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 오지의 빛과 어둠 동시에 간직한 토하의 고장

마을내 11가구 15명 거주, 77세 이장 가장 젊어
한국전쟁 당시 마을 불타, 전쟁후 가옥들 복구


신월마을내 빈집터에 돌담이 허물어져 있다.
옴천은 강진에서 가장 외진 ‘면’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중심이므로, 자기 몸이 깃든 곳이 중심이라고 생각할 것이라고 본다면, 기실 이 ‘외진’이라는 말은 그곳에 살고 있지 않은 이방인의 언어다. 또 우리는 흔히 살고 있는 강진을 외진 곳이라고 얘기하곤 하는데, 이 또한 주체인 ‘내’가 객체의 언술로 자신을 말하는 것과 진배없을 터.

옴천은 산간 오지여서 교통도 불편하고, 전체 인구가 얼추 600여명에 불과하니 강진군에서도 ‘면세’가 가장 약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사람 수만을 갖고 하는 말이고 자연지리로 본다면 옴천은 여느 지역에 못지않은 천혜의 공간이다. 생태적인 측면에서 더욱 그렇다. 익히 알다시피 ‘옴천 토하’를 말하자면, 이는 전국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특산품이다.

신월 서북쪽 계곡, 예전의 논들은 묵정밭이 되어버렸고, 지금은 간간히 토하양식장으로 쓰인다
또 도로교통망이 발달한 현대적인 의미의 오지일 뿐, 걸어서 왕래했던 시절엔 근동 37개 군현의 군역을 맡았던 병영성(산하에 좌수영과 우수영)에서 광주로 갈 때 이곳 신월 마을을 경유했다는 구전을 지리를 통해 유추해보면, 예전 이곳은 오지가 아니다.

옴천의 첫글자 한자어는 산크리스트어 진언인데, 이를 두고 지역에서는 불교와 관련이 깊다고 하는데,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 그 어디에서도 명확한 문헌기록을 찾아볼 수 없었다. 과거의 사료들이나 최근의 군지, 마을지, 이곳 좌척마을 출신의 작고한 학자 김기삼(전 조선대 총장)의 글에 그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명명에 연유해 이 지역을 불교의 위상에 잇댄 것이라고 보였다.

이곳 법정 리는 7개(계산, 정정, 풍림, 사좌, 영산, 황막, 월곡)고, 자연마을은 17개다. 면내 중학교는 이미 폐교됐고, 옴천초교는 ‘산촌유학’으로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구전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목암사가 옴천에 있었다고 하고, 현재의 옴천사(선각종이라는 유일사찰 본사)가 그 터에 세워졌다고 하나 문헌근거는 확인하지 못했다. 하지만 월출산에 사찰들이 많았고, 그 인근이라는 점에서 전혀 무관하다고는 볼 수 없을 것 같다.

제궁이라는 편액을 내건 신씨제각
불교와 관련된 사실들 외에도 이곳은 한국전쟁 때 화를 입었던 기록이 많이 확인된다. 전쟁 후 ‘산사람들’의 전남도당 본거지가 한때 현재의 3군봉이라 하는 국사봉 일대에 있었는데, 그 맥 중 강진과 해남으로 이어진 월출산-월각산-서기간-흑석산 맥이 이곳을 지난다.

그런 까닭에 현재의 월곡제 골짜기에서 많은 양민들이 학살되었다고 했다. 이곳 역시 마을이 전소되었다고 하는데, 그것이 경찰에 의해선지 산사람에 의해선지 확인할 수 없었다. 따라서 현재의 가옥들은 한국전쟁 이후에 지어진 것들이다.

신월 사람들은 강진 주민이지만, 실제 마을 사람들이 사는 곳은 강진 절반 영암 절반이다. 가옥들이 줄지어 있는 서북 편으로 물이 흐르는데, 이곳을 경계로 군이 나눠지지만, 사람의 활동은 그런 인위적 경계 따위와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신월마을내 살구나무
마을 북쪽 안으로 깊숙히 들어간 골짜기가 있는데, 현재는 농사를 짓지 않지만, 예전에는 넓은 경작지가 있었고 영암 땅이다. 거기에 영복 신씨들의 제각이 3채 남아 있다. 농지는 마을 주민들의 노령화로 묵정밭이 되어버렸지만, 제각은 비교적 정갈하게 보전되고 있다.

마을엔 현재 11가구에 15명이 살고 있다. 띄엄띄엄 자리한 가옥들 사이사이로 빈집들이 남아있는데, 터까지 합하면 20여 채 정도 된다. 6.25 전쟁 이후 지어진 30여 호의 가구 중 3분의 2 가량이 빈집인 것이다. 당시 3대가 한 집에 살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가구당 7~8명 정도였어도 얼추 240여 명이 되었을텐데, 얼추 추산해볼 때 상당히 많이 줄어든 것이다. 

이 중 남자는 4명, 여자 11명이다. 그러니까 할머니 혼자 사는 집이 7가구다. 이장 박선동 씨가 남자로는 77살로 가장 젊다. 여성은 바로 아랫집 할머니인데 75살이다. 몇몇 가구의 자녀수를 물어보니 3남매에서 독자 정도로, 그 시대 일반적인 자녀 수에 비해 적은 편이다. 이 자녀들은 모두 외지에 나가 살고 있고, 일반적인 시골 마을들과 달리 현재 귀향해 사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왜일까?

