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군계가 시작되는 곳 마량 상흥리 하분방조제

남으로 푸르른 바다가 … 북으로 준봉들이 열려 있네

1998년 11월 지역신문 창간호에 ‘강진군계 140㎞ 따라서’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모두 27회가 게재됐다. 그후로 20년이 지났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으니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한 시간이다. 강진군계는 어떻게 변했을까. 그 길을 다시 걷기로 했다. 강진과 강진사람들의 변화된 모습이 그립다. /편집자 주

 

하분방조제에서 북쪽으로 바라본 모습이다. 하분간척지 뒤편으로 높은 봉우리들이 솟아 있다. 군계는 들녘을 지나 산을 넘어 다시 들판을 만나고 다시 높은 봉우리로 이어지며 긴 행렬을 이룬다.

2018년 12월 24일. 강진군계의 동쪽 시작지점인 마량면 상흥리 하분마을 하분방조제에 섰다. 서쪽은 강진, 동쪽은 장흥이다. 행정구역을 따져보면 서쪽은 강진군 마량면 상분리 하분마을이고, 동쪽은 장흥군 대덕읍 신기마을이다. 정확히 20년만이다. 필자의 나이는 당시 33세였다. 이제는 53세가 됐다.

고개돌려 주변을 쭉 둘러 본다. 변함이 없다. 남쪽으로 열린 바다. 북쪽으로 겹겹이 둘러 쌓인 산봉우리들. 산의 곡선과 들판이 만나는 곳에 즐비한 주택들, 그것들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변한 것은 사람 뿐이란 말인가. 약간의 허무함을 느끼며 20년 전 걸었던 하분방조제를 걸었다. 남쪽으로 열린 바다에 매생이 발이 가득했다. 강진과 장흥의 행정구역이 만나는 이 바다는 매생이가 맛있기로 유명한 곳이다. 저 차가운 바다에서 사무치도록 푸르른 매생이가 자란다.  

그동안 이쪽을 전혀 오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대덕에서 마량으로 넘어 오면서 멀리 남쪽으로 보이는 하분방조제를 고개돌려 보며 지나가고는 했다. 그러나 잠시 차를 돌려 방조제까지 올 생각은 하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그런 곳이 한두번이 아니다.
 
20년만에 다시 찾은 곳, 변함이 없다
사람이 변하고, 바닷물이 달라졌을 뿐


잠깐 들리면 좋을 곳, 짬짬히 보면 세월의 흐름을 피부로 체감할 수 있는 곳들, 필자의 주변에는 그런 곳들이 너무나 많다. 어찌 장소 뿐이랴. 잠깐 들려 만나면 될 사람들, 한번 손을 잡고 마주하면 몇 년은 정을 느낄수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하지 못한 경우가 참 많다.

방조제끝 강진 땅에서 사람을 만났다. 군계에서 만나는 첫 사람이다. 인근 하분마을에서 온 이상용(70), 김영자(70)씨 부부였다. 부부는 인근 갯돌에서 채취한 자연산 굴을 바닷물에 씻고 있었다. 양이 한동이가 넘었다. 이틀동안 채취한 것이라고 했다. 자연산 굴은 작고 맛이 좋다.
 

마량 하분마을 김영자씨가 자연산 굴을 채취하고 있다. 뒤편을 보이는 곳이 하분방조제다.

흔히 시장에서 구입하는 굴은 모양이 큰 양식굴인데, 자연산은 아주 작은 씨알에 맛이 함축돼 있다. 겨울철 얼었다 풀렸다를 반복하며 포도나무에서 마른 건포도는 단맛이 배가 많듯, 서리맞아 말라 비틀어진 작은 감에 단맛이 집약되 듯 자연산 작은 굴은 굴 특유의 맛을 한껏 응축하고 있다.

남편은 카메라를 피해 뒤로 가고, 부인 김영자씨가 다라이에서 자연산 굴을 한움큼 쥐어주더니 먹어보라고 했다. 가장 크게 보이는 것을 골라 손으로 집어들었다. 입속으로 넣었다. 굴을 깨물었더니 터졌다. 특유의 향기가 입안 가득 퍼졌다. 초장이 필요 없었다. 굴은 적절한 소금끼를 품고 있었다.

