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수/광주전남연구원장

아침 식탁에서 매경을 펼치면서 뜻밖의 비보를 읽었습니다. 대학 정년 후에도 변함없이 건강하게 활동하시던 분이라 뜻밖의 소식에 충격을 받고 망연자실해졌습니다. 언제까지나 뵐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팔순을 앞두고 이렇게 홀연히 가시다니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저와 박교수님은 비록 근무하는 대학이 달랐지만 경영학가운데 인사조직분야를 함께 전공하면서 가까워졌답니다. 30여년 세월 동안 학회에서 종종 뵈어 왔고, 고향에 내려오실 때는 격의 없이 연락 주셔서 편하게 지내다 가시곤 하였습니다. 가끔 학위논문 심사위원장으로 모시면 천리 길 마다하지 않고 내려 오셔서 친절하게 지도해 주곤 하셨습니다.

특히 지난해는 강진까지 내려 오셔서 지역신문주관으로 저와 특별대담을 가지셨기에 오늘 따라 더욱 박교수님이 그리워집니다. 그 날 군청강당에 가득한 청중들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박성수 묻고 박내회 답하다 : 나의 아버지 병영상인 박세정을 말하다.” 이었습니다. 때마침 박교수님의 선친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라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이 곳 남도에서는 “북에는 개성상인, 남에는 병영상인” 이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지요. 조선조 태종 때 만들어진 6백년역사의 전라 병영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병영상인은 우리나라 전통상인의 대표적 유형에 속한답니다. 아버님이 병영상인이셨기에 박교수님은 바로 병영상인의 DNA를 갖는 후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박교수님은 경영학자들 중 누구보다도 현장을 잘 아는 경영학자로 통했습니다.

그야말로 산학협동을 통해 산업계와 학계의 가교역할을 잘 해주셨지요.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 굴지의 대기업 경영컨설팅은 물론 보스톤 컨설팅 그룹 고문으로 세계적인 기업들에게 까지 자문해 주시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셨습니다. 전화를 드리면 해외 나가 계실 때가 참 많았습니다.

대학 봉직 후에도 여러 대학교의 경영에 큰 도움을 주셨으며, 학회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으신 노익장이셨습니다. 그래서 박교수님을 보면 실사구시 네 단어가 생각나곤 합니다.

항상 이론과 실제를 접목하면서 해법을 찾는 노력이 돋보이시는 분이시지요. 저는 박교수님에게서 바로 우문현답을 배웠습니다. 우리의 문제 해결은 현장에 답이 있다는 지혜를 주셨지요. 그러기에 박교수님은 우리 후학들이 늘 닮고 싶어 하는 롤 모델이셨습니다.

생각해보면 박교수님은 온화하고 착한 성품을 지니신 분이셨습니다. 뵐 때 마다 부드럽고 따뜻함이 절로 느껴집니다.

겸손하고 남을 배려하는 다정다감한 매너가 요즈음 시쳇말로 ‘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기에 박교수님과 만나서 오순도순 대화를 나누다 보면 참으로 시간가는 줄 몰랐습니다.

전화를 드리면 그렇게 반갑게 받아 주시던 박교수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셨던 박교수님. 이제 더 이상 뵐 수 없다 생각하니 오늘 따라 더욱 그리워집니다.

그동안 밤낮없이 바쁘게 사셨으니 이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편히 쉬십시오. 박교수님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합니다.

<이 글은 박성수 원장이 매일경제신문에 기고한 글을 원문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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