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홍콩, 마카오, 필리핀, 중국을 구경했던 그 사람

오는 9일 강진아트홀에서 공연되는 ‘홍어장수 문순득 표류기’는 1801년 흑산도의 한 어부가 망망대해에 표류해 장장 3년 2개월 동안 해외를 떠돌다가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 이야기를 다루는 마당극이다. 

문순득은 손암 정약전 선생이 흑산도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그곳에서 살았다. 강진에서는 동생인 다산 정약용 선생이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다.

문순득의 표류와 귀향은 당시 그들 형제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까. 영원히 돌아 올수 없었던 한 어부의 생환은 영원한 이별을 슬퍼했던 정약전, 약용 형제에게 ‘우리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큰 희망을 심어주었을지 모를 사건이었다.

약전․ 약용 형제와 강진의 제자들이 문순득의 표류담에 쏟은 관심과 애정을 보면 우리는 아스라이 나마 그같은 추측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1801년 음력 11월 22일 새벽 나주의 북쪽에 위치한 밤남정으로 돌아가 보자.

다산의 둘째형 손암 정약전과 동생 정약용이 주막에서 하룻밤을 지낸 후 각각 유배지인 흑산도와 강진으로 헤어지면서 서글픈 작별인사를 나눈다.

두 사람은 영원히 만나지 못했다. 마치 돛단배를 타고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망망대해로 떠밀려 표류한 것 처럼 두 사람의 배는 영원히 만남이란 항구로 돌아오지 못했다.

우이도를 거쳐 흑산도에서 생활했던 형 정약전은 유배 16년째인 1816년 흑산도에서 병환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기구한 형제지간이었다.

약전은 흑산도에 도착해 문순득이란 현지 어부를 만난다. 문순득은 약전을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 그는 갓 혼인한 스물다섯의 홍어장수였다.

그런데  문순득은 1802년 1월 18일 흑산도에서 배를 타고 나주영산포로 홍어를 팔러 가다가 풍랑을 만나 일본 오키나와로 떠내려갔다.

그곳에서 8개월을 생활하다가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오던 중 불행스럽게 또다시 풍랑을 만나 필리핀으로 표류하게 된다.

필리핀에서는 8개월의 표류생활을 하게 되고 다시 마카오에서 3개월, 중국에서 13개월을 거쳐 3년 2개월 만에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정약전 선생이 흑산도에 도착한지 2~3개월만에 표류해 사라졌다가 3년2개월만에 다시 흑산도에 살아 귀환한 것이다. 

당시에는 이런류의 표류사건이 많았다. 1599~1872년 동안 한반도 전역에서 일본에 표류한 통계를 보면 967건에 9천751명이나 된다.

이 시기에 강진사람들의 표류사건도 수십건이나 보이고 있다. 강진 남포사람들이 대만으로 표류한 기록도 전해진다. 물론 통계에 잡히지 않은 표류도 많았을 것이다.

홍어장수 문순득의 표류는 수많은 사건중의 하나로 뭍혀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기록을 좋아하고 국제소식에 목말라하던 정약전에게 파란 만장했던 표류과정을 털어놈으로서 그의 표류기록은 ‘표해시말’이란 책으로 오늘날 우리곁으로 오게 됐다. 

문순득은 우리나라 최초로 가장 먼 거리를 표류하게 된 인물로 전해지고 있다. 또 당시 폐쇄적인 조선사회의 악습 속에서도 불구하고 세계의 각 나라사람들과 교류하여 새로운 문물과 무역활동, 다양한 문화 등을 익히고 돌아와 당시 실학의 선구자인 다산 정약용과 정약전, 이강회 등에게 상당한 영향을 준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낸 문순득은 강진과 인연을 깊게 맺는다. ‘표해시말’ 정리를 끝낸 정약전은 강진에 있는 동생 약용에게 표류담을 적은 편지를 썼다.그리고 편지를 문순득에게 들려서 강진으로 보냈다.

물론 배를 타고 며칠이 걸려 왔을 것이다. 강진 다산초당에 온 문순득은 대학자 다산에게 신명나게 자신의 표류담을 들려주었다.

