 가는 길’이라는 제목의 시조 한수를 지어 조용히 읊어본다.

“산행 중 우연히 동행이 된 보살님들 새벽부터 채비하고 대구에서 오셨단다
월출산 마애석불을 찾아가는 길이란다. 험한 벼랑 왜 찾아 가느냐고 물었더니 쑥물 든 바짓가랑이 낙엽 툭툭 털어내며 석불이 곧 절이란다 맘속에 불(佛) 있단다”

그랬다. 거기에 절이 있었다. 마애여래좌상이 있고 용암사가 있었다. 천 년 전으로 걸어 들어가니 내 맘 속에도 그렇게 절 두 채가 지어졌다. 인적이 없어도 새들은 찾아온다. 시간의 뼈들이 켜켜이 쌓여가도 석공의 불심은 퍼렇게 살아있다. 그 산사에 소소리바람이 불고 있다. 천 년 전 풍경이 울고 있다.
/유헌(시조시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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