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천년 역사 강진청자, 장수기업이 없다

강진사람들은 묵은지를 좋아한다. 다른나라 사람들도 유서 깊은 음식을 좋아한다. 오래된 기업이 생산하는 상품은 시장에서 높은 선호도를 자랑한다. 강진의 청자는 1,000년 역사를 자랑한다. 그런 지역에 100년된 기업이 없다. 지금부터 장수기업을 만들어가야 한다. 청자뿐 아니라 강진에서 다양한 분야에서 장수기업을 키우는 일은 강진경제를 살리는 지름길이다. 청자축제를 맞아 강진일보가 한국경영사학회와 함께 그 방향과 방법을 모색해 본다. /편집자 주.   
 

▲ 일본 교토에 있는 1000년된 콩떡집의 모습(윗쪽). 아래사진은 회사측에서 제공한 100년 전의 모습이 담긴 사진인데 예나 지금이나 건물의 구조에 큰 변화가 없다. 이처럼 이곳의 특징은 1000년 동안 24대째를 이어오면서 콩떡의 맛과 모양이 변함없고 역시 변함없이 고객들을 봉사하는 마음으로 맞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흔히 고려청자를 1,0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고 한다. 1,000년 전부터 강진에서 생산됐다는 의미다. 그러나 지금 강진에서 생산되고 있는 청자가 그 역사를 오롯이 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강진청자는 시장에서의 관심부족과 판매부진이라는 이중고를 면치 못하고 있다.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산업의 한 분야로서 자리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유는 복잡하지 않아 보인다. 1,000년 전 강진에서 청자가 생산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후로 오랫동안 청자를 생산해 온 기업이 없기 때문이다. 정유재란때 일본으로 끌려가 도예가문을 이룬 심수관, 이삼평가등이 13대, 14대를 이어오면서 일본의 도자기 산업은 소위 스타도공들이 큰 맥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강진은 청자의 맥이 1300년경 끊겼다, 그러다가 1960년대 후반에야 발굴작업이 이뤄졌고 재현사업이 시작된 것은 70년 대 초반이다. 개인요가 출현한 것은 1980년대 중반이었다.

그런 세월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강진에는 천년은 아니지만 100년 이상이라도 청자를 생산하는 기업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이같은 강진 청자산업의 현실은 우리나라의 산업구조 역사와 그 맥을 함께 한다. 우리나라에는 200년 된 기업이 7개에 불과하다. 흔히 알려진대로 부채표 활명수를 만드는 동화제약과 두산그룹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그런데 일본에는 200년 이상된 기업이 3,937개나 되고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가게가 27,000개가 넘는다고 한다. 우리나라 현실이 그렇다지만 1,000년 청자의 역사를 담고 있는 강진에 백년묵은 청자생산 기업, 백년묵은 한정식집, 백년묵은 농업 기업, 백년묵은 시장 상회가 없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 없다.
 

일본의 경우 굉장히 다른 양상을 보인다. 창업한지 200년 이상된 기업들이 수두룩 하다. 1,000년은 아니더라도 불과 150여년 사이에 명문 도예가를 형성한 지역도 많다. 꾸준히 기업활동을 하고 있고, 그 업을 2세, 3세들이 자연스럽게 이어받고 있기 때문이다.

도자기 분야뿐 아니라 떡을 만드는 곳도 그렇고, 고등어 조림을 만드는 곳도 마찬가지다.  특히 전통적으로 상업이 발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곳에서는 그 양상이 뚜렷하다. 일본의 고도인 교토는 교토상인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들은 천년상인으로 불리우며 그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대기업에서부터 작은 규모의 구멍가게까지 전통상인의 정신으로 무장해 백년, 천년을 이어가고 있다. 그들은 지금 일본경제의 뿌리다. 

일본 교토로 가보자. 일본의 천년 고도 교토. 요즘 강진이 덥지만 교토는 더 덥다. 교토는 일본의 대표적인 분지다. 작열하는 햇볕에 습기가 대단하다. 그늘에 있어도 돼지기름 같은 비지땀이 주르륵 한다. 아주 오래전 이맘때 쯤이면 일본에서는 역병이 돌았다. 고온다습한 기온에 역병이 창궐했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어떻게 역병을 막을 것인가.

