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크게 갖고 계획을 세워 실천하고 노력해라”

김영배 강진군재향군인회장이 고등학교 시절 은사님인 이동균 선생에 대해 이야기하며 미소짓고 있다.
강진농고 입학후 담임교사로 첫 만남
잘못한 일에는 엄하게 지도, 추후 이유 설명
사비 털어 학교 복도에 꽃 화분 전시
희귀나무 사재로 수집, 학생들 교육에 활용


나는 강진읍 동성리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부산에서 2년간 기술학원을 다녔고 그곳에서 크레인 자격증을 취득하기도 했다. 이 자격증으로 울산에 있는 현대 조선소에 취업을 하려고 했으나 위험한 일이라며 부모님의 반대로 뜻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됐다.

고향으로 돌아와서 군입대를 하게 됐고 제대 후 기타 강습을 했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김영수 선배에게 기타를 약 3년 정도 배운 경험이 있었다. 이를 토대로 기타 강습을 한 것이다. 이후 1986년 강진읍 극장통에서 모란화원을 차렸다.

군 제대 후 기타강습을 하며 어머니의 가게에서 그릇과 화분 판매일을 돕다가 꽃집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때에는 강진읍내에 꽃집이 2곳 정도 있었다. 이때 시작했던 모란화원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2000년도에 들어서면서 극장통을 비롯한 동성리 상권이 급격히 약해지면서 나는 중앙로 인근을 거쳐 현재 자리로 꽃집을 옮겨야만 했다.

내 인생에 있어서 잊을 수 없는 한 사람을 꼽는다면 강진농고에 다니던 시절에 만났던 이동균 선생님이다. 나는 중앙초등학교와 강진중학교를 거쳐 1975년 강진농업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만났던 담임 선생님이셨다.

농업학교의 특성상 대부분의 교과 과목이 농업위주 수업이 이루졌지만 선생님은 국어담당이셨다. 그때 30~40대로 비교적 젊은 선생님이셨다.

첫 인상은 키도 크시고 인상도 부드러워 인자한 인상이었던 기억이 난다. 다른 학교에서 근무를 하다 내 위로 3년 선배때부터 농고에서 선생님으로 근무했었다. 선배들로부터 들었던 선생님의 소문은 첫 인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전남생명과학고(전 강진농업고등학교) 전경
소문에 의하면 선생님의 매가 너무 무서워 학교를 그만둔 선배가 있을 정도로 엄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오죽하면 선생님의 별명이 ‘30대’였다. 나이가 30대가 아니라 매가 30대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내가 느낀 선생님은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농업학교였기에 농업위주 수업이 이뤄지는 가운데서도 국어를 담당하셨는데 항상 우리들에게 “비록 농업학교에 다니고 있지만 꿈을 크게 갖고 계획을 세워 실천하고 노력해라”라고 조언을 해주셨다. 이 말씀은 시골에 산다고 현재에 만족하며 꿈을 포기하지 말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였던 것 같다.

또 항상 국어 수업에도 열심히 하셨는데 수업시간마다 시를 읽어주셨던 기억이 난다. 좋은 시가 있으면 낭독해주시고 우리에게도 외워보라고 권유도 해주셨다. 시를 외우라고 하시곤 다 못외운 친구들에게는 남아서 외울때까지 가르쳐주시기도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열정이 넘치는 선생님이셨다.

어느 날은 선생님이 링컨의 연설문을 가져오셨다. 농업외적으로 영어공부도 열심히 하라는 의미였던 것 같다. 링컨의 연설문의 영어 원문을 우리에게 나눠주고 외우라고 하셨다. 매일 외웠는지 점검도 하셨고 못외운 친구들은 수업이 끝나고 2~3시간씩 남아서 외우고 가야만 했다. 시간이 흐르고 같은 반 친구들 대부분이 외우게 됐다.

이처럼 항상 선생님은 농업학교에서 학생들과 학교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비농업 과목을 가르치시면서도 열정을 다 쏟으셨다. 학생들이 사회에 나가서도 훌륭한 사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도록 지도하려고 노력하셨다. 이 때문에 학창시절에 나와 친구들은 선생님에 대해서 불평과 불만을 갖기도 했지만 지금와서 돌아보면 참다운 교육자였다는 생각이 든다.

선생님은 별명대로 친구들이 잘못하면 엄하게 지도하셨다. 매를 맞았던 기억도 많다. 하지만 꾸중하고 난 후에는 따로 불러서 자신이 엄하게 지도한 이유에 대해 설명해주셨고 따뜻하게 안아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자신만의 교육철학이 뚜렷하셨던 것 같다. 이때문인지 아직도 선생님과 함께 했던 순간들이 기억이 나곤 한다.

또 어느 날은 선생님과 장흥 부산면으로 간 적이 있었다. 선생님의 고향이 장흥 부산면이었는데 그곳에서 모내기체험도하고 닭을 잡아서 백숙도 해먹었다. 지금이야 전남생명과학고로 바뀌고 농업에 대해 체험할 수 있는 시설이 많아졌지만 이때에만 하더라도 농업을 실제 현장에서 체험할 수 있는 장소와 기회가 많지 않았다.

또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선생님 고향집에는 국화와 희귀한 나무들이 많았다. 자신의 사비를 털어 꽃이 심어진 화분을 복도에 가져다놓고 학생들이 볼 수 있도록 하셨다. 이외에도 우리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없었던 희귀한 나무들의 삽순을 잘라오셔서 우리들에게 접붙이기 실습도 시켜주셨다.

1년간 우리와 함께 생활하셨던 선생님은 1년후 다른 학교로 떠나게 되셨고 이후 만나지 못했다. 선생님은 강진농고를 떠난후 목포, 함평, 영광 등에서 근무하셨고 영광 염산전자고에서 교감으로 재직하셨다. 2000년도 선생님을 잊지못하는 친구들 몇몇과 함께 뜻을 모아 선생님을 찾아보기로 했다. 수소문한 끝에 영광에 계신 선생님은 알게 됐고 선생님과 함께 식사를 함께 하게 됐다.

2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선생님은 그곳에 있었던 친구들 대부분의 이름을 기억하시고 불러주셨다. 또 자신의 매가 무서워 학교를 그만뒀던 친구들 이름을 기억하며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하셨다. 그 뒤로 광주 등에서 2번 정도 더 찾아뵐 기회가 있었다. 이후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선생님에게 연락 한번 드리지 못해 죄송한 마음뿐이다.

지금와서 선생님에 대해 생각해보면 내가 성실하게 학교 생활을 끝마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이동균 선생님 덕분이었다. 희생과 봉사정신으로 학생들을 지도하셨고 인간적인 교육자셨다. 자신의 개인시간을 포기하고 아이들을 지도하셨던 모습을 보면 정말 열정적인 교육자셨다는 것을 이제와서 느낀다. 앞으로 나도 선생님처럼 후배들에게 본이 되고 좋은 기억을 남길 수 있도록 열심히 봉사하며 살아가고 싶다.
<정리=오기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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