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만월대서 청자기와 편 발견, 어디에서 생산됐는지 누구도 몰라

강진군이 청자박물관 앞뜰에 청자를 기와로 올린 정자를 지어 양이정을 추억하고 있다. 고려시대 저런 모습의 정자가 있었다는 것만 해도 가슴 설레는 일이다.
만월대는 청자의 역사와 관련해서 더 없이 중요한 곳이다. 만월대는 고려청자의 성지였다. 그곳에 양이정이란 정자가 있었고 양이정의 지붕이 청자기와로 씌워졌다는 고려사 기록은 청자 제작 기술의 최고 이상향을 보여주고 있다.

청자기와는 최고의 예술품이였다. 그러나 조각 몇 개 밖에 없었다. 고려사 의종왕 11년조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임금(의종)이 왕업을 번영케 하고자 궁궐옆에 있던 민가 50채를 헐고 수덕궁이란 새 궁중건물을 지을제, 정원에다가 양이정을 세웠는데 청자기와를 올렸다’ 역사가들은 청자라는 당대 최고의 예술품으로 기와를 만들었다는 기록에 감탄을 자아냈다.

1964년 이용희 실장의 생가터에서 발견된 청자기와
청자기와편은 일제강점기인 1928년 만월대에서 수습돼 이 기록을 뒷받침했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이 청자기와가 도대체 어디에서 생산됐는지 누구도 알지 못했다. 개경 사람들도 개경 주변의 어느지역에서 청자기와와 청자를 생산했을 것으로 막연히 추정하고 있었다.

당시 청자기와 전설이 얼마나 학계의 애간장을 태웠는지 한 신문의 기사를 보면 더 충실하게 알 수 있다. ‘이 전설적인 옛 기록은 수많은 관계학자들을 너무 오랫동안 안타깝게 해왔다.

그 옛날 송도(개경) 궁궐건물은 깡그리 흔적을 감춘지 오래다. 실오라기 같은 자료로 만월대 근처에서 청자기와 파편하나가 나타났을 뿐이다. 우리가 오늘날 박물관에서 고려청자를 보면서 눈부신 빛깔과 무늬에 감동하곤 한다. 그같은 청자의 기와가 한 정자의 지붕을 이루었을 때 그 외관은 얼마나 호화롭고 찬란했을까’<경향신문 1964년 12월 9일>

청자기와는 최순우 관장과 정양모 관장등이 주도한 국립중앙박물관 발굴팀이 1964년 7월 대구 사당리 이용희 청자장의 집 앞마당에서 무더기로 발견해 내면서 바로 강진에서 생산된 것이라는게 확인됐다. 

이번에 재개된 남북공동 발굴조사단이 만월대 발굴과정에서 양이정 터를 발견할지도 모를 일이다. 강진에서 개경으로 다시 개경에서 강진으로 이어지는 고려청자의 역사는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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