994년, 교토사람들은 묘안을 짜냈다. 도시의 북쪽에 금궁(今宮)신사를 짓고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냈다. 역병을 쫒아달라고 빌었다. 신사에 받치는 큰 재물은 찰떡이었다. 일본인들은 지금도 찰떡이 액운을 쫓아준다고 생각한다. 신사에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사람들이 찰떡을 가지고 와서 역병을 이겨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러자 신사 앞에 찹쌀로 만드는 인절미 형태의 작은 콩떡집이 생겼다. 가게의 이름은 이치와(一和). 1018년의 일이자 금궁신사가 들어선지 22년만의 일이다. 시기적으로 비교하면 강진에서 본격적으로 청자가 생산되기 시작한 때다.

▲ 상단 사진은 이곳의 22대 주인이 콩떡을 굽고 있는 모습이다. 아래 사진은 바로 그 자리에서 종업원들이 똑같은 모양의 콩떡을 굽고 있다.

그로부터 딱 1000년. 올해가 2018년이니 딱 1000년이 지났다. 그 신사 앞에 그 떡집이 지금도 성업 중이다. 이른바 교토상인이 운영하는 가게다.

고만한 가게 규모에 늘 변함없는 원료 배합 방식, 제조 방법, 비슷한 맛등이 1000년을 이어오며 손님을 맞고 있다. 한가지 변한게 있다면 명치시대(1868~1912)에 설탕이 들어와 인절미에 넣은 것 이라고 했다.

건너편 금궁신사에서는 지금도 매년 4월 두 번째 일요일 날 전통 행사로 자리잡은 야스라이 마쓰리가 열린다. 질병을 퇴치하기 위한 마쓰리이다. 이 역시 1000년이 넘은 역사다. 이 신사에 바치는 물건 중의 하나는 지금도 인절미다.

달라진 게 있다면 역시 사람이다. 지금 이치와의 사장은 하세카와 지요(여)씨다. 창업주로부터 24대째라고 한다. 집안 대대로 1000년째, 24대를 거쳐 지금까지 인절미를 굽고 있는 것이다.

왕대밭에 다른 왕대가 나지 않을 수 없다. 이치와 건너편에도 똑같은 떡을 판매하는 가게가 있다. 이름은 가자리야라고 한다. 가자리야는 4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1천년에 비하면 적지만 400년된 가게는 우리나라에 없다. 교토에는 이치와 처럼 1000년 넘은 가게가 현재 6개다. 200년 이상 된 가게는 1,600개나 된다고 한다.

지난 13일 오후 교토 북쪽의 이치와 가게. 섭씨 ㅋㅋ36도를 웃도는 날이었다. 주변에 숲이 있고 큰나무가 많았지만 바람 한점 없이 습했다. 종업원으로 보이는 여성들이 숯불을 끼고 앉아 땀을 흘리면서 인절미를 굽고 있었다. 곁에서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우선 이곳에서는 두 세 개만 먹으면 속이 든든한 우리나라의 인절미를 생각하면 큰일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크기가 엄지손가락 첫 마디 정도 했다. 인절미를 나무 꼬치에 꽂아 둥근 형태로 평평하게 누른 후 이러지리 뒤집어가면서 숯불에 1인분을 굽는 데 10분가량 소요되었다.그렇게 만든 1인분은 13개 였다.

간단해보였으나 오랜 경험이 있는 솜씨라는 것이 느껴졌다. 굳이 숯불에 떡을 굽는 이유를 물었더니 떡의 비린내를 숯불이 잡아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숯도 간단한게 아니었다.

물어보니 일본에서 가장 비싼 와카야마현의 비장탄 숯이다. 비장탄 숯은 최고가인데, 숯 값이 올라도 반드시 비장탄 숯을 써서 구워야 제 맛이 나기 때문에 그것을 고집하고 있다는 것이다. 확실한 전통을 고집하고 있었다.

잠시 후 떡이 다 구워지자 그 위에 조청과 흰 된장을 뿌려 달짝지근한 맛을 내게 해주었다. 종업원들의 이마에 구슬 같은 땀방울이 송송 맺혀 있었다.

