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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현 작가의 강진 마을답사 <2>강진읍 남포마을강진만 바다 풍성할 때 제주 오가던 대표 포구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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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1.30  11:0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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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민가 400여호 번성, 제주 오가는 항구 역할
추자도 등 인근 섬지역 주민들 물물교환 거점지

   
강진만 춤추는 갈대축제가 개최되는 남포마을 갈대밭의 모습이다.
조선시대 강진의 고지도를 보면 강진만은 마치 포플러 나뭇잎처럼 마량, 대구, 칠량, 군동, 신전, 도암, 읍으로 갯벌이 넓게 펼쳐져 있다.

조선 중기 이후 시작된 간척사업으로 만을 메워 농경지로 바뀌기 시작했고 마지막은 1980년대에 완공된 도암 만덕간척지와 신전 사초간척지이다.

강진읍 남포마을은 이렇게 강진만의 바다가 풍성할 때, 강진을 대표하는 포구였다. 사람은 가고 기록만 남는다고, 어딜 가든 꼼꼼한 눈썰미로 대상들을 그려냈던 다산 정약용 선생은 유배당시 남당포의 민가가 400여 호였고, 이곳에서 헤엄을 치는 아이들을 묘사한 시를 썼다. 누군가는 감추고 싶어 하지만 이제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다산 선생의 후처 ‘홍임 모’도 이 마을 사람이다.

탐진(耽津)이라는 지명은 남포마을과 가장 관련이 깊다. 이곳은 한양에서 제주를 오갈 때, 이곳까지 걸어와 배를 타거나 발걸음을 시작하던 곳이었다.

   
마을 앞 개펄의 게
지금이야 선박 건조술이 좋아져서 뱃길이 편해졌지만, 예전 강진에서 제주를 오간다는 것은 목숨을 건 일이었다. 지금 뱃길은 곧바로 직선으로 제주로 향하지만 예전에 큰 물살을 피하고 오로지 바람에 의지했을 때는 달랐다. 남포에서 출발해 남창까지 가서 백일도를 지나 넙도에서 하룻밤을 자고 추자도와 제주로 갔다.

그래서 근래까지도 남포는 ‘추자 멸젓’이 담궈지던 곳이었다. 기실 멸치잡이를 할 무렵 바다는 ‘물반 고기반’정도로 멸치가 많았는데, 그렇게 잡은 멸치가 강진의 쌀과 맞바꿔졌고, 그 기점이 이곳이다. 이뿐 아니라 이 마을과 추자도와의 인연은 유독 깊은데, 이는 이 마을에 시집 와 사는 추자도 사람들이 한때 10여명에 이를 정도로 많았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오기만 한 게 아니라 그곳으로 시집을 가기도 했다.

그만큼 남포와 추자도는 관련이 깊다. 그곳에서 가장 가깝고 흥성한 포구가 이곳이었고, 이곳에서 자신들이 풍성한 것들을 갖고 와 부족한 것들을 구해 가는 ‘거래’가 이뤄졌다. 거래를 위해서는 신용이 좋아야 하는 법. 전통적으로 남포 사람들의 주 생업은 어물 판매업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일화 중 추자도의 한 일가가 남포마을 사람 이름과 같은 사실이 있다.

농지가 없는 추자도의 겨울나기란 무척 어려웠는데, 어느 사람이 남포에 와서 도움을 청했고, 남포의 한 상인이 그를 흔쾌히 도왔고, 도움의 연장에서 수많은 미담들을 낳고 종내는 그곳 사람이 자기 자식들 이름을 남포 사람 아들의 이름과 같게 지었다. 하지만 지금 이런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마을에 남아 있는 딱 두 가구 멸젓 공장 뿐이다. 이마저 요즘 멸젓은 추자도가 아닌 남해에서 가져온다.

몇해 전 강진의 문화해설사들이 추자도에 가서 다산 정약용 선생의 조카 정난주의 아들 묘소를 찾아가 참배한 적이 있다. 정난주는 다산 선생 형님의 딸인데, 남편이 황사영으로 신유박해의 도화선이 된 벽서사건의 주인공이었다. 이 일로 그는 처형되고 정난주는 관노가 돼 남포에서 배를 타고 제주로 갔다.

   
남포마을의 주택 사이의 골목길의 모습이다. 한산한 시골마을의 모습이다.
그때 추자도에 잠시 들렀는데, 정난주는 가면 아들까지 관노가 되기 때문에 아이를 포구에 두고 가버렸다. 그러자 섬 사람 누군가가 그를 키웠고, 뒤로 제주 관노 정남주는 추자도에 아들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지금도 후손이 살아있는데 강진 사람들이 처음으로 그의 묘를 찾아가 제를 지낸 것이다.

지금 남포마을에는 135가구에 300여명 정도가 살고 있는데, 전통적인 방식의 어업을 갖고 있는 사람은 딱 1가구, 멸젓 공장이 2곳, 마을 앞 갈대밭에서 장어잡이를 하는 어촌계장 방진석(58)씨 뿐이다. 농지도 대부분 기계를 갖고 있는 젊은이들이 맡고 있다. 면 단위 마을들보다 좀 나은 편이지만 여전히 노령인구가 많고 대부분의 주민들의 경제생활은 읍내 경제활동과 맞물려 있다.

