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도구역내 집 허물며 집주인도 울고 나도 울었다

70년말~1980년대초 마량면 수인마을의 모습이다. 소를 이용해 밭을 가는 농민의 모습이 눈길을 끈다.
대구면사무소 앞 단풍나무는 제 9대 대구면장을 역임했던 김민두 전 면장님이 1956년 8월 심었다고 전해진다. 김 면장님은 김치형 전 농업기술센터 소장의 조부님이기도 하다.

이때 김 면장님은 면사무소 청사를 목조건물로 신축한 기념으로 자신의 자택 정원에서 키우고 있었던 10년생 단풍나무를 심었고 지금까지 무사히 성장한 것이었다.

면사무소 건물은 일제강점기때인 1914년에 설립됐었다. 하지만 6.25 전쟁을 겪으면서 면사무소가 불타면서 다른 곳으로 면사무소가 옮겨졌다. 그러다가 1956년 목조건물로 신축한 것이고 이때 단풍나무가 심어졌던 것이다. 그러다가 1982년 철근콘크리트 형태의 현재 건물로 지어진 것이다.

단풍나무를 가져가려고 했던 김종호 도지사가 1980년 5월부터 1982년 1월까지 재직했는데 아마 이때쯤이었던 것 같다.

이때는 어렸던 단풍나무가 20년이상 자랐기때문에 나무 모양이 잘 잡혔던 시기였다. 최근까지도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는 이 단풍나무를 청와대에서 가져가려고 했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소문은 상당히 자세한 것으로 면사무소 청사를 새로 지어주고 나무를 가져가려고 했었다는 이야기 내용이다.

하지만 이는 공식적으로 문서나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아 사실여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김종호 도지사의 이야기가 와전되면서 퍼진 이야기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김종호 도지사 (전남도청 사진제공)
내가 대구면사무소에서 막 공직생활을 시작하던 당시에는 군청 공무원과 면사무소에서 근무하는 공무원들 사이에는 교류가 많지 않았다. 당연히 인사교류는 전혀 없었고 ‘한번 군서기는 군서기, 면서기는 면서기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이때만 하더라도 면사무소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역시 식량 문제였다. 쌀이 부족했고 배고팠던 시절이었기에 농업이 중요했던 것이다.

나의 주된 업무도 농지세를 거두고 농가에서 농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농업에 대해 도움을 주는 일이었다.

농지세는 쌀을 생산하면 현물로 세금을 내는 것으로 면적과 수확량에 따라 양이 결정됐다. 보통 추곡수매때 농지세를 거두게 되는데 일일이 세금을 내라고 독려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당시에는 쌀 수매가가 시중에서 거래되는 쌀 가격보다 턱없이 낮았다. 이 때문에 농민들은 쌀 수확량을 속이거나 추곡수매에 내지 않으려 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나는 일일이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농지세를 내라고 말하며 농민들과 다툼을 벌여야만 했다. 이때 자동차는 강진군에서도 몇 대 없었고 자전거조차 귀하던 시절이었다.
 
내 기억에는 면사무소에서 면장님만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고 대부분의 직원들은 걸어다니거나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나도 마량 산동에 있는 집에서 산길을 걸어 출퇴근도 했고 업무를 위해 돌아다닐때도 농길을 걸어서 돌아다녔다. 나의 주 업무가 농민들을 만나야 하는 일이었는데 걸어서 돌아다니는 것은 쉽지 않았다.

오전에 출근해서 사무실 업무를 보고 밖으로 나오면 대구면에서 가까운 곳에서부터 마량면까지 순차적으로 돌았다.

밖에서 일을 보다보면 금방 해가 지고 어두워졌다. 퇴근시간 무렵에는 사무실을 들르지 않고 곧바로 집으로 퇴근하는 경우도 많았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어떻게 걸어서 그 먼거리를 다녔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열정에 차있었기에 해왔던 것 같다.

농업관련 업무를 맡으면서 힘든 일도 많았지만 나 조차도 눈물이 나고 ‘이 일을 해야하나’라는 회의감이 드는 일이 많았다.

그중에서 기억나는 일화 하나가 있다. 이때는 측량기술이 발달하지 않았기때문에 도로와 인접한 주택은 자신의 땅을 넘어 집을 지어진 경우가 많았다. 접도구역내에 집들이 많았던 것이다.

어느 날은 접도구역을 단속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나는 동료 직원들과 함께 현장에 나가 접도구역내 허가를 받지 않고 살고 있는 집들을 찾아가게 됐다.

지금은 정확하게 어느 마을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주택을 철거해야만 했다. 이때는 모두가 먹고 살기가 어려웠던 시절이었는데 그런 사람들의 집을 막무가내로 철거를 해야만 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집은 철거되고 있고 현장에서 집주인은 울면서 공무원들과 다툼을 벌이고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요즘 행정과는 달리 이때는 정부의 지시가 내려오면 읍면사무소까지 한꺼번에 지시에 따라야했고 이는 군민들의 의견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무조건 정부에서 실시하고자 하면 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눈물을 흘리며 절규하는 주민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참 사람이 할 짓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에 회의감과 자괴감에 빠졌었다. 한동안은 공무원을 그만둬야만 하나라는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또 힘들었던 일중 하나를 말하자면 이때는 식량생산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추수를 끝내고 겨울이 되면 논이나 밭이나 할 것이 없이 노는 땅은 모두 보리갈이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일부 농민들은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해 깨를 비롯한 다른 작물을 심는 경우가 많았다. 이때도 공무원들이 직접 나서서 타 작물을 갈아버리고 보리를 갈게 만들어야 했다.

이때도 농민들은 수확기를 앞둔 작물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눈물을 흘리는 농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까지 해야하나를 생각이 들었고 내적으로도 갈등을 많이 했었던 기억이 난다.<계속>

저작권자 © 강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