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초반 인성교육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한 교육 선구자

김희재 전 성요셉여고 교사가 성요셉여고 초대 교장을 지냈던 토마스 아퀴나스 교장에 대해 이야기하며 미소짓고 있다.
1981년 성요셉여고에서 교사생활하며 첫 만남
대학원 진학의 꿈 이룰 수 있도록 적극 지원
학생들 이름 모두 외우며 인성교육 나서
교사들에게도 체벌 금지, 교육 선구자로 존경


나는 강진과 월출산을 경계로 하고 있는 영암군 학산면 독천리에서 태어났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 고향은 낙지와 갈낙탕으로 유명한 곳이다. 어렸을 때 구림초등학교를 다니다가 13살 되던해에 강진군 성전면 금당마을로 이사를 오게 됐다. 강진은 나에게 있어서 제2의 고향이다. 성전중학교와 성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남대학교에 진학했다.

대학 졸업후 화학전공을 살려 여천공단에서 근무를 하다가 나의 꿈이었던 PD를 하기 위해 목포MBC에 입사시험을 보게 됐고 합격해 방송국에서 근무하게 됐다. 이때가 1979년 무렵이었다. 하지만 나의 PD가 되겠다는 꿈은 정권에서 추진한 방송국 통폐합으로 인해 무산됐고 방송국에서 나오게 됐다. 아직도 두고두고 아쉬운 부분이다.

이후 대학교때 교원자격증을 취득했던 것을 살리기 위해 당시 교사가 되기 위해 순위고사를 보게 됐다. 나는 항상 공부에는 자신이 있었고 수백명이 치렀던 시험에서 9명만 합격했는데 당당히 1등을 하게 됐다. 합격자 발표날에 작은 에피소드가 있었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합격자를 보기 위해 나섰고 명단을 아무리 찾아봐도 당연히 합격할 것이라 생각했던 나의 이름이 없는 것이었다. 떨어진줄 알았지만 옆에 있는 친구가 1등해서 좋겠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다시 자세히 보니 명단의 가장 위에 내 이름이 있는 것이었다. 눈이 좋지 않아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처음 목포 덕인고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했고 이후 학교 선배가 있었던 순천상고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그곳에서 6개월정도 생활을 하던중 우연히 성요셉여고에서 교사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당시에 부모님이 살고 계셨던 강진과 가깝고 나도 집에서 가까운 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에 선배의 만류에도 순천상고를 그만두고 성요셉여고로 교사지원을 하게 됐다. 그때가 1981년으로 26살이 되던해였다.

당연히 결혼도 하지 않은 총각이었다. 이때 면접을 담당했던 분이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 교장선생님이셨다. 당시에만 하더라도 외국인이 많이 없던 시절이라 다소 놀랍기도 했다. 교장 선생님은 한마디로 외국인이지만 할머니같은 친숙한 느낌을 주는 분이셨다. 평소에는 교장수녀님이라고 불렀고 사석에서는 교장할머니라고 친근하게 부르기도 했다.

당시 우리나라 사회분위기는 보수적이었다. 성요셉여고는 한창 민감한 시기의 여학생들만 있는 학교에 20대 중반의 총각 선생님이 학교에 부임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내가 면접볼때 학교내 분위기도 어렵다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교장수녀님은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면접을 진행한 후 그 자리에서 나에게 “좋습니다. 함께 근무할 수 있도록 기도하겠습니다”라고 말을 하는 것이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요셉여고 교장
이러한 교장수녀님의 결정은 교내 직원들도 모두 놀라는 것이었다. 이때 나는 종교를 접해본 적은 없었지만 나를 위해 기도해주겠다는 교장수녀님의 말에 감동을 받았다. 이 말이 있었기에 내가 강진에서 터를 잡고 살게 됐던 것 같다.

