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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 없는 그사람]최재남 강진향교 전교편.벽산 김창식 선생“통일 포기하지 말고 항상 통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오기안 기자  |  ju@nsor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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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5.10  17:4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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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남 강진향교 전교가 젊은 시절 인연을 맺었던 벽산 김창식 선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새마을금고연합회 활동하며 첫 만남
금릉중학교 초대 교장으로 교육발전 기여
강진의료원과 군립도서관 유치 노력
통일문제와 해외정세 중요성 강조


나는 칠량면 영복리 만복마을이 고향이고 현재는 강진읍 평동마을에 거주하고 있다. 지난 3월 30일에는 영광스럽게도 강진향교 제52대 전교로 취임해 우리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고 사회의 교육기관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내가 20대였던 60년대 후반에는 농촌에 살기 때문에 농사꾼으로서 벼농사를 지어왔고 농어촌독서운동과 새마을금고 운동에 활발히 참여해왔다. 이때만 하더라도 전국에서 새마을운동이 진행중이었던 때였다. 농촌인 강진의 발전을 위해 사회운동에 적극 동참했던 기억이 난다. 또 1993년부터 97년까지 강진문화원의 사무국장으로도 활동하기도 했다.

내 인생에 있어서 잊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벽산 김창식 선생님이다. 김 선생님과 인연은 내가 새마을금고 운동에 뛰어들면서 시작됐다. 나는 1968년부터 1976년까지 약 8년동안 새마을금고연합회 강진군 사무국장으로 일했다. 이때 김 선생님이 지부회장을 맡고 계셨다.
 
회장과 사무국장으로서 처음 만났지만 김 선생님은 누구보다 마음이 따뜻하고 강진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선생님의 첫 느낌은 부드러운 인상을 갖고 계셨지만 평소에는 다소 엄한 분위기도 있었다. 이 때문에 누구나 함부로 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갖고 계셨다.

함께 일을 하면서 평상시에도 자주 집을 왕래하며 친분을 쌓았다. 항상 비가 오거나 시간이 날때면 선생님은 나를 집으로 부르시면서 라면을 사오라고 하셨다. 라면을 2봉지를 사서 가면 1개만 사도 충분한데 2개를 샀다며 나무라셨다. 라면 1개를 끓여서 밥을 말아서 나와 함께 나눠 드셨다.

밥을 다 먹고 난 후에는 나에게 오늘 나온 신문기사 중에서 중요한 내용이 있다면 읽어봤느냐고 항상 물어보셨다. 읽어보지 못했다고 하면 스크랩한 신문을 보여주시며 나에게 읽어보라고 하셨고 읽고 나면 내용에 대해 자세히 질문을 던지곤 하셨다. 내가 답변을 잘하면 나이가 어린데도 답변을 잘한다고 칭찬하시며 본인과 대화를 할 수 있겠구나라며 좋아하셨다.

   
벽산 김창식 선생
당시에 선생님은 보성전문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의 대학에서 언론을 전공하셨던 분이셨다. 당시에만 하더라도 학교에 다닌다는 것 자체가 어려웠기에 일본에서 대학까지 졸업한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나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즐거우셨던 선생님은 자주 나를 부르셨고 집안에 도와줄 일이 있을 때에도 나를 부르셨다. 일본의 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한 선생님은 합동통신의 창립을 주도하셨고 조사, 문화부장을 맡으셨을 정도로 뛰어난 분이셨다.

선생님이 강진에 정착하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6.25 전쟁이 터지면서 부산으로 피난을 오셨고 이후 여수를 거쳐 강진으로 오게 됐다. 선생님이 강진에 자리를 잡으면서 여러 가지 굵직한 일들을 해내셨다.

그중 하나가 바로 학교설립이었다. 지역의 한 유지가 학교를 세우겠다고 제의를 하면서 선생님에게 행정적인 업무를 해달라고 부탁하셨다. 이때 정부가 부산에 있던 시절이라 선생님은 부산으로 향했고 학교설립의 뜻을 전했다. 하지만 정부 담당자는 몇 달이 지나도 허가를 내주지 않았고 정황을 살펴보니 담당자가 돈을 요구했던 것이었다. 이때만 하더라도 깨끗하지 못한 사회였다.

이 같은 뜻을 지역의 유지에게 전했고 학교가 설립될 수 있도록 행정적인 절차를 진행해 주었다. 그 학교가 바로 성요셉여고의 전신이었던 금릉중학교였다. 학교 설립을 위한 재단 금릉의숙이 설립됐고 이후 금릉중학교가 세워졌다. 이때만 하더라도 남녀공학이었고 선생님이 바로 초대 교장으로 부임했다. 이후 여자중학교로 바뀌었고 성요셉여자고등학교로 바뀌었던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라 현재 읍내 중심가에 있는 강진군립도서관도 선생님 덕분에 강진에 세워졌다. 당시에만 하더라도 군단위에 도서관이 거의 없었던 시절이었다.
 
전라남도에 3개정도 도서관이 세워지는데 선생님이 적극 유치한 끝에 3개중 하나가 바로 강진으로 오게 됐다. 또 도립병원인 의료원도 순천과 강진에 세워지게 된 데에도 바로 선생님의 공이 컸다. 강진의료원이 강진에 처음 세워지면서 선생님이 초대 서무과장을 맡기도 했다.

강진문화원도 선생님의 손길이 닿았다. 강진문화원 설립에 참여해 주도적인 역할을 하셨고 초대 문화원장을 맡아 지역 문화발전을 위해서도 많은 일들을 해내셨다.

선생님은 항상 나에게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셨다. 새마을금고 운동을 하던 당시에 나에게 “상을 받을 일이 있으면 자신보다는 실무직원들에게 공을 전하고 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라고 말씀을 하셨다.
 
자신보다는 실질적으로 일을 하고 있는 후배들이 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하면서 사기진작의 효과를 거둔 것이다. 이 말씀을 본받아 나도 사무국장으로 활동하던 당시에 직원들에게 중앙회장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이런 점은 후배들에게 훌륭한 선배로서 본을 보이셨던 것이다.

또 선생님이 일본의 대학에서 공부를 하셨는데 그때만 하더라도 해방한지 얼마되지 않았던 때라 주변에서 친일파라고 비난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일본의 훌륭한 부분은 반드시 받아들여야 한다. 중국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면 영원히 속국이 된다”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일본에서 공부하면서 느꼈던 점이 일본에는 중공문제 연구기관이 있어 중국에 대한 연구결과물을 정기적으로 발표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해주셨다.

금릉중학교 교장으로 재직할 때 학생들의 면접을 직접 보셨다. 이때 학생들에 공부나 실력보다는 이름, 성씨, 본관, 아버지와 외갓집 등을 물어보셨다. 나중에 학생들이 졸업할 때쯤이면 학생들 모두의 이름을 직접 부르시며 졸업을 축하해주셨다. 이 모습을 보고 대단하다는 점을 많이 느꼈다.

나중에는 강진의 민방위훈련 강사로도 활동하셨는데 항상 교육때마다 “통일에 대해 포기하지 말고 노력해야 한다”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이 말씀은 최근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미래를 내다볼 줄 아시는 분이셨던 것 같다.    <정리=오기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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