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량 봉황마을 마지막 옹기뱃 사공이었던 故 신연호 선생의 일대기

13살 나이에 처음 배 탑승, 25살에 사공…부산, 진도 등 남해안 곳곳 누벼

2013년 당시 배에 탑승했던 신연호 선생의 생전 모습이다. 신 선생은 2009년 온누비호의 청자뱃길 재현때에도 배에 올라 예전 모습을 추억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강진의 청자하면 대구면을 떠올리지만 사실 고려시대 초기에 청자를 구웠던 곳은 칠량면이었다. 칠량하면 청자외에도 옹기가 유명하다. 칠량면은 청자와 옹기가 시작된 곳이라는 공통점이 있는 곳이다.

한참 옹기를 생산하던 당시 봉황마을에는 옹기를 굽던 가마인 ‘굴’이 4개가 존재했다. 굴 주변으로 옹기를 만들어내던 곳인 ‘동막’이 3~4개가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60여년전 1950년대 옹기전성기때는 봉황마을에 약 20여개의 동막이 존재했었다.
 
칠량면소재지 인근에서 가져온 점토로 옹기를 만들고 이를 동막에서 구웠다. 이후 황토와 재를 섞은 물을 옹기에 발랐다. 이렇게 완성된 옹기는 옹기배를 통해 남해안과 제주도 일대로 팔려나갔다. 전성기일 때 봉황마을의 옹기배는 40여척에 이르렀다.

옹기배는 동력이 아닌 바람의 힘으로 움직이는 ‘풍선’이었기 때문에 뱃사공의 역할이 중요했다. 보통 배의 주인인 선주가 옹기를 실어주면 그때부터는 옹기를 사고 팔고 하는 일은 사공의 몫이었다. 옹기 판매지역, 판매요령 등은 모두 사공의 책임이었던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60여년전 옹기를 싣고 남해안과 제주도를 오갔던 40여척의 배가 드나들었던 칠량 봉황마을의 모습이다. 옹기가 사양길에 접어들면서 지금은 한적한 어촌마을이 됐다. 아직도 마을주민들은 당시 마을의 모습을 추억하며 회상에 잠기곤 한다.
지난 5월 마량면 산동리 영동저수지 인근의 한 야산에서 뜻깊은 행사가 진행됐다. 바로 강진의 마지막 옹기배 사공이었던 故 신연호씨를 추모하는 행사였다. 신 씨는 바람과 해류를 잘타고 장사 수완까지 좋아 뱃사공중에서도 인기가 있던 사공이었다.

신 씨는 1932년 완도 고금도에서 태어나 25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옹기배 사공이 돼 남해안과 제주도로 옹기를 팔러다녔다. 하지만 플라스틱 그릇의 등장으로 옹기가 사양길에 접어들면서 1974년 여객선 선장 면허를 취득해 15년간 활동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어장일을 했다. 고향에서 지내던 중 지난해 5월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신 씨는 완도에서 태어났지만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떠라 세 살 되던 해에 봉황마을로 들어왔다. 이 곳에서 13살 되던 해에 옹기배 화장으로 들어가게 됐고 배 화장 일을 잘 해내면서 그를 눈여겨본 선주의 발탁으로 25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옹기배 사공이 됐다.

당시 선주들은 신 씨가 한번 간 뱃길은 잊어버리지 않고 바람과 물때를 따라 돛을 올리고 키를 움직이는 손놀림이 남달랐다고 전했다.

좌측 사진은 2013년 10월 故 신연호 선생이 젊은 시절 치와 돛을 조정했던 모습을 재현해보이고 있다. 중앙의 사진은 봉황 옹기가 사양길에 접어들면서 신 선생이 갑판장으로 객선을 탔던 때의 모습이고 우측 사진은 지난 5월 마량면에서 신 선생 1주기 추모제가 진행됐던 모습이다. 신 선생은 젊은 시절 바람을 타고 배를 조종하는 실력이 탁월했고 옹기를 판매하는 장사수완도 좋아 인기가 많은 뱃사공이었다.
신 씨는 서남해안 포구와 장터를 누비며 옹기사공으로서 뿐만 아니라 옹기판매에도 수완이 뛰어났다. 장터와 섬마다 각각 필요한 옹기의 종류와 쓰임새를 눈여겨두었다가 적당한 옹기를 가져다 판매했다. 또 섬에서 생산되는 다양한 특산물을 받아다가 육지에 판매하는 물물교환 및 중개인 역할까지 담당하기도 했다.

