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열린 제20회 금릉문화제 입장식 광경이다. 왕의 행차를 재현한 듯한 행렬이 행사장으로 들어오고 있다. 강진사람들은 오래전부터 금릉이 한 부족국가의 도읍이었다는 의식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고려시대부터 사용했던 별호인 듯

도읍지라는 의미 강해

강진은 어느 소국가의 도읍지였을까

금릉(金陵), 이름만 들어도 호사스러워 보인다.

금릉은 강진의 별호(다른 이름)였다. 언제부터 강진이 금릉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다.
 
조선왕조 세종실록에 금릉이란 명칭이 처음 등장한다. 지리지 전라도 나주목에 ‘도강의 별호는 금릉이다’라고 적었다. 도강(道康)은 고려시대 태조 23년(940년)부터 조선 태종 17년(1417년) 강진현이란 이름을 얻기까지 500여년 동안 사용했던 우리지역의 지명이다.

금릉이란 별호가 도강이 태어날때부터 사용됐다면 그 역사는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940년은 막 고려청자가 강진에서 생산 되기 시작할 무렵이다. 고려청자는 1200~1300년까지 최고 전성기를 구가했다. 혹시 금릉은 청자와 관련있는 지명은 아니였을까. 물론 추정일 뿐이다.

금릉이란 지명은 흔한 지명이 아니다. 자료를 찾아보면 경상북도 김천시가 오래전에 금릉이란 지명을 가지고 있었던게 국내에서 유일하다. 또 금릉은 중국의 오랜 수도였던 남경의 옛 이름이었다.

남경은 춘추시대 오ㆍ월ㆍ초나라 때까지 금릉으로 불리다가 다시 건강으로 바뀐 후 청나라 들어 다시 금릉으로 불리었다. 금릉은 이 때문에 도읍이라는 이미지, 수도라는 이미지, 살기좋은 곳, 부자인 지역이라는 이미지가 짙게 풍긴다.

조선왕조실록에 금릉과 강진을 연관해서 설명한 기록은 세종실록 외에는 없다. 공식 국가 문서에 금릉이란 명칭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금릉이란 명칭은 오랫동안 지역내에서 다양하게 사용되며 강진사람들의 가슴속에 흘러내려온 이상향 같은 지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작천의 박병채(76)씨가 소장하고 있다가 지난 3월초 강진군에 기증한 읍지의 이름은 금릉읍지(金陵邑誌)였다. 이 책은 1896년경 필사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기록을 보면 국가문서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금릉이란 지명은 읍지에 사용할 정도로 지역내 공식적인 문서에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회(景晦) 김영근(1865∼1934) 선생이 강진의 빼어난 경치 8곳을 노래한 한시의 이름도 ‘금릉팔경(金陵八景)’이었다.

월출산의 오래된 관광지 경포대의 정확한 명칭은 금릉경포대이다. 금릉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강진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됐던 지명이였던 것이다.

한 가지 관심을 끄는 것은 경남 김해시에도 금릉팔경(金陵八景)이란 한시가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강진의 금릉팔경이 지어지던 때와 비슷한 시기인 조선말에 나온 한시다. 김해는 금관가야의 수도였다.

김해시에서 전해오는 금릉팔경은 옛 금관가야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이다. 금릉은 이렇듯 도읍을 지칭하는 깊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강진의 별호가 금릉이라 칭했던 것은 강진이 옛 어느 나라의 도읍이 아니였겠는가하는 추정이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신라의 도읍이 금성이였듯이, 금릉은 삼국 이전에 많았던 어떤 나라의 도읍이 아니였겠느냐는 것이다.<계속> 

 

저작권자 © 강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