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전 동네어귀 뛰어놀던 기연이, 대연이 … 이제는 모두 도시로 떠났네

마을에는 초중고생이 한명도 없다
하분마을 상분마을은 ‘分’사용
강진과 장흥이 나뉘어지는 지점이라는 뜻


군계에서 처음 만나는 마을인 하분마을은 지금도 50여가구가 사는 큰 마을이다.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주민들의 80% 이상이 70대 이상이다.
마량면 상흥리 하분방조제에서 시작된 군계는 이제 첫 마을로 들어선다. 상흥리 하분마을이다. 20년전 군계를 취재할 때와 20년 후인 지금의 가장 큰 변화중의 하나는 위성사진의 발달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에는 큰 지도를 보며 마을의 위치를 보았지만 요즘에는 인터넷 지도를 확대해 보면 어느 지역에 어느 마을이 어떤 모양으로 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한반도는 온통 산이다. 국토의 70% 이상이 산림으로 구성돼 있다. 큰 산맥이 이리 저리 뻗어 있고 다시 그곳에서 새끼 산맥이 연결되면서 물처럼 흐르더니 평지와 연결된다.

그 틈바구니에 마을이 있다. 허허벌판에 마을이 있는 곳은 거의 없다. 뒤로 산을 의지하고, 앞으로 농사지을 땅이 있으며, 그 사이로 냇가가 흐르면 금상첨화다.

동쪽 군계의 첫 동네인 하분마을도 마찬가지이다. 뒤쪽으로 봉대산 자락을 의지하고, 앞으로 하분간척지가 펼쳐져 있다.

그 사이를 작은 하천이 북에서 남으로 흐른다. 하천을 중심으로 좌측이 강진 하분마을이고, 우측이 장흥 대덕읍 신리마을이다.

하분마을에서 건너편 장흥군 대덕읍 신리마을로 향하는 2차선 도로다. 작은 다리를 건너편 장흥땅으로 접어든다.
상흥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하분과 중흥, 상분의 마을을 합하여 ‘상흥리’라 했다. 여기서 분자는 한자로 ‘分’을 사용하는데 강진과 장흥이 나뉘어지는 지점이라는데서 유래하고 있다고 한다. 

하분마을 회관 앞에는 오래된 나무가 있다. 그 아래에 거북이 상을 세우고 샘물을 연결해 거북이 입에서 물이 품어 나오는 모양을 하고 있다. 물은 말라 있었으나 모양은 20년전 그대로 모습이었다.

그때, 아이들이 있었다. 기자가 사진을 찍으려 하자 대여섯명의 아이들이 우르르 모여들어 거북등으로 올라갔다. 초등학교 아이들이었다. 당시에는 디지털카메라가 있는 시대가 아니어서 필름 카메라였다.

아이들도 사진찍는 게 일반적인 일이 아니어서 퍽이나 흥미롭게 ‘취재’에 응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나 지금은 아이들이 아무도 없었다.

마을 주민들에게 당시 군계 취재기를 책으로 묶어 발행했던 ‘치의 소리, 강진군계 140㎞를 따라서’를 내보이며 아이들의 근황을 물었다.

지금 아이들이 무엇을 하는지 궁금했다. 당시 8~10살 정도였으면, 지금은 정확히 20년이 지났으나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이 되었을 것이다.

주민들은 아이들의 얼굴을 보며 박기연이 박대연 등 이름을 정확히 기억했다. 기연이는 울산에서 살고 대연이는 군대를 제대한 다음 취직해서 서울에 산다고 했다.

지금 하분마을에는 기연이, 대연이 후배들이 얼마나 될까. 초등학생은 한명도 없다고 했다. 벌써 10여년 전부터 초등학생은 사라졌다고 한다. 지금은 마을에 초등학생은 물론 중고등학생도 한명이 없다. 주민들은 “태어나는 아이들이 없으니 초등학생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냐”고 웃었다.

