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에 뜬 달 아래 따뜻한 마을 … 조선시대 차문화 중심지

산아래 자리잡은 마을, 백운옥판차의 고장
초의선사가 그린 백운동 정원과 녹차밭 절경


가을 단풍이 붉게 물든 백운동 별서 정원.
예전에 강진을 금릉(錦綾)이라고도 불렀다. 이는 중국의 남경. 현재의 난징(南京)의 옛 이름이다. 당나라 때 금릉부라 부른 데서 연유한다. 원나라 말엽 홍건적 토벌에서 두각을 나타낸 주원장이 금릉에서 황제에 올라 국호를 명이라 하고 전국을 통일한데서 따온 것이다.

월출산은 절반, 즉 북쪽이 영암이고 남쪽이 강진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월출산이란 말에서 영암을 떠올린다. 산은 영암 쪽에서 보기에는 우람한 ‘기(氣’)의 산이고 남쪽에서 바라보는 월출산은 신묘하고 경외롭기 그지없다.

미학자 조자룡은 월출산을 두고 ‘오래 전(아마 청동기 시대 쯤) 바위의 경외심에 의탁했던 신앙의 비처(秘處)였던 것 같다’고 말했는데, ‘암혈신앙론(巖穴信仰論’)이다. 바위에 크고 작은 구멍을 뚫어 기거하거나 신앙의 공간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를 증명하듯 1980년대 어느 사진작가는 월츌산에서 800여개의 크고 작은 바위 구멍을 찾아내 찍었는데, 정밀히 조사해보면 더 수많은 암혈들이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 이후 불교가 전래되면서 많은 사찰들이 들어섰고, 지금은 남쪽에 무위사와 월남사지, 북쪽 영암에 도갑사, 천황사, 성풍사지 등이 남아 있다.

월하리는 말 그대로 달 아랫마을이라는 뜻이고, 그만큼 그윽한 곳으로, 동으로 월남, 서로 대월(月角山)이 잇대 있는데, 안운은 이웃 월하, 죽림 마을과 함께 월하리에 속한 마을이다.

백운옥판차 남긴 이한영 선생 묘지 상석.
195-60년대에 이에이리라는 한 일본인이 ‘조선의 차’라는 책을 썼는데, 조선 차의 중심지로 강진을 지목했고, 강진읍 목리 유대의씨 집에서 나온 전차(錢茶)와 멀리 대구시에까지 유통됐다는 차를 중요하게 언급했는데, 이것이 이곳 이한영(1868~1956) 선생의 ‘백운옥판차’다. 최근 발간된 정민의 ‘조선의 차’라는 책에서도 안운마을 백운동별서에서 나온 서본과 이 집안 사람들의 차생활, 이 집에서 나온 ‘백운옥판차’라는 인장 등을 들어 이 마을을 우리 차의 중요한 거점으로 적고 있다.

이곳에 생가가 복원돼 있고, 그 곁에서 증손 이효명씨가 찻집을 운영하고 있으며, 올해 초 고손녀 이현영씨가 전통차연구원을 만들어 선대 이한영 선생이 팔았던 ‘백운옥판차’, ‘금릉월산차’, ‘월산차’ 복원과 판매를 시작했다.   

지금 안운마을에는 25가구 정도에 50여명 정도의 주민들이 살고 있는데, 7가구 정도가 외지에서 근래 집을 지어 들어온 사람들이고, 나머지는 토박이들이다.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들은 주로 서편 위쪽 산기슭에 새 집을 지었고, 원주민들은 대부분 그 집 자리에 새마을사업 등으로 개축한 가옥에서 생활하고 있는데, 대부분 새로 지은 주택들이고, 옛 형태가 남아 있는 것은 이영준 옹의 집이 유일하다.

안운마을 녹차밭에서 본 옥판봉의 모습이다.
생활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는데, 마을 밑에 주로 논이 있고, 인가 주변으로 밭들이 펼쳐져 있다. 마을 뒷편 쪽으로는 넓은 차밭이 펼쳐져 있는데, 이는 1980년도에 태평양화학에서 평당 6천원 정도에 구입해 조성한 것으로 현재 호가는 이 마을 대지를 기준으로 봤을 때 3-40만원을 훌쩍 넘는다. 이 차밭은 이웃 월남마을이 더 큰 면적을 차지하는데, 그 땅은 원래의 마을 안 집과 산, 밭, 무덤 등을 포함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이미 땅을 팔아버린 주민들은 이에 대한 원망이 가득하다. 요즘도 이곳은 관광지로 널리 알려져 있고, 여느 관광지에 비해 훨씬 융숭 깊은 사람들이 찾아오지만, 실제 이곳에 사는 주민들의 관심 깊은 소득과는 그다지 상관없다. 주민들이 팔았던 땅이 40여년 만에 70배 정도로 올랐고, 그곳 풍광을 보고 경탄해 마지않는 사람들이 찾아오지만 보상효과를 거의 누리지 못하는 주민들의 입맛은 그저 떫더름 할 뿐이다.  
 
백운동은 안운마을에서도 안쪽으로 깊이 들어간 골짜기에 있는데, 현재 백운동별서와 입구의 두 가옥만 남아 있고, 근처에 있었던 모든 가옥은 비어서 허물어져 버렸거나 최근 정비 사업으로 철거됐다.

현재 많은 관광객들이 유입되고 있긴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더러 비판적인 의견을 내놓기도 한다. 주로 토목사업을 위주로 한 길들이 원래 경관의 맛을 해쳤다는 것과 건물 본채가 원래는 살림채였는데 정자 식으로 지었다는 것이다. ‘백운유거(白雲幽居)’ 현판 역시 옛 편액을 뜯어내고 새로 인쇄체로 파낸 편액을 달아놓았다.