마카오의 번화한 시장에서 오가던 금전과 은전, 동전얘기에 정약용은 눈을 빛내며 귀를 귀울였다. 다산은 문순득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가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은 끝에 살아 돌아왔고, 이제 아들까지 얻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감동한 다산이 문순득에게 제안했다. “내가 자네 아들의 이름을 지어주고 싶네”다산은 문순득 아들의 이름을 여환(呂還)이라고 지어주었다. 여송(필리핀)이라는 머나먼 나라까지 목숨을 건 표류를 하고도 건강하게 살아 돌아와 세상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이라는 뜻이였다.

홍어장수 문순득이 아들의 이름을 손에 쥐고 들뜬 마음으로 강진만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손에 잡힐 것 같다.

그러나 다산과 손암이 탄 각자의 돛배는 영원히 만남이라는 항구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들의 배는 망망대해로 흘러들어가 멀리 멀리 떠내려가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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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사람 이강회가 흑산도로 간 까닭은?
순득 만나 운곡선설, 거설답객난등 저술남겨 

홍어장수 문순득이 구술하고 정약전선생이 받아적은 ‘표해시말’은 강진사람 이강회가 없었다면 오늘날 빛을 보지 못했을지 모른다.

다산 선생의 18제자중 가장 총명했다는 신전 출신 이강회 선생은 1818년 다산이 해배되어 강진을 뜨자 짐을 싸들고 흑산도로 들어간다. 손암이 이미 2년전 병사한 후였고 그의 나이 31세때였다.

이강회 선생은 흑산도에서 손암을 가장 가까이서 모셨던 문순득을 만났다. 이강회선생은 다산을 통해 흑산도의 문순득이라는 사람이 서양의 수많은 문물과 선박을 두루 살피고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실용학문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이강회는 문순득으로부터 서양배의 생김새와 수레의 형태, 그곳의 풍물등을 구체적으로 묻고 들었다.
 
중국에서 흑산도로 표류해 온 배도 볼수 있었다. 이강회는 이를 근거로 ‘운곡선설’이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조선(造船) 안내 책을 서술했고, ‘거설답객난’과 ‘제거설’이라는 수레만드는 법을 담은 책을 썼다.

운곡선설에 대해 이강회는 ‘이 글은 문순득의 말에서 나오고 나의 붓에서 이루어졌다’고 적을 정도로 문순득의 증언이 근저가 됐다.

이강회는 자신의 저술과 함께 2년 전 정약전이 남기고 떠난 ‘표해시말’을 묶어 95쪽 분량의 ‘유암총서(柳菴叢書)'라는 문집으로 묶어 냈다. 

‘유암총서’는 문순득의 5대손 문채옥(신안군 도초면 우이도)씨가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2007년 최초로 파악됐고, 이를 신안문화원이 번역해 출간함으로서 널리 세상에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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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극 ‘홍어장수 문순득 표류기’는?

이번에 강진에서 무대에 오르는 ‘홍어장수 문순득 표류기’는 전라남도 공연예술단체 집중육성 선정된 작품이다. 마당극 극단 ‘갯돌’이 공연한다.

공연내내 문순득 일행 5명이 망망대해에서 겪는 갈등과 절망, 희망, 에피소드등이 재미있게 펼쳐진다. 문순득이 거쳐왔던 오키나와와 필리핀의 민속춤, 중국의 변검, 사자춤 등 볼거리 중심으로 관객들의 호기심을 불러들이고, 다양한 시도와 실험적인 무대미술, 레이저, 영상쇼 등을 무대언어로 승화시켰다.

마당극의 지휘를 맡은 손재오 총연출은 “일찍이 표류를 통해 세계에 눈을 뜬 문순득의 파란만장한 세계여행을 담았고, 낯선 땅에서 위기를 기회로 알고 환경에 적응해나가는 문순득의 지혜를 담아냈다”며 “평범한 서민이었지만 바다에서 배운 개방과 포용 등 바다사나이의 호쾌한 기질과 위기 때마다 잘 대처하는 바다 사람들의 인간미와 풍류기질을 표출했다”고 연출의도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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