하분마을은 현재 85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이중 70대 이상이 80% 이상이고, 혼자사는 노인이 40%에 가깝다. 집은 50가구 정도 되는데 자식들이 한두번씩 다녀가는 곳을 제외하고 완전히 집이 비어있는 곳은 3채라고 윤영오 이장은 설명했다.

20년전 호구조사를 하지 않았으니 당시와 지금을 수치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당시 사진속에서 헤맑게 웃던 아이들의 모습을 다시 볼수 없는 것 만으로도 요즘 농촌마을을 대변하는 쓸쓸한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마을회관쪽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찬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이따금씩 자동차가 마을앞 2차선 도로위를 힘차게 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분교란 작은 다리만 지나면 대덕읍으로 접어들고, 반대로 그쪽에서 오는 차량은 하분교를 지나 곧바로 강진땅 마량으로 들어오는 형국이었다.

지금이야 주민들의 행정구역 경계에 대한 개념이 거의 사라졌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쳐 60년대 초반까지는 두 지역 주민들의 자존심 대결이 상당 했었다. 그 사연속으로 들어가 보자.<계속>


군계에서 만난 사람 ■ 하분마을 백형배 선생

“3년만에 농협 빚 다 갚던 날 왜 그리 목이 메이던지요”

1999년 태풍에 방울토마토비닐하우스 쓰러져 큰 빚더미
농사포기하고 부부가 수산물장사 하며 농협대출 다 갚아


하분마을에서 백형배선생(사진) 부부를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다. 백선생은 군경계에 논을 가지고 있는 주민이었다. 논 한필지가 한쪽은 강진, 한쪽은 장흥이었다. 이런 경우 농사는 어떻게 짓는지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추운 날이었다. 마을주민들에게 물어서 백선생 부부집을 찾았다. 이 추운 겨울에 갑자기 가정집을 방문하는 것은 무척 주저되는 일이다. 백선생 부부은 추위에 떨며 걸어 들어온 기자를 집안으로 들어오라고 기꺼이 문을 열어 주었다.

군 경계에 있는 논 이야기를 하다가 애기가 참 재미있게 흘렀다. 백선생은 그 논에 방울토마토 하우스를 재배했다. 그런데 1999년 태풍때 비닐하우스 철골이 엿가락처럼 휘어지며 쓰러지고 말았다. 당시 보상이라는 게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졸지에 큰 빚을 지게 됐다. 1억5천만원이라는 큰 돈이었다. 백씨는 농사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백선생은 부인과 함께 강진장을 다니며 수산물 소매상을 하기 시작했다. 갯가에서 나오는 바지락이나 낚지, 꼬막등을 가져다 팔았다. 돈을 조금이라도 벌면 곧바로 마량농협으로 뛰어갔다. 빚을 조금씩 갚기 위해서 였다. 

그런 세월을 3년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농협직원이 그랬다. “이제 끝이요. 형님이나 되니까 이렇게 고생고생해서 빚을 다 갚았소” 백선생은 농협을 나오면서 부인에게 그랬다.

“여보, 누가 나에게 막걸리 한잔 받아주라 하면 참 좋겠소” 부인도 그랬다. “여보 나도 누가 나한테 짜장면 한그릇 사주라고 했으면 참 좋겠소”

그 감격스런 순간에 부부가 나눈 이 소박한 대화는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을 이야기가 아닐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20여년전 농촌에 방울토마토를 재배하는 비닐하우스가 참 많았다.

그러다가 어느날 갑자기 방울토마토 비닐하우스들이 사라졌다. 방울토마토 비닐하우스가 사라진 일조차 까마득이 잊고 있었는데 그런 사연이 있는지를 하분마을에서 새삼 깨달았다.

백선생은 나름대로 차분한 노후를 준비하고 있었다. 군계에 있는 약간의 논농사는 임대를 주었고, 요즘에는 약간의 밭농사를 지으며 소일을 하고 있다. 표정도 무척 편안해 보였다. 백선생 부부는 마당까지 필자를 배웅하며 작별인사를 나누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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