12경으로 펼쳐진 백운동별서의 승경을 보러 왔던 근동 시인묵객들의 기록은 근래 발간된 정민의 책 ‘백운동별서’에 잘 정리 돼 있다. 옛 사람들 뿐 아니라 근래의 묵객들도 이곳의 빼어난 경치를 보러오는데, 그 중 이 지역에 살고 있는 황지우와 나희덕의 시편(시에게, 내 것이 아닌 그 땅 위에)이 있다. 

황지우의 ‘시에게’는 시인과 만삭의 후배가 백운동에 갔는데, 우주라 불러도 좋은 하늘, 혹은 어떤 존재의 근원인 고목이 동백꽃을 시인이 발 딛고 사는 땅 위에 내려놓았고, 이와 대칭해 살아있는 인간, 즉 이 인간은 즉자적인 자신이 아닌 후배라는 자신과 살짝 비켜난 존재를 통해, 그녀가 ‘뚱게뚱게’ 걸어서 그 꽃을 주우러 가는 그런 어떤 순간, 혹은 공간 즉 시공(자신에게는 세계)의 일체인 시를, 시인 자신은 아직 찾지 못했으니 이를 찾고 싶다는 의미의 시다. 여기에서 동백꽃이라는 아주 진한 붉은 색을 차용해, 자신은 피가 도는 시어를 찾고 싶다고 말한다.

나희덕의 시 ’내 것이 아닌 그 땅 위에‘는, 백운동별서 밑 초가를 직접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곳을 염두하고 썼다고 말한 적이 있다.

싯구들은 실제의 상황을 약술한 것 그대로다. 그녀는 자신의 것이 아닌 땅 위에 자신이 소망하는 집짓기를 수없이 반복하고 반복했노라고 술회한다. 그러나 결국 그는 실제의 집을 짓지 못했다.

그 내력은 소상히 전해 듣지 못해서 알 수 없지만, 시의 내용과 실제 상황을 유추해 보면, 시인 자신만이 아니라 이 땅에 대대로 살아온 사람들과 오늘날의 개발 행위들, 그리고 미래의 모습을 어렵잖게 짜맞춰볼 수 있다.

이 땅은 원주민들은 이미 팔아버렸고, 현재의 집주인은 또 역시 빈 집으로 놔두고 있는데, 미래의 우리에게 이 땅은 어떤 의미일 수 있을까?

가을 안운마을은 낙엽이 고왔다. 그 중 별서 입구에 있는 애기단풍이 유독 눈에 띄었는데, 이제 그 선홍빛 잎새들을 애기 손가락 같은 모양으로 모두 발 밑에 깔려 있을 것이다. 살금살금 길을 걷다가 문득 허리를 굽혀 손을 갖다 대 볼 일이다.
 
별서 동백숲의 침침한 그늘도 인상적이다. 또 있다. 지난 가을 별서 들어가는 입구 집에 있는 꾸지뽕나무가 빨갛게 열매를 달고 있었다. 이즈음 사람들이 귀히 여기는 약으로서의 뽕나무는 얼마 되지 않은 옛적 우리 지역에서 큰 소득원으로 자리매김 했던 누에를 치던 나무다.

아무려나 차밭은 이 마을의 백미다. ‘사진 찍기 좋은 곳’에서 바라보는 옥판봉이나 천황봉, 그리고 눈을 돌려 동남쪽으로 펼쳐지는 근동 풍경은 원묘국사 요세 스님이 이곳에 있었던 ‘약사란야’에서 백련사로 옮겨가 백련결사를 맺고 싶었던 마음을 짐작하게 한다. 동으로는 멀리 월남저수지가 보이고, 그 아래쪽에 월남사지 입구 표지석이 있다.
 


초의선사가 그린 백운동별서

강진에 유배와 다산초당에서 지내던 다산 선생은 막역하게 지냈던 아암 혜장선사가 세상을 떠나자 1812년 가을 초의선사와 함께 제자 이시헌(개창주 이담노의 6대손)의 집인 이곳 백운동별서를 찾았다.

그리고 이곳 승경에 흠뻑 빠져버렸는데, 그 승경을 오래 간직하고자 초의 스님으로 하여금 이 그림을 그리게 했다고 한다.

그림은 별서를 중심으로 한 인근 12경을 부감법으로 그린 것이다. 중앙에 백운동별서가 있고, 주변에 펼쳐진 12가지 경치를 빠짐없이 묘사했는데, 좌우 위쪽으로 여백을 주고, 상단에 옥판봉을 그려 넣었다.
 
특이한 점은 옥판봉을 그린 필선이다. 중국 그림들에서 형상을 축약한 이런 방식의 터치를 따왔지만, 유독 이 필치는 천황봉과 옥판봉의 실제를 극도로 압축해 몽환적인 공간감을 자아낸다.

이런 방식의 묘사는 이웃 무위사의 벽화들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초의선사와 무위사 벽화를 그렸던 스님들 모두 이 지역 사람들이고, 초의선사는 호남 남화의 개척자인 진도 운림산방 소치 허련의 그림공부를 이끌었던 사람이다. 이런 필법은 이후 호남 남화에 일반적으로 나타난다.

고려청자의 비색 역시 색상본이 없었던 당시 강진만의 바다 빛깔을 재현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듯 경험적 감각에 의지해 선과 색을 연출해내는 전통 예인들의 감성은 오늘날 우리지역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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