교장수녀님은 항상 나를 위해 배려를 많이 해주셨다. 나는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기에 교사생활을 하면서도 공부를 계속했고 초창기에는 방송국 PD의 꿈을 버리지못해 시험도 계속 보기도 했다. 서울의 M본부와 K본부까지 합쳐서 총 3번을 떨어지고 나서 꿈을 포기했다. 이후 나는 대학교를 다니며 공부를 계속했고 자격증도 5개나 따게 됐다.
 
이 일은 학교측 배려가 없었다면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대학원에 다니기 위해 수업을 조정해 주말로 수업을 미뤘다. 하지만 토요일도 학교에 출근을 해야했기에 학교의 배려가 아니었다면 다닐 수 없었던 것이다. 교장수녀님은 항상 나의 배우려는 자세를 좋아하셨고 적극 지원해주셨다. 덕분에 국어, 화학, 전산, 전문상담, 전기, 전자 등 다양한 분야 교원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었다.

이때는 지금처럼 주 5일 근무도 아니었다. 항상 오토바이로 출퇴근을 했는데 어느 날 토요일에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모두 퇴근한 오후에 학교에 남아있었다. 교장수녀님이 학교에 남아있는 나를 보시곤 휴일은 가족과 함께 보내야한다며 집으로 보내셨다.

이때 대부분 학교들은 밤늦게까지 야간자율학습을 시키고 주말까지도 교사와 학생들을 붙잡고 공부를 시키던 때였다. 교장수녀님은 항상 나에게 중요한 업무처리들을 맡기곤 하셨는데 그때마다 잘 처리해내는 나에게 5천원씩 봉투에 담아 보너스로 주시곤 하셨다. 항상 마음이 따뜻하고 기존에 우리나라 교육자들과 다른 생각을 갖고 계신 분이셨다.

80년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교육에서 인성교육이라는 단어조차 사용하지 않았던 때였다. 하지만 교장수녀님은 이때부터 인성교육을 항상 강조하셨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잘못을 하더라도 체벌을 하지말고 말로 타이르도록 교사들에게도 말씀을 자주 하셨다. 한번은 한 교사가 학생에게 체벌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시고 갖고 계셨던 카메라로 촬영을 하며 “또 한번 학생에게 체벌을 하면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말하며 체벌을 금지시키기도 했다.

교장수녀님 자신도 수백명이 되는 학생들의 이름을 모두 외우셨다. 이름을 외우시고 어느 학생이 잘못을 저지를 경우 학생의 이름을 부르며 조용히 타이르셨다. 이 때문에 학생들은 체벌을 하지 않아도 교장수녀님을 잘 따랐다. 당초 성요셉여고는 9개 학급으로 늘리려 시도했던 때가 있었다.

이때 교장수녀님은 학생들 이름을 모두 외울수 없다며 반대를 하셨다. 이처럼 교장수녀님은 학생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셨고 누구보다 먼저 국내에 인성교육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했던 선구자적인 분이셨다. 최근들어서 우리나라에서도 이제 인성교육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는 것을 보면 토마스 아퀴나스 교장수녀님은 우리보다 몇십년 앞선 분이셨다.

내가 1981년부터 2014년 퇴직할때까지 34년동안 성요셉여고에서 근무를 했는데 토마스 아퀴나스 교장수녀님의 가르침은 항상 내가 올바른 교사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하는데 나침반 역할을 했다. 34년중에서 초창기 7년간 교장수녀님과 함께했다. 전체 시간으로 보면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교육자로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있고 아직도 가끔씩 그립기도 하다.
 
토마스 아퀴나스 교장수녀님은 80년대 후반에 2대 이경민 교장수녀님에게 인계인수를 하고 미국으로 돌아가셨다. 추후 교장수녀님에게 왜 강진에 학교를 세웠는가에 대해 물은 적이 있었는데 교장수녀님은 다산 정약용의 고장에 학교를 세워 참된 교육을 하고 싶었다는 대답이 아직도 기억난다.  <정리=오기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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