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규동 박사/다산박물관 다산교육전문관

공영방송인으로 인생2막을 마치고 새로운 여정을 위한 낮설은 길을 찾은곳이 강진이었다. 친구따라 강남이 아닌 강진에 온지 18개월째다.  맨처음 다산초당에서 해설사의 해설을 통해서 미처 몰라던 다산을 알게 된 것이 인연이 되었다.

고난과 한이 맺힌 18년의 유배생활 속에서 500여 권의 저술을 통해 나라와 백성을 위한 다산의 위대한 정신과 사상을 다시한번 깨우치는 기회가 되었다.

바로 인생 3막의 출발점에서 우리의 역사에 대해서 너무 무지함은 물론, 다산의 위대한 정신과 사상이 이렇게 땅 속 깊이 파묻혀 있었는지 화가 나기도 하고 나라의 미래가 이래도 되는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새로운 역사를 통해서 제대로 된 우리의 과거와 현실을 되돌아보고 싶은 마음에서 다산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인생 3막의 새로운 여정이 되었다.

대통령 탄핵, 대기업 갑질, 공공기관의 부정과 부패로 사회적 공분을 사고 있는 오늘의 모습이나 200여 년전 다산이 바라본 부정 부패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과 피폐는 모양만 다를뿐 어디든지 부정과 부패는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다는 것을 우리 눈으로 보고 있다.

다산은 조선사회의 국가적 피폐한 모습은 물론 다산이 황해도 곡산 부사와 암행어사 등등 직접 경험하고 또 유배 18년의   강진 현장에서 보고 느낀 것들을 글과 시로 남겨 논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나라와 백성을 위한 촛불이었다.

특히, 다산은 목민심서를 통하여 200여년 전 공직자들의 몸가짐과 행적에 대한 지침서를 남겨놓았건만 그 어느 누구도 관심없이 파묻어 놓았던 것이다.

수령이 고을에 부임해서 퇴임할 때까지 12편 72개 조항의 지침으로 피폐해진 백성을 돌보고 곤궁한 백성을 살피도록 한 촛불이었다.

아무리 200여년 전에 밝힌 촛불이라 할지라도 오늘의 공직자들이 귀 기울여 지키고 밝혀야 할 조항들이 한둘이 아니다. 목민심서의 서문을 보면 다산이 촛불을 왜 밝히고 있는지 쉽게 이해할 수가 있다.

성현이 돌아가신 지 오래되어 그 말씀은 희미해지고 그 도는 점점 쇠하여 어두워졌으니 지금의 목민관들은 오직 사리를 취하기에만 급급하고 백성 기를 줄은 모른다. 그렇게 되니 백성들은 피폐하고 곤궁하게 되었으며 병에 걸려 줄지어 쓰러져서 구릉을 메우는데 목민관이라는 자들은 좋은 옷과 맛있는 음식으로 자신만 살찌우고 있다.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 순조 21년 신사년 늦봄에 열수 정약용 책머리에 쓰다 -

서울대 금장태 교수는 “다산 정약용의 경우는 워낙 큰 산줄기라서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무수한 봉우리들이 이어져 있고 깊은 골짜기가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어느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 보아도 전체의 모습은 짐작하기조차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라고 말하고 있다.

18개월 강진 생활의 대부분은 다산의 책과 다산의 유적지를 다니면서 다산의 위대한 정신과 사상을 되세기며 인생의 3막의 여정은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인생 3막의 길을 걷고 있다.

그런데 책을 보면 볼수록 어렵고 이렇게 천재적인 분을 감히 내가 따라 갈수가 없다는 생각에서 자칭 전문가는 못되니 다산심부름꾼으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하였다. 그것만이라도 감사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2016년 기준 국제투명성기구에서 발표한 부패인식지수(CPI)를 보면 100점 만점에 53점이다. 순위 역시 52위로 OECD 국가 중에서 청렴도가 하위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0여년 전 다산은 우리에게 위대한 애민과 청렴의 촛불을 밝히셨건만 우리는 지금까지 책속에 파묻혀 놓고 있다.

국제적으로 UNESCO에서도 인정한 다산의 위대한 정신을 이제는 우리가 실천하는데 힘을 모아야 한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이루지 못한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는데 힘을 모아야 한다.

오늘도 이런 마음으로 인생 3막의 새로운 여정을 걸으며 다산 심부름꾼 1호로라는 자부심과 사명감을 갖고 다산 정신실천운동에 힘을 모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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