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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현 작가의 강진 마을답사 <5> 칠량면 봉황마을선창에 옹기배들이 흥청거리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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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2.20  12:5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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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대 6개 가마에서 연간 100만개 옹기 생산·판매
70년대이후 어패류로 유명, 댐건설이후 패류 사라져


   
봉황마을은 한때 옹기로 전국에 유명세를 떨쳤고 70년대 이후에는 패류 생산중심지였지만 현재는 조용한 어촌마을이 됐다. 사진은 봉황마을 전경.
칠량 봉황마을은 옹기로 만들어진 마을이다. 10세기에 대구 깊은 골짜기에서부터 만들기 시작한 청자가 13세기 대구 사당리에서 꽃을 피우기까지 300년이란 시간이 걸렸는데, 봉황은 그 가까운 곳에서 400년이 지난 시기 즉 1789년에 발간된 ‘호구총수’에 ‘옹점(甕店)’이란 이름으로 처음 지명이 나온다.

지금 봉황리에는 봉황, 보련, 덕동, 사부 등 네 마을이 포함된다. 이 중 봉황은 현재 70여 가구에 150여명이 살고 있는 봉황리의 중심 마을이다.

   
봉황옹기
봉황의 역사는 옹기로 점철된다. 이웃 보련, 덕동 사부가 모두 옹기를 만들어 팔았던 마을들이었고, 봉황이 그 중추였다. 이곳 옹기가 가장 흥했던 시기는 아마 1950-60년대 쯤이 아닐까 싶은데, 이 이유는 어떤 방식으로든 사람들의 생활은 갈수록 나아졌고, 그에 따라 옹기의 수요도 늘어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970년대에 플라스틱 용기가 일반화되기 시작했고, 그와 더불어 봉황 옹기는 성황의 최 정점기에서 급속한 수직하강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1970년대 뿌리깊은나무(대표 한창기)에서 ‘민중자서전’이 발간되었는데, 그 중 ‘칫다리 잡을라 옹구 폴라... 칠량 옹기배 사공 김우식의 한평생’이라는 봉황 사람 김우식의 생애사가 있다.

   
봉황옹기 장작가마
구술에 따르면 봉황에 한국전쟁 직후 가마가 여섯 개가 있었고, 한 가마당 연간 3-40굴을 했는데, 가장 많을 때에는 160굴까지 했다고 하니, 이를 모두 합하면 1,000여굴, 한 굴에 1,000여개의 옹기를 구웠으니 연간 약 100만개의 옹기를 생산했다는 말이다.

이것들은 주로 배가 닿는 섬들에 팔았다. 완도의 소안, 청산, 보길, 제주, 장흥, 고흥, 남해, 진주, 진해를 지나 부산까지 가서 팔았다. 영도다리에 배를 대면 불티난 듯 팔려나갔고, 그렇게 옹기를 팔던 봉황 배가 20여척이었다고 한다. ‘군수 할레 옹기배 사공 할레?’ 그러면 옹기배 사공 한다고 했다니 그만큼 옹기배 사공은 벌이가 좋았고, 더불어 봉황 사람들의 생활이 윤택했음을 말해준다.

   
가마에 굽기 전 말린 옹기
1970년대 들어 옹기 수요가 급격히 줄어들었어도 마을 사람들의 생활이 그리 힘들진 않았다. 마을 앞 대섬에서부터 가우도까지 이어지는 강진만 한가운데에 길게 늘어진 모래언덕이 천혜의 패류 어장이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탐진강이 흘러들어 염도가 낮고, 강물에 쓸려 내려오던 모래가 쌓여서 바지락, 꼬막 같은 어패류 생산량이 많았다. 많을 때에는 동네에서 하루에 5톤 차로 2대 분량까지를 실어냈다 했다.

이 바지락은 서울의 고급 식당가에서 가져갈 정도로 품질이 좋았다. 때문에 예전 칠량장에서는 ‘봉황 사람들이 장에 오지 않으면 장마당이 서질 않는다’고 말할 정도였다. 모두 현금인 옹기와 어패류가 풍성하기 그지없었으니 말이다.

이후 근래 탐진댐 건설로 유수량이 줄자 토사가 흘러들지 않아서 봉황의 패류 어장으로서의 기능은 사그라들었다. 한때 이곳에서 바지락 치패가 생산되는 봄 무렵에는 인근 해남, 완도, 장흥 등지에서 이것을 사려고 천여 척의 배가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 좋던 바다가 ‘흐리’(갯펄흙)로 가득 차 버린 것이다.

마을 주민들 중 이런 옛 영화를 떠올리는 사람들은 나이 60세 이상의 노령층 뿐이다. 이마저 바닷가 사람들의 고된 노동은 늘 건강을 위협했으니 살아 있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다.

그 중 고태랑 씨는 옹기배 즉 풍선을 만들던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수요도 없고, 기력도 재료도 없고, 찾는 사람들도 없다. 이 옹기배는 길이 14m 정도에 부채를 엎어놓은 것처럼 앞은 좁고 뒤는 넓어서 옹기를 많이 실을 수 있고, 옹기를 가득 싣고도 파도를 잘 헤치고 갈 수 있는 형태를 갖춘 것이라 했다.

옹기토들은 주로 영동리 영동-강동, 영동리 영풍에서 캐와 썼는데, 1997년에 발간된 마을사에는 영동에서 캐낸 흙의 질이 좋았다고 적고 있다.