화장으로 배를 탔던 신씨는 남들보다 잘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했다. 이때 옹기배를 탔던 사람들은 대부분 많이 배우지 못했기에 주산을 하지 못해 성냥개비로 셈을 하곤 했다. 이때 신 씨는 공부를 해서 그날그날 옹기를 판매한 내용을 메모했다.

일부 옹기배 사공들은 옹기를 판 돈을 허투루 써버리는 경우가 있었다. 이때 신 씨가 옹기를 판매했던 내용을 적은 기록을 선주에게 건네주었다. 이때부터 선주들이 신 씨를 눈여겨 보게 됐고 25살에 옹기배 사공이 됐다.

당시 옹기배 사공으로 한번 배를 타면 쌀 3가마니를 받았다. 당시에 일꾼이 하루 임금으로 쌀 한되도 받지 못했다. 이때 쌀 3가마니면 남의 집에서 일년동안 일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너 칠량면장 할래, 여그서 옹기배 사공할래?”라고 물어보면 백이면 백, 다 옹기배 사공을 한다는 말이 나올정도였다.

신 씨는 바람과 날씨를 잘 볼줄 알았고 장사수완까지 좋았기에 봉황마을의 선주들로부터 인기를 독차지 했다. 일부 선주들은 쌀 5가마니를 선금으로 주고 배를 태우기도 했을 정도였다.

신 씨의 장사수완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한번은 옹기배에 입구가 둥글고 넓적하게 벌어진 옹기그릇인 ‘잔태’만으로 가득 실었다. 그 배를 타고 여수, 통영을 거쳐 거제도 지시포를 갔다. 그곳에는 생고구마를 얇게 썰어서 햇빛에 말린 ‘절간’을 많이 만들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내린 비로 햇빛에 말려두었던 고구마 절간의 색깔이 변해버려 사람들에게 팔수 없게 돼버렸다. 이 것들을 저렴한 값에 옹기와 바꿔서 배에 가득 실고 여수 극동주정을 갔다. 극동주정에서는 고구마 절간으로 술을 만들었는데 그곳에 모두 팔았던 것이다. 이것으로 5배가 넘는 이익을 남겼다.

또 한번은 신씨가 옹기를 배에 싣고 진도의 거차도를 갔다. 이 곳은 세월호 사고가 발생한 곳과 가까운 곳으로 파도가 쎄서 배가 지나기 어려운 곳이었다. 신 씨는 이 곳을 목숨을 걸고 들어가 옹기와 조기를 바꿨다.

이렇게 구입한 조기는 아가미와 생산 뱃속에 소금을 뿌려 절대간을 해서 보관했다. 조기를 가지고 용당부두로 향했다. 용당부두의 한 상회를 찾아가 조기를 보여주고 30원에 산 조기를 300원에 판매했다. 한마디로 열배 이윤을 남긴 것이었다. 이정도로 장사를 잘했다.

이렇게 전성기였던 봉황 옹기는 플라스틱 그릇이 나오면서 수요가 급격히 줄었고 옹기를 굽던 가마들도 모두 문을 닫았다. 이때쯤에 동력선이 나오면서 풍선도 자취를 감추게 됐다.

봉황 옹기는 풍선에서 시작해 풍선으로 끝이 났다. 옹기배를 못타게 되면서 신 씨는 1974년 여객선 면허증을 취득했고 이 면허증으로 마량과 고금도간 객선 선장을 15년정도 했다. 이후에는 봉황마을에서 어장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나갔다.

칠량 봉황마을의 전성기 시절 옹기와 인생을 함께 했던 신 씨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마지막 옹기배 사공으로 기억되고 있다.

옹기배의 재현을 위해 자료를 수집해 책으로 제작하던 중 지난해 5월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신 씨를 추모하기 위해 올해 5월 1주기를 맞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 추모제를 개최한 것이었다.

또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는 칠량 옹기와 신씨의 일대기, 그리고 그가 남긴 풍선의 항해기술과 코스 등을 담아 책으로 펴내기도 했다.

강진의 청자와 옹기는 닮은 부분이 많다. 칠량면에서 시작됐다는 것과 배를 통해 운반이 되거나 판매가 됐다. 장인정신이 담긴 물건을 신 씨와 같은 뱃사공들이 목숨을 걸고 배를 타고 운반했기에 오늘날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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