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준/강진군청 친환경농업과

꾹꾹 눌러 쓴 이름 세 글자에 수많은 감정이 담겨 있다. 가난에 쫓기고 살아가느라 바빠 끝내 못 이룰 줄로만 알았던 배움의 꿈은 황혼을 훌쩍 넘긴 나이 마침내 가장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꽃을 피워 낸다.

강진 24개 마을의 회관은 일주일에 두 번씩 학교가 된다. 학교에서 한글을 배우는 나이 드신 350여명의 어머니들, 배움의 열정을 불태우며 학업에 매진하는 이 특별한 학생들은 다름 아닌 ‘찾아가는 여성농민 한글학교’ 학생들이다.

‘찾아가는 여성농민 한글학교’는 6명의 선생님이 24개의 마을을 돌며 학생들을 가르친다. 과목은 한글, 산수, 음악 등으로 모두 시골 실정과 어머니의 눈높이에 맞춰 자체 제작 된 교과서로 수업을 한다.
 
또한 1월 입학식 후 봄소풍, 가을 운동회, 졸업식 등 다양한 행사와 프로그램도 운영해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어머니들에게 새로운 경험과 추억을 만들어 준다.

강진군은 농촌의 고령화로 노인들의 사회참여 기회가 상실되고, 고립되기 쉬운 환경적 열악함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이 같은 ‘찾아가는 여성농민 한글학교’ 수업은 못 다 이룬 배움의 꿈을 실현시켜주는 것은 물론 어르신들의 정신 건강을 비롯 노인복지 기능을 수행하는 교육의 장이 돼 준다.

어떻게든 글을 읽고 쓰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한글학교에 입학한 어르신들은 노년의 열정을 불태우며 학구열을 보여준다. 맞춤법도 틀리고 삐뚤빼뚤 휘어진 글씨체이지만 진심이 담긴 따뜻한 편지를 손자, 손녀들에게 보낼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고맙고 기쁘게 생각한다며 웃음꽃 만발이다.

우리 어르신들은 대부분 일제 강점기를 지나 전쟁과 가난으로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세월을 견뎌왔다. 그나마 살림이 넉넉한 집은 자식들 중 하나를 골라 학교에 보내기도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장남 몫이거나 아들 중 ‘될 놈’, ‘여문 놈’의 몫이었을 것이다.

65세 이상 여성 농민 중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분이 무려 85%이다. 사리 밝고 똑똑하더라도 여자들의 몫이 아니었던 배움과 교육의 기회, 그저 살림을 배워 시집이나 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시대의 분위기에 휩쓸려 이름조차 잊고 사신 어르신들에게 ‘찾아가는 한글학교’는 삶을 바꾸는 기폭제가 돼 준다.

어르신들에게 있어 한글 공부는 단순한 학업의 의미가 아니다. 이제껏 막연한 두려움으로 당당하게 맞서지 못한 세상과 소통을 시작하는 첫 걸음마이며, 언제나 모든 기회의 후순위로서 생을 살아가는 내내 돌덩이처럼 마음에 품고 있던 아쉬움을 해소하는 버킷리스트이기도 하다.

학교부지는 없지만 학생 수는 많은 학교. 배움의 때를 놓쳤지만 늦게나마 못 배운 설움을 푸는 자리에 모인 어르신들은 서로가 서로의 힘이 되어주며 끝까지 공부를 마치기를 독려한다.

글씨 쓰는 일이 너무 신경 쓰여 혈압이 올라 힘든 분은 수업시간에 나와 그냥 누워서 수업하는 소리만 들으라고 말씀드린다. 듣지 못하시는 분에게는 그림책을 드리고, 잘 안 보이는 분에게는 작은 돋보기를 드린다. 얼마나 많이 아는지 얼마나 빨리 배우는 지는 중요치 않다.

시작이 반이라는 마음으로 함께 모여 한 글자 한 글자 소중히 깨우치는 수업시간을 보내고 있다. 포기하지 않고 도전을 이어가는 어르신들을 응원한다. ‘찾아가는 여성농민 한글학교’를 통해 여성 농민 어르신들의 남은 나날들이 더욱 크고 아름다운 결실을 맺는 날들이 되기를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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