이렇게 구운 인절미 꼬치 1인분의 가격은 500엔. 우리돈으로 5,000원이다. 벌써 10여 년째 500엔을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이곳 이치와 인절미집은 한국관광객들에게도 필수 코스로 통하고 있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솔직히 강진사람들 입맛에는 그저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 떡을 먹고 나서야 “정말로 교토에 왔다”고 말한다.

그만큼 이 떡은 교토의 명물이다. 어떤 사람은 이 떡을 먹기 위해 20년 만에 다시 이곳에 들렀다고 한다.

이 떡은 쌀가루로 만든 것이다. 그 쌀은 예부터 시가현의 하부타에 있는 도매상이 가져다준다. 하루 쌀 소비량이 40∼50㎏ 정도이니 적어도 하루 2,000인 분은 파는 셈이다.

교토에 벚꽃이 피는 봄철과 여러 관광지들이 단풍으로 물드는 가을에는 줄을 서서 기다려야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인기가 있다고 한다.

함께 동행한 한국경영사학회 회원들과 가게안으로 들어가 떡을 주문했다. 곧바로 떡을 담은 접시들이 들어왔다. 종업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몇가지를 물었다. 그러면서 신분을 넌지시 물었다.

그런데 그중 한명으로부터 의외의 답이 왔다. 하세가와 가즈꼬라는 이름을 가진 이 집안의 며느리라는 것이다. 방금 화롯불 앞에서 다른 사람들과 인절미를 굽고 있던 바로 그 여성이었다. 

▲ 현 24대 점주인 하세가와 지요씨의 올케인 하세가와 가즈꼬씨다. 스스로 25대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24대 점주가 하세카와 지요씨이고, 하세카와 지요씨 남동생의 부인, 그러니까 하세카와지요씨의 올케였다. 가즈꼬씨는 자신을 스스로 이 집안의 25세손이라고 소개했다. 가장 궁금한 것이 1000년된 가게를 정부나 자치단체가 어떤 지원이나 보호를 하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답은 간단했다.

“사진을 찍어가서 관광 홍보책자에 실어주는게 전부입니다” 생각보다 간단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그럼 1000년된 가게의 사훈은 무엇일까. 무엇이 이 가게로 하여금 1000년을 이어오게 했을까.

“항상 봉사하는 마음으로 가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통역을 통해 전해지는 그녀의 답변은 짭게만 느껴졌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봉사라고 하면 사회에 대한 봉사이고, 요즘 ㅅ들어서는 지역사회 봉사라는 말도 자주 쓴다.

손님들에 대한 봉사라는 말은 우리나라에서 흔히 사용하는 용어는 아니지만 그녀는 봉사라는 말을 또렷하게 했다. 생각을 돌려 보니 고객에 대한 봉사만큼 철저한 상인정신이 또 있을까 싶었다.

고객에게 봉사하기 위해 음식을 정직하게 만들고, 고객에게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항상 친절하고, 고객들에게 봉사하는 마음으로 늘 깨끗한 식당을 유지한다면 손님들이 감동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게 바로 1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고객들을 감동시키는 방법이자, 이 작은 가게가 지금까지 생명력을 이어오는 큰 비결이었다.

가즈꼬씨가 조상들이 베풀었던 선행에 대해 설명했다. 자신도 전해들은 이야기라고 했다. 아주 오래전 신사주변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다. 먹을 것을 얻기 위해서였다.

가즈꼬씨의 조상들은 배고픈 사람들이 오면 언제든지 떡을 나눠 주었다고 한다. 매일같이 돈을 받지 않고 나눠주는 양이 상당 했지만 선대 조상들은 배고픈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떡을 나눠주곤 했다. 이에 대해 가즈꼬씨가 많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바로 그런 이유가 이 가게를 역사의 굴곡 속에서도 1000년의 역사를 이어오게 했다는 의미로 들렸다.

“시집와서 시할머니와 시어머니의 등 뒤에서 떡을 굽는 것을 보고 배웠습니다. 그냥 열심히 떡 만들고 손님 맞이하고 그렇게 생활하고 있습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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