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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수 없는 사람]임영택 전 4H강진군연합회장의 이정섭 고교 은사“운동을 한 사람은 주먹보다 자기 마음을 다스릴줄 알아야 한다”
오기안 기자  |  ju@nsor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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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6.28  10: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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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농고 1, 2학년 부담임으로 인연
누구 보다 학생들의 의견 경청
방황하던 나를 올바른 길로 인도
적극적 사회활동 권유, 결혼식 주례도 맡아

   
▲ 임영택 전 4H 강진군연합회장
나는 대구면 백사마을이 고향이다. 대구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광주로 유학가게 돼 광주 동성중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시절 3년 동안 누나의 집에서 학교를 다녔다.

이때는 공부도 나름 잘했던 탓인지 3년간 장학생으로 학교를 다녔던 기억이 난다. 중학생이라는 어린 나이부터 부모님과 고향에서 떨어져 학교를 다니다보니 집과 고향, 부모님과 가족들이 그리워 향수병에 걸렸다.

타지에서 학교를 다니는 것이 너무 힘들어 고등학교는 강진에 있는 강진농업고등학교에 진학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때 나의 담임선생님은 공부를 잘했던 학생이 시골의 학교로 진학하고 싶다고 고집을 부리자 강진에 계신 부모님을 직접 찾아와 만류할 정도로 나에 대한 기대가 크셨다. 하지만 내가 계속 고집부렸고 결국 강진농고에 진학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이때 강진농고가 아닌 광주의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했더라면 아마 지금과는 다른 나의 인생을 살고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강진농고에 진학하고 1학년과 2학년때 부담임 선생님이셨던 분이 바로 이정섭 선생님이다. 내 인생을 올바르게 살게 해주신 분으로 아직까지 잊을 수가 없는 분이다.

선생님은 첫 인상은 다소 무섭다는 느낌이 들었다. 태권도 유단자셨고 덩치가 커서 주위에서 함부로 범접할 수 없다는 느낌마저 주는 분이셨다. 하지만 실제 겪어본 선생님은 누구보다 마음이 따뜻하고 다정다감한 분이셨다.

당시에 광주의 중학교에서 진학한 학생은 나를 포함해서 전교에 2명이었다. 이 2명이 모두 학교내에서 요주의 인물이었다. 평범하게 학교를 다니고 있던 나에게 어느 날 학교의 한 선배가 나를 불러 책상위에 올라가 무릎을 꿇게 하는 것이었다.

이때 그 선배는 학교내 서클에 나를 가입시키려 했던 것 같다. 나는 모욕이라고 생각했고 복수를 계획했다. 나는 선생님을 찾아가 그 선배와 공개적으로 정정당당하게 싸움을 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 이정섭 선생님
이 때 나는 운동을 해왔었기에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내가 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운동한 사람은 주먹을 함부로 쓰면 안된다”고 말씀하시며 만류했고 나의 복수 계획을 물거품이 됐다.

이후 선생님은 나에게 많은 관심을 가져 주셨다. 당시에 선생님은 강진에서 살고 셨는데 우리 집에 자주 찾아오셨고 나의 형님과 부모님과도 친하게 지낼 정도로 가까워졌다. 어느 날은 선생님이 일본에서 딸기 모종을 구입해서 나의 형님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2학년에 올라가면서 더욱 선생님과 가까워졌다. 2학년 말이 될 무렵 학생회장 선거가 있었다. 원래 강진농고 학생회장 선거는 전교생 모두가 직접 투표에 참여하는 것이 전통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그 해 학생회장 선거는 대의원들만 투표하는 간접투표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 선거에 내가 출마를 했는데 갑자기 선거방식이 바뀐 것은 학교측에서 문제의 소지가 있었던 학생이 회장에 당선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런 소식을 들은 나와 학생들은 분노했고 1학년들은 단체로 결석을 하겠다고 결의를 했다. 이 계획을 선생님에게 논의했고 선생님은 우리를 자제시키면서 학교 교무회의에 우리들의 요구사항을 강력하게 건의해주셨다. 결국 선거는 대의원 선거로 진행됐고 나는 낙선했다.

이때 학교의 모습에 크게 실망한 나는 방황을 하기 시작했다. 사춘기 시절 반항심이었던 것 같다. 3학년 시절 학교에 가지 않고 강진읍내에 졸업한 학교 선배들과 함께 지내며 술을 마시며 지냈다. 나의 이런 모습을 선생님께서 보시고 예의주시하셨던 것 같다.

나는 그때 학교와 가까운 강진읍 동문에서 자취를 했는데 내 자취방과 선생님 집과 불과 500m정도 떨어져 있었다. 내가 방황을 시작한 이후 선생님은 나의 집에 자주 찾아오셨고 나를 선생님 집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선생님 댁으로 찾아가면 선생님과 사모님 모두 친동생처럼 잘 대해주셨다. 이때 따뜻한 대접이 아직도 생각난다.

선생님은 항상 집에서 나를 감시하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몰래 집을 나가면 몰래 나의 뒤를 따라와 가죽장갑을 낀 손으로 뒤에서 나를 깍지를 껴서 잡고 그대로 집으로 끌고 가셨다. 그러고 나서는 집에서 훈계를 하셨다.

당시에는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말을 듣지 않는 학생들에게 매를 드는 것은 일상적이었지만 선생님은 단 한번도 반항하는 나에게 매를 들지 않으셨고 말로서 조용히 타이르셨다. 선생님의 사랑과 관심덕분에 나를 고등학교 시절내내 큰 사고를 치지 않고 무사히 졸업을 할 수 있었다.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가게 됐고 군 제대후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이후 28살 되던 해에 강진으로 내려오게 되면서 다시 선생님을 몇 년만에 만나게 됐다. 원래 선생님은 농촌지도사 출신이셨다.

이때 선생님은 나에게 4H 활동을 권유해주셨고 선생님의 조언대로 나는 고향에서 4H 활동에 적극 참여했고 제29대 4H 강진군연합회장도 하게 됐다. 이후 공직생활도 시작해 20년동안 근무하기도 했다. 나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누구보다 선생님은 기뻐해주셨다.

나는 내 인생의 새로운 출발인 결혼식때 주례를 선생님에게 부탁드렸고 선생님은 승낙하시며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주셨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현재 선생님은 광주에 거주하고 계시고 선생님의 친동생과는 아직도 활발히 교류하며 친하게 지내고 있다. 하지만 먹고 사는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오랫동안 선생님에게 연락을 드리지 못해 죄송스러운 마음뿐이다.
항상 선생님은 나에게 “주먹을 함부로 쓰지 말아라” “자기 마음부터 닦고 성실해야 한다” “무술을 연마한 사람은 주먹이 아니라 마음부터 연마해야 한다”라는 조언을 자주 해주셨다. 본인도 태권도를 배웠기에 더욱 학생들에게 체벌을 하지 않으시고 말로서 훈계를 하셨다.

나도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잘못된 길을 가고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선생님은 내가 올바르고 성실한 인생을 살 수 있도록 해주신 고마운 은인이다.                                                   <정리=오기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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