지금 마을 사람들의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은 크게 약화된 편이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전진도를 보면 왼쪽 최선봉에 ‘고금’이라고 쓰여져 있는데, 이는 지금의 강진 군인들이 탄 배라는 뜻이다. 망망대해에서 왜적과 싸우던 군대의 왼쪽 최선방에서 강진 사람들이 싸웠다. 그 ‘강진의 힘’은 신전 사초, 칠량 봉황, 읍 목리 같은 마을 사람들의 ‘깡’으로 남아 있다. 4.3만세운동은 그런 남포 사람들의 기개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3.1운동 이후 강진 사람들도 만세운동을 하기로 결의했지만 행동에 옮겨지지 못했다. 일경들의 감시가 심했던 때문이다. 그러나 남포 사람들은 기가 죽지 않고 삼삼오오 떼를 지어 읍내로 밀고 나가 4월 3일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벌였으니 그게 강진 4.3만세운동이다.

해방 전후시기에도 남포 사람들은 기질이 강인해서 정치활동을 활발히 했는데, 보도연맹 사건 무렵 경찰에 억류돼 죽음을 앞둔 좌익 편 사람을 마을의 우익 쪽 인사가 손을 써 빼낸 일화는 두고두고 마을의 자랑거리로 전해오고 있다. 그만큼 특정한 정치 지향보다 마을 공동체로서의 일체감이 더 컸다는 의미다.  

지금 마을은 포구라기보다 육지 안 외딴마을이 된 형국이다. 걸어 다닐 무렵에는 읍내가 먼 거리였지만, 이제 읍내는 지척이어서, 동네라기보다는 읍내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남포가 가장 성행했고, 목리가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어업항으로 기능했으며 일제 강점기엔 영포가 미곡을 실어 나르는 포구로 활용됐다. 그러나 간척사업과 갯벌의 ‘하도정비사업’, 탐진강댐 건설로 마을은 육지가 되어 갯벌마저 죽어버렸고, 이제 그 죽은 갯벌에 갈대가 자라서 이곳에서 갈대축제를 하고 있으니 퍽 큰 아이러니다.
 
탐진강 댐 건설로 유수량이 줄자 남포 앞으로 흐르던 물길이 바뀌어버렸고, 그곳엔 뻘이 차버렸다. 하여 이곳에 그렇게 흔하던 맛과 재첩은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다. 1970년대 맛이 많이 나던 무렵엔 여자 한분이 그때 돈으로 하루 2-30만원을 벌여들였다는 얘기를 들으면 머리가 아득해진다.

지금은 탐진댐의 이름마저 ‘장흥댐’으로 바꿔버렸다. 어업권 추가보상 요구를 하는 강진 사람들과 이를 회피해버리려는 수자원공사, 이를 틈 타 탐진댐을 장흥에 국한해버리자는 장흥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이름을 바꿨을텐데 댐이 장흥에 있을 뿐 유역도 강진을 포함하고 있고, 그 물로 농사나 어업 같은 생활도 장흥 보다는 강진 사람들에게 더 영향이 큰데 말이다. 소지역주의는 이렇게 서로를 갉아먹는다.    
 
마을 회관 앞에는 현감 면영은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는데, 역병에 잘 대처해준 데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는 마을 사람들의 답례라고 적혀 있다.

   
마을 서쪽 우물가에 세워진 유하진씨 공덕비
배들이로 올라가는 마을 서쪽에는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우물가에 작고 아담한 비가 세워져 있는데, 1917년 기근 때 남포에 살던 부자 유하진 씨가 우물을 파고 식량을 풀어서 마을 사람들이 세운 것이다.

현재의 집들은 1974년과 80년 대홍수 때 모두 떠내려 가버린 가옥들을 이후에 새로 지은 것것들로 대부분 초가 위에 슬레이트를 얹었거나 이후에 지은 이태리식 양옥들이다.

이장 이병장(49), 노인회장 김혁진(85), 개발위원장 이재국(70), 부인회장 박곤녀(57) 씨가 마을일을 보고 있고, 2017년부터 3년간 정부기금을 들여 생활여건개선사업을 하고 있다.

답사팀 일행이 마을을 답사하던 날 때마침 갈대축제가 열리고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골목 안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집을 비웠고, 대신 쿵쾅거리는 축제장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180년째 이어온 동제 지내고 있는 이영식씨

   
 
남포에서 태어나 평생 이곳에서 살고 있는 이영식 씨는 청광 양광식 선생이 운영하시는 한문학당에 참여하시며 지역 내의 여러 문화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 마을 입구에 3.1운동탑을 세우는 데 큰 힘을 보탰고, 수백년 째 이어 내려온 마을 동제를 앞장서서 지내고 있다.

현재 마을엔 180년이 된 동제 계책이 남아있는데, 매년 정월 열 사흗날, 마을 안 서낭과 바깥쪽에서 지내는 두 가지 제문이 있다. 동제 혹은 서제라고도 했는데, 동제 즉 서낭의 그것은 여느 당제와 마찬가지로 마을 사람들의 부강(富强) 안녕(安寧)을 빌고, 서쪽의 바깥쪽 제사는 바다에서 객사한 원혼들을 달래는 것이다.

원래는 짚 위에 100여개의 대나무 위패를 모셔놓고 날 음식을 차려서 제사를 지냈는데, 지금은 제에 대한 관심이 많이 줄어들어 6-7명 정도가 참여하고 있다. 해마다 관심이 줄어들고 있는데 젊은 사람들이 참여해주기를 간절히 바래지만 쉽지가 않다.
 
이 동제를 전통적인 문화행사로 만들어서 정부지원금을 받아서 치르고픈 생각도 간절하지만, 무엇보다 마을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참여해하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에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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