일제 강점기 때 이곳 영암 땅에서 석회석을 채취하던 노천 채광장이 있었다고 했다. 마을 동남쪽 깊은 골짜기를 따라 500m급 인근 최고봉인 상금산 방향으로 오르는 임도가 있는데, 지금은 그 중간에 표고목을 하는 부지 때문에 길이 가로막혀 있어서 가볼 수 없었다. 그곳을 넘어 황막리가 있다. 

그리곤 일반적인 논밭 농사와 토하, 버섯 같은 특용작물, 산에서 얻을 수 있는 소득 등속이다. 가구 중 땅이 한 평도 없는 집이 여러 집이었다고 하는데, 가뜩이나 농토가 적은 곳이었던 까닭인 듯했다. 이 농토들조차 지금은 마을 사람들이 짓지 않는다.

소나무로 둘러싸인 마을 앞 정자의 모습.
마을에 트랙터가 딱 한 대 세워져 있었는데, 이마저 밭농사용이고 입구를 중심으로 골짜기 방향에 있는 논들 대부분은 아랫마을 젊은이들에게 세를 내주고 ‘곡수’를 받는 정도며, 극히 일부만이 주인이 직접 경작하는데, 이 역시 먼 아랫마을 젊은이들의 기계들에 의지해서다. 콩, 깨, 배추 등속의 밭작물은 노령의 일손에 의지하기 때문에 소출이 그리 많지 않아서, ‘가용’ 수준에 그치고, ‘거둬서 자석들한테도 보내고 더러 남으면 돈을 사기도’ 한다.

마을에서 두 번째로 젊은 이장댁 할머니는 앞으로 마을이 어떻게 될 것 같냐는 물음에 “절대 마을은 없어지지 않을 거”라고 극구 목소리를 높였다. 어떻게 해서냐는 물음에는 말끝을 흐렸다.

근래 율무 값이 좋아서 노인네들은 소소하게 율무를 심는데, 이는 다른 마을 농가들에 비한다면 그저 텃밭농사 수준이다. 그밖에는 콩, 깨, 고추, 배추 같은 가용작물 위주다. 토하 역시 오래 전에는 ‘금갑’이어서 큰 소득원이었지만, 옴천 전 지역에 토하 양식이 널리 퍼져 있고, 최근 들어서는 품질관리마저 잘 되지 않아서 값이 예전만 못하다.

영복 신씨네 제각이 있는 골짜기에도 예전엔 일곱 가구나 살았다고 하는데, 그곳엔 담장마저 허물어졌고, 칡넝쿨이 짙어져버린 탓에 도무지 사람이 살았던 흔적조차 느껴보기 힘들었다. 그곳 제각에서 바라본 ‘안대’는 그야말로 ‘고절처(孤絶處)’였다. 비교적 먼 거리지만, 산중 시야에 들어오는 월출산 천황봉이 바로 앞산인 듯 했다.

어느 빈 집 마당엔 지난 바람에 떨어진 대추가 쌓여 있었지만, 아무도 줍거나 이를 팔아 돈을 벌어들이진 않을 것 같았다. 빈 집 터 안에 벙글어 말라가던 석류도, 얼추 나이가 150년쯤은 족히 될 듯 해 보이던 길 가 살구나무도 사람의 손에 의해 가꿔지는 건 아닌 듯 했다.


신월에서 퍼져 나간 옴천 토하

강진에서 전국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특산품이라면 ‘옴천 토하’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민물새우인 토하는 일정한 온도의 맑은 물에서만 자라는 것으로 옴천이 그만큼 청정지역이라는 말이다.

실제 옴천면 관내에는 지형상 오폐수가 흘러들어올 일이 전혀 없고, 화공약품을 쓰는 공장이 없다. 또 많은 면적이 장흥댐 수변구역이어서 이곳에서는 축사조차 짓지 못한다.

이 토하가 한때 지금의 3배 가량의 높은 가격에 팔렸다. 하지만 지금은 옴천 토하의 명성이 옛날 만 못하다. 당초 옴천 토하는 이곳 신월마을에서부터 채취해 팔기 시작했다. 그것이 널리 알려져 옴천의 특산물로 인식됐고, 이곳에서 씨를 받아간 면 내 여러 마을에서 양식중이다.

하지만 근래 옴천 토하의 가격은 그 맛과 신선도, 희귀성에 비해 그다지 높지 않다. 인근에 양식장들이 많이 생겨나기도 했지만, 그동안 품질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계속해서 값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품질관리의 핵심은 이물질이나 크기가 큰 새우를 일일이 손으로 골라내는 것인데, 이것이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어서 사먹는 사람들의 신뢰도를 떨어트리고, 그러자니 자연 값이 내려간 것이다.

옴천 토하라는 브렌드로 팔리지만 품질관리는 생산자 개개인에게 맡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옴천 토하는 젓갈 그 자체로는 물론 김장철에 고급 양념으로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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