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릉은 문림옥향과 풍요, 좋은 인심 상징

책자, 학교이름, 문화행사등에 광범위하게 사용
1973년 시작된 ‘금릉문화제’ 주민들의 압도적 찬성으로 이름정해

조선시대 강진사람들의 사마시합격자 이름을 적은 이 책의 이름은 금릉사마안이다.
강진사람들의 금릉(金陵)에 대한 애착은 다양한 분야에서 나타난다. 강진유림회관에는 금릉사마안(金陵司馬安)이라는 작은 책자가 전해온다.
 
1809년(순조 9년) 강진지역 인사들중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이나 진사가 된 인사들의 명단을 적은 책이다. 당시 강진의 지명은 도강(道康)이였으나 책이름을 도강사마안이라고 하지 않고 금릉사마안이라고 지었다.

임진왜란의 명장 양건당 황대중 장군의 문집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양건당 문집속에 임진왜란당시 강진의 유력인사들이 군대를 일으켜 국왕을 호위하고 조선의 사직을 지키기 위해 뜻을 일이킨 사람들의 명단을 기록한 부분이 있다. 이 부분의 이름이 ‘금릉창의록(金陵倡義錄)’이다. 이 역시 금릉이란 별호를 사용하고 있다.

이를 보면 전 조선시대에 걸쳐 금릉이란 별호가 광범위하게 사용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중앙정부와 주고받은 공식문서에는 도강이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니까 강진에서 만든 기록이나 강진에서 통용되는 기록에는 다양하게 금릉이란 별호를 사용했던 것이다.

강진읍 보은산에서 바라본 강진의 전경이다. 강진만 바다가 깊숙히 들어오고, 들판이 많았던 강진은 풍요롭고 인심좋은 고장이다.
금릉이란 명칭은 근현대들어서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오히려 더 많이 사용됐다는게 맞을 것이다. 1905년 지금의 관서재에 전남에서 최초로 설립된 근대식 사립학교 이름이 금릉학교였다. 금릉학교는 1911년 강진공립보통학교로 전환된다. 강진중앙초등학교의 전신이다.

또 1941년 설립된 중학교는 금릉중학교였고, 1962년 개교한 성요셉여고는 개교 당시 학교명칭이 성요셉 금릉여자가정고등학교였다. 성요셉금릉여자고등학교의 명칭은 2002년까지 사용되다가 성요셉여자고등학교로 바뀌었다.
 
62년 당시 외국의 수녀회가 강진에 학교를 세우면서 왜 굳이 금릉이란 명칭을 사용했는지 알 수 없다. 아마 당시에 금릉이란 명칭은 외국인들이 보기에도 강진사람들의 생활속에 가장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이름으로 보였던 듯 싶다.

강진사람들은 이렇듯 자녀들을 가르키는 교육기관에 금릉이란 이름을 붙임으로서 그 의무를 확실히 부여하고 있다.

강진주민들의 금릉에 대한 의미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는게 금릉문화제일 것이다. 금릉문화제는 1973년 시작됐다. ‘강진군정50년사’에 따르면 당시 많은 사람들의 중지를 모으기 위해 전 주민들 대상으로 문화제 명칭을 공모했다.

그 결과 금릉으로 하자는 의견이 절대적으로 많이 나와 문화제의 명칭을 금릉문화제로 결정했다. 초창기 명칭은 강진군민의날 및 금릉문화제였으나 1990년 이 행사를 아예 금릉문화제로 바꾸어 버렸다. 금릉문화제 행사의 의미에 대해 강진군정 50년사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문림옥향 강진을 대내외에 선양하고, 탐진강 젖줄기에 오곡백과가 풍요로운 살기좋고 인심좋은 우리고장을 가꾸는 맥락으로 이어져 가고 있다.’

우리 강진사람들이 금릉이란 명칭에 담고자 했던 뜻과 의미를 알 수 있는 문구다. 금릉은 강진사람들에게 문림옥향과 풍요, 좋은 인심을 상징하며 수백년 동안 내려왔던 것이다. 그럼 금릉은 왜 강진의 별호가 됐을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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