가마에 불을 지필 나무는 마을 근처 산들과 이웃 장계, 항동, 삼흥 등지에서 해왔고, 멀리 섬에서 배편을 이용해 사오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옹기와 관련된 일을 하는 집은 딱 두 가구 뿐이다. 전통옹기 인간문화재 정윤석 옹과 그 전수생이자 두 아들 정상균(56), 영균(53) 씨가 운영중인 ‘봉황옹기’가 활발하고, 다소 침체된 ‘해봉도예방진영)가 그것이다. 마을 입구 ‘전통봉황옹기社’는 대량생산체제를 갖춘 곳이지만 얼마 전 사업주가 세상을 떠나자 서울의 한 벤처기업가가 인수해 다시 재가동을 준비하고 있다.

1530년에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곳 봉황 대섬에서 ‘전죽(箭竹, 화살촉을 만드는 대)’을 채취해서 납부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 1895년에 발간된 ‘강진현여지승람’에는 이곳 죽도와 함께 석교, 가우도에서 화살촉을 만들 대를 채취해 세곡선에 실어 보내는 구체적인 내용을 적고 있는데, 이로 보아 이곳 사람들은 전란 때마다 그 수요량을 보고 국난의 위중을 가늠했음직 하다.

하지만 말이 좋아 특산품이지 오직 나라에 소용되는 이런 류의 특산품은 대게 지역민들에게 고역(苦役)만 안겨주던 것이었다.

   
 
대섬에서 가우도 간 갯펄 등성이는 봉황에서는 물이 빠져도 걸어서 들어갈 수 없고, 위쪽 영동마을 쪽 바다를 통해 대섬 곁을 지나야 배를 타지 않고 걸어 들어갈 수 있는 지형이다. 마을 남쪽에는 장계천으로 들어가는 만이 있는데, 이곳에 예전 ‘구강포’라 불리던 포구가 있었던 곳이다.

그곳 봉황 쪽 갯펄에서는 이만흥, 김천덕이라는 사람이 일제 강점기 때부터 1965년까지 화염(火鹽) 구웠는데, 이후 간척사업으로 지금은 논이 되어 있다.

장계천으로는 지금도 은어가 올라온다. 은어는 민물에서 알을 낳고 새끼가 바다로 흘러가 자라다 크면 강물을 거슬러 태어난 곳으로 올라오는데, 장계천이 그만큼 깨끗하다는 뜻이다.

상류에 비교적 축사 시설이 없고, 논에서 흘러든 농약성분이 자체 정화작용을 발휘하고 있다는 증표다. 인근 군동 석교는 물론 우리나라 거의 모든 하천에서 은어가 자취를 감추고 있는데 반해 주목할 만한 일이다.

장계천 다리 밑으로는 백산보가 있고, 이곳에 ‘봉황대’가 있다. 이곳엔 병영에서 태어나 성전, 관산, 병영 등지에서 살았던 김응정(解菴 金應鼎, 1527-1620)이 한때 여기에 ‘봉황대’란 누정을 짓고 살았는데, 이곳의 풍광을 읊은 그의 시 ‘제금릉봉황대(題金陵鳳凰臺)’가 있다.

(언덕 외로운 마을에 비 개이고 / 외딴 배만 밤을 스치니 강물 위엔 아무것도 없어라 / 오가는 사이에 밤 저물 줄 모르고 / 곤히 잠든 아내 깨워 고기잡이 나선다)

이곳 봉황 역시 강진의 여느 포구마을처럼 사람들의 기력이 강건하기 이를 데 없다. 옹기를 굽는 일이 극히 섬세한 장인의 영역인데다가 이것을 배에 싣고 먼 섬들을 돌아다니며 팔았던 진취성 때문이다.

기실 이즈음의 뱃길은 그리 위험한 게 아니지만, 동력이 없이 오직 바람에 의지해 먼 길 거친 파도를 헤치고 다녔던 때에는, 배를 타고 먼 길을 간다는 것은 목숨을 건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강인한 DNA가 이 마을 사람들의 피 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것이다.

봉황마을 집들은 바로 앞에 바다를 마당처럼 두고 신다. 옹기를 만들어서 배에 싣기 위해서는 그 만큼 바다가 가까워야 했기 때문이다. 해서 밀물 때가 되면 마을 앞길 바로 턱밑까지 바닷물이 차오른다.

물이 빠지면 게나 짱중어 따위가 갯펄에서 또 하나의 세상을 이루고 산다. 바다 건너편엔 수려한 산능선이 펼쳐진다. 암봉들로 이어지는 덕룡산이다. 옹기마을의 석양은 이 산 너머로 떨어진다.  

 

봉황옹기배 만든 고태량 씨

   
 
봉황옹기가 서남해안 각지로 팔려나갔던 것은 옹기를 만들었던 장인들 뿐 아니라 배를 타고 그것을 멀리 내다 팔 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도 봉황마을에 살고 있는 고태량(80) 씨는 그 옹기배를 만들던 장인이었다. 옹기배는 다른 곳에서 만드는 배와는 건조하는 방법 자체가 달랐다.

그것은 50-60자 정도의 길이에 폭이 넓고, 깊이가 있어서 옹기를 많이 실을 수 있고, 이것이 먼 바다의 파도에 흔들리지 않도록 해야 하는 특수한 형태의 선박이어야만 했다.

고태량씨는 이런 옹기배를 40년 전인 1978년까지 만들었다.
“큰 옹기배는 한해에 한척 정도를 만들었고, 작은 어선들은 많으면 한해에 50척까지도 말들었어” 그가 선주들의 의뢰를 받아 설계와 견적을 냈다. 그리고 건조에 들어가면, 목수들은 목포와 여수에서 배를 간조하던 목수들을 불러다 작업했다.

마을 앞 선창에 작업장을 차려놓고 작업했다. 동생과 함께 마량에도 작업장을 두고 일반 소형 어선들을 건조하기도 했다.

그렇게 7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나 6남매를 둔 가계를 이어왔다. 그는 지금도 마을 앞 선착장엘 나가면 배를 만들어 팔던 그때가 선 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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