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기념관 7월 25일부터 9월 16일까지 특별전 개최

목민서 등 다산관련 유물 감상, 아트영상도 색다른 볼거리
다산 정약용 선생이 친필로 쓴 간찰도 전시돼‘눈길’


25일 오후 개막식을 맞아 이승옥 군수가 학예사로부터 다산 하피첩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다.
다산기념관이 ‘목민심서’ 저술 200주년을 맞아 특별한 선물을 마련했다. 강진군은 208년에 귀향하는 다산의 ‘하피첩’을 포함해 공개하는 특별전시회를 이달 25일부터 9월 16일까지 계속 연다.

다산이 남긴 특별한 기록 하피첩은 다산이 강진에 유배 온 지 10년이 되던 해인 1810년 강진 다산초당 동암에서 저술된 것으로 다산이 두 아들 학연과 학유에게 훈계의 내용을 적은 서첩이다.

두 아들에게 공부하는 방법, 생계를 꾸리는 방식, 친구를 사귈 때 가려야 할 일, 친척간에 화목하게 지내는 방법, 시를 짓는 의미 등을 자세하게 일러주었다.
 
여기서 하피란 왕실의 비, 빈이 입던 옷으로, 다산은 부인 홍씨가 시집 올 때 입고 온 붉은색 치마를‘ 하피’라 표현한 것이다. 

다산 선생이 남긴 하피첩 내부의 모습이다. 정약용이 두 아들에게 당부하는 내용은 붉은 색 치마를 잘라 적은 글이다.
이 하피첩에는 다산의 애틋한 사랑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보물을 눈으로 확인해 볼 수 있다. 다산초당에서 직접 치마를 잘라 글을 적는 다산의 모습을 상상하다보면 하피첩에 적힌 말처럼 그리워하는 마음이 뭉클하게 일어난다.

또 이번 전시회에서는 감동적인 아트 영상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다산기념관은 이번 전시영상을 기획하면서 다산의 인간적인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일환으로 국내 최고의 샌드아트 작가와 함께 다산의 시 ‘애절양’을 영상으로 제작했다. 보는 순간 감동과 진한 여운이 남을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또 파격적인 연출과 최초로 공개되는 ‘목민서’이다. 서지류 전시는 텍스트 의존도가 높아 관람객의 집중도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이 점을 보완하기 위해 시선을 압도하는 파격적인 연출을 시도했다. 기획전시실을 대대적으로 개편해 다양한 컬러감을 살렸다.
 
번암 채제공이 중앙정부에 올린 채제공간찰이다.
서화류 일대일 실측을 통해 생동감을 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다산이 지은 ‘목민심서’의 기반이 됐던 다양한 목민서를 집중 전시해 관람객들의 이해도를 향상시켰다.

다산 정약용, 남공철 등 19세기에 활동한 문인들의 과거시험 내용을 필사한 모범 답안지 모음인 과표도 볼수 있다. 또 전시 유물중 교지는 1789년(정조13년) 12월 20일, 정조가 강진군 보동마을 출신 윤효관을 통훈대부 행 김천도 찰방에 임명하는 교지이다.
 
여기서 찰방은 각 역도를 관장하던 문신 종 6품직으로 현의 수령과 같은 관직이었다. 비록 지방 수령으로는 낮은 관직이었지만 군현의 간섭을 받지 않았으며 역리(驛吏)를 포함한 역노(驛奴)의 관리, 역마 보급, 사신 접대 등을 총괄하였던 최고 책임자였다.

정약용 역시 정조 19년(1795)에 충청도 청양(靑陽)의 금정역(金井驛) 찰방으로 임명되었다. 이는 비록 좌천성 인사였지만 당시 천주교와 연관되어 정치적 공격을 받고 있던 정약용을 보호하려는 정조의 의도가 숨어 있었다. 정약용은 금정찰방으로 대략 5개월 정도 있었으며,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백성의 고통을 살피고 병폐를 찾아내 고치기도 했다.

