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1화 <3>호황 누렸던 마량장

▲ 마량구시장(현 원마1구회관)의 모습. 매립되기전의 바다가 보이고 멀리 아스라히 고금도가 보인다.
1977년 10월 대구면사무소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하고 1년 3개월정도 일을 하고 난 후 나는 군입대를 해야만 했다. 당시에 33개월간 군복무를 마치고 1981년 10월 제대를 했다. 약 1달정도 쉰후 그해 11월 1일자로 대구면사무소로 복직했다. 내가 군입대를 하기 전에 마량면에는 한가지 큰 변화가 있었다. 바로 마량항 매립사업이었다.

매립사업은 1977년 항만매립설계를 완료했고 그해 12월 30일부터 다음해 12월 30일까지 1년동안 공사가 진행됐다. 이때 투입된 공사금액은 당시 돈으로 1억5천만원정도였는데 지금 시세로 환산해보면 약 45억원정도로 엄청나게 큰 사업이었다. 이때 매립된 면적만 13,400평정도였다.

매립하기 전에는 현재 마량면사무소 부근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었다. 당시 정채균 군수시절이었는데 강진에서 3년 4개월 가량을 근무했던 분이었다. 이 사업이 진행되고 있을 때 지역의 최대 공사인 만큼 군수도 관심이 많았다.

이때 정 군수님은 근무시간에 관용차량을 타고 마량면을 내려가면 직원들이 자신을 맞이하느라 일을 하지 못할 것을 감안해 새벽시간에 조용히 짚차를 타고 내려오셨던 분이다. 직원들에게 말하지 않고 자신만 조용히 내려와 마량항의 매립사업 현장을 둘러보고 돌아가곤 하셨다.

이때 마량은 대구면에 속해있었고 인구만 1만300명정도로 상당히 컸다. 요즘으로 말하면 강진읍보다 약간 작은 정도 규모이니 당시에는 인구가 많은 편이었다. 사람이 많았기에 마량장은 최고의 호황을 누렸다. 마량항 매립 사업이 진행되기 전에는 현재 원마1구 마을회관 자리에서 장이 열렸다. 이 곳은 마도진 성내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장이 열릴때면 사람들이 너무 많아 걸어다니기 힘들 정도로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도 그럴것이 대구와 마량면 사람들은 물론이고 고금과 약산도 주민들도 배를 타고 마량으로 장을 보러다녔던 시절이었다.
특히 약산도 사람들은 섬의 특산품인 흑염소를 마량장에 팔았고 판 돈으로 생필품과 옷 등을 구입해갔다.
또 한가지 마량장에 인기가 있었던 것은 바로 김이었다. 당시에 사투리로 ‘해우’ ‘해태’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때 마량의 김은 품질이 뛰어나 맛이 좋았다.

▲ 현 청사를 짓기 이전 대구면사무소의 정문 모습.
이 때문에 생산된 김중 가장 최상품은 대부분 일본으로 수출됐고 나머지 등급은 마량장에서 사람들에게 판매됐다. 하지만 이마저도 비싸서 일반 주민들은 사먹기 어려웠다. 이만큼 마량장은 호황을 누렸다.

특히 수인, 남호, 숙마, 하분, 서중 등 마량의 대부분 마을에서는 김을 만들었고 이를 팔아 부유한 사람들이 많았다.

이때 오죽하면 ‘마량의 개도 지폐를 물고 돌아다닌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마량에는 현금이 많이 유통됐기 때문에 다방과 술집도 많았고 이를 이용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호황을 누리고 있던 시기 마량항은 매립사업으로 인해 바닷물이 들어왔던 곳은 육지로 바뀌었다. 오늘날 마량항의 모습이 이때 완성됐던 것이다. 내가 군입대를 하기 전에 시작됐던 마량항 매입 사업이 군제대후 복직했을 때에는 모두 마무리된 후였다.

이때 또 하나 큰 사건이 일어난다. 바로 1981년 박선배 군수 시절 마량이 대구면에서 분리 움직임이 일어난 것이다.
이때 마량면 주민들은 행정일을 보기 위해서는 대구면까지 와야만 했다. 이때 도로도 포장돼 있지 않던 시절이라 버스타고 대구까지 오기 위해서는 쉽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마량주민들은 대구면에서 분리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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