“이곳이 매생이 못자리지요. 매생이가 이곳에서 처음 나왔고, 그 기술이 장흥쪽 넙도로 옮겨가 그곳에서 대량생산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먹은 매생이가 됐지요”

하분 방조제앞 바다는 매생이의 탯줄이었다. 원래 80년대 초반까지 이곳은 김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매생이는 김발에 기생하는 잡풀이었다. 김이 우선이었고, 매생이는 서자취급이었다. 인근 주민들이 잡초뜯 듯 채취해서 종종 끓여 먹는게 고작이었고, 범위를 아주 넓게 잡아도 강진의 남쪽, 그러니까 마량과 대구, 칠량, 그리고 건너편 신전이나 도암 사람들 정도가 매생이를 아는 정도였다. 성전이나 작천 사람들은 매생이를 모르고 살았다. 그런데 어느날 매생이가 김의 인기를 넘어섰다. 대량으로 생산하는 기술이 보급됐다. 요즘에는 마량앞바다는 물론 완도까지 매생이 양식 지역이 확산되고 있다.

“근데 걱정이예요. 기술이 발달해 매생이가 많이 생산되고 저온저장 기술까지 좋아지면서 시중에 너무 많은 매생이가 나오고 있어요. 이맘때 쯤이면 한단에 3천원은 해야되는디 오늘 시장 가격이 1천원이란 애기를 들었어요”

부부는 매생이에 대한 걱정이 대단했다. 매생이 가격이 현재와 같이 폭락하면 그나마 어촌의 겨울 벌이가 크게 줄어들 것이라고 했다. 바다에서 찬바람이 육지쪽으로 불어왔다.

부부와 헤어지면서 자연산 굴을 3만원어치 구입했다. 마량 일부 마을에서 자연산 굴을 생산하는 데 가격이 만만치 않다. 작은 대접에 만원 정도하는데, 봉지에 한 바가지 분량을 부어주었다. 바닷가에서 구입한 특혜가 아닐 수 없었다. 부부에게 연신 고개를 조아려 감사함을 표했다.

하분방조제는 길이가 300여m에 불과하지만 말 그대로 주민들의 애환이 참 많이 서려 있는 곳이다. 이 방조제는 1963년 미국의 밀가로 원조로 막은 소위 ‘밀가루 방조제’다. 강진쪽 땅과 장흥땅을 연결하는 둑을 막아 인근 하분마을까지 들어오던 바닷물을 막고 50만㎡규모의 농경지를 만들었다.

면적의 70%는 장흥땅, 나머지 30%가 강진 땅이다. 방조제 사업은 일종의 구호사업이었다. 주민들을 동원해 품삯대신 미국에서 온 밀가루를 주며 일을 시켰고, 둑을 막고 간척지가 들어선 후에는 일에 참여했던 인근마을 주민들에게는 일정량 논을 분배해 주었다. 주민들 입장에서 일석이조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방조제 사업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다양했다. 인근 상흥리 주민들뿐 아니라 당시 대구 사람들이 대부분 밀가루를 받아갔다.   <계속>           

 

군계에서 만난 사람 ■ 마량면 상흥리 하분마을 우소연 어르신

“경제는 지남철이더란 말이시. 돈 많은 쪽이 땅은 채가 드랑께”

“행정은 강진이 참 빨라. 이를테면 언제 벼 수매한다하고 우리마을에서 이장 방송이 나오믄 장흥쪽에서는 며칠 지난 다음에야 똑같은 방송이 나온단 말이여. 강진 행정이 그만큼 빨리 돌아간다는 말이제 ”

마량면 삼흥리 하분마을 우소연(75)어르신은 평생 군계가 지나가는 이 마을에 살았다. 살다보면 두 지역이 자연스럽게 비교된다. 행정은 강진쪽에 후한 점수를 줬다. 새마을운동 당시에도 강진이 모든 일이 빨리 진행됐다. 요즘에도 공무원들이 빨리 움직인다고 칭찬했다.

그런데 경제는 그게 아닌 것 같다고 했다. 경제는 장흥이 쎄다는 것이다. 우 어르신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근거는 이렇다. 하분간척지의 논이 처음에는 절반 정도가 이쪽 강진사람 땅이었다. 분배가 그렇게 됐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장흥사람들이 강진쪽 논을 차근차근 매입해 가기 시작했다. 지금은 80% 이상이 건너편 장흥 대덕읍 신기마을 사람들 땅이 됐다.  장흥사람들은 땅값을 후하게 쳤다.

“경제는 지남철이더란 말이여. 돈 많은 사람들이 논은 사가게 돼 있어. 장흥사람들이 소를 일찍 키우기 시작해서 돈이 많아졌다는 것이제. 그래서 지금도 논이 나오기만 하면 웃돈을 가져 가 분당께.”
우 어르신은 자신이 21세때 직접 등짐으로 흙을 날라 막은 하분간척지가 장흥쪽으로 나꾸 팔려나가는게 아쉽기만 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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