전라도수령관안은 1첩 27절로 구성되었으며, 1851년부터 1856년에 걸쳐 작성된 전라도 수령명단이다. 전라도 각 고을의 수령 이외에도 중앙에서 전라도에 파견된 관리 등 131명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특징적으로 이름을 곧바로 써 넣지 않고 별지에 기록하여 붙이도록 되어 있어서, 수령이 교체되면 그 위에 새로 덧붙였다. 이 관안에는 수령의 명단 이외에도 제수일, 하직일, 도임일 및 품관이 기록 되어있다.

1851년부터 1856년에 걸쳐 작성된 전라도 수령명단으로 1첩 27절로 구성돼 있다.
조선시대에는 수령의 출신에 따라 부임하는 고을에 차이가 있었으므로 출신별로 구분하여 문관 출신은 붉은 종이를, 무관 출신은 파란 종이를, 그리고 음관 출신은 노란 종이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어느 고을에 어떤 출신의 수령이 부임하였는지를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이 외에도 각 고을의 이명(異名)과 고을이 전라좌도인지 우도인지 구분해 놓았으며, 수영(水營)이나 병영(兵營)의 위치도 파악 가능하다.

채제공 간찰은 청백리로 잘 알려진 번암 채제공이 함경도 지역의 수령으로 나가 있을 때 중앙 고관에게 올린 것으로, 기근으로 비참하게 버려진 백성들을 살리고자 세금을 줄여줄 것을 부탁하고 있다. 특징적으로 뒷날이라도 세금을 감해주던가, 그렇지 않으면 파면시켜 달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위세에 굴하지 않는 목민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이번에 목민심서 필사본과 활자본을 감상할 수 있다. 이 유물들은 목민심서가 19세기 이후 수많은 이본이 제작되어 유포됐고 널리 활용되었다는 증거이다. 이러한 필사본은 워낙 수량이 많아서 문헌적 가치를 갖는 것은 아니지만 성명미상의 어느 지방관이 목민심서를 특별히 중시하여 작성하도록 한 것임을 보여 주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목민심서 필사본의 모습이다.
목민심서 활자본은 1902년 광문사에서 발간했다. 특징적으로 1818년 강진 귀양살이가 끝나는 무렵에 제작된 목민심서 초고 단계의 것을 기반으로 발간되어 목민심서 제작 단계를 유추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정약용 간찰은 목민심서가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걱정하는 다산의 친필 간찰이다. 이를 통해 다산의 목민심서가 어느 시점에서부터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 유통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매우 위태롭고 두렵다”라는 말에서 다산이 해배 이후에도 조심스러운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목민심서는 세상에 널리 퍼져서 다산의 저술 중 지금까지도 가장 큰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

또 거관수지는 두루마리 형태로 36조목이 적혀 있으며, 필사자는 이정 이다. 원래 제목이 따로 적혀 있지 않은데 수령으로 있는 자가 필히 숙지하고 경계로 삼아야 할 내용이라는 뜻에서 ‘거관수지’라고 붙인 것이다.

위성수록은 1책 1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평안도 희천 수령으로 1702년 부임하여 행한 치적이 기록되어 있으며, 기록자는 진사 김정보라는 인물이다. 수령의 친구로서 현지를 방문하여 체류한 동안에 보고 들은 일을 정리한 것이라고 밝혔다. 위성(渭城)은 희천의 별칭으로 지역의 구체적인 사실과 더불어 수령이 취한 조치 및 업적이 조목조목 진술되어 있어 목민적 의미와 함께 목민서의 원천 자료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다산기념관 관계자는 “이번 특별전은 군민들과 관람객들에게 특별한 선물을 선사하기위해 준비했다”며 “다산의 애틋한 부정과 함께 다산의 흔적을 실물로 볼 수 있어 더욱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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