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두달전‘그일’없었다면 금호아시아나도 없었다

강진경찰서 박인천 교통과장,“일본 패망”중얼거리다 파면
두달 후 해방, 파면 덕분에 반민족특위 친일파 단속 피해
강진에서 쌀 44가마 돈 빌려 광주서‘광주여객자동차’창업


박인천
해방되기 직전인 1945년 5월 어느날 강진경찰서 정원의 나무 아래에 있는 한 의자. 고참으로 보이는 한 경찰관이 신문기사를 읽으면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신문에는 태평양 전쟁에서 연패하고 있는 일본군의 상황을 긴급하게 전하고 있었다. 이 경찰관은 신문에서 눈을 떼지 못한채 혼자서 중얼거렸다.

“음~ 이러다가 일본이 정말 패망하는거 아니야”
그런데 그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일본인 형사가 우연히 듣고 말았다. 이 일본인 형사는 자신이 보고 들은 내용을 즉각적으로 상사하게 보고했다.
 
일본이 망할지 모른다고, 다른 사람도 아닌 경찰이 중얼거린 것은 지나칠 수 없는 ‘망언’이었다. 며칠후 그렇게 말한 경찰관은 현직에서 쫒겨나고 말았다. 일경은 이 사람을 파면하면서 “이 정도로 끝내는게 다행인지 알라”고 겁박했다.

당시 경찰에서 쫓겨난 사람이 바로 금호그룹 창업주 박인천(1901~1984) 선생이었다. 4월 7일은 금호그룹 창사기념일이다. 대기업으로 성장한 금호그룹은 알려진 데로 창업과정에서 강진과 많은 인연이 있었다. 그 이면에 아주 극적인 일이 있었다는게 최근 알려져 창사기념일을 앞두고 고개를 돌리게 한다.

박인천 선생은 경찰에서 쫒겨난후 갑자기 직업이 없어져 많은 낙담을 했다고 한다. 나주시 죽포면 출신이지만 강진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그는 장남인 성용씨가 강진중앙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갑작스런 실직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일경에 들어간 후 주로 교통분야에서 일했다. 당시 강진경찰서에는 형사과와 교통과가 있었는데, 형사과는 일본인 경찰들이 독차지해서 조선인들은 주로 교통과에 배치됐다고 한다.

그런데 박인천 선생이 파면당 한 후 2개월만에 일본은 실제로 패망하게 된다. 일본이 떠나자 국내에서는 반민특위를 통해 일제에 협력했던 사람들에 대한 대대적인 색출작업이 진행됐다. 그중에서도 경찰이었던 사람들은 우선적인 처벌 대상이었다. 일경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줄줄이 재판을 받고 교도소로 갔다.

박인천 선생이 강진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 처음으로 구입한 1935년형 포드승용차 모습.
그러나 박인천 선생은 단속대상에서 거짓말 처럼 제외됐다. 해방되기 전 일제에 의해 파면당한 경찰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제에 협력한 사람이 아니라 이유야 어쨌든 일제에 의해 핍박받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기가 막힌 순간이었지요. 그때 반민특위에 잡혀 들어갔더라면 광주고속을 만들 생각은 꿈에도 못했을 것입니다”

박인천 선생은 생전에 김식 전 농림부장관과 교류했다. 그는 김 전장관을 만나면 당시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주면서 “해방전에 파면된 것은 하늘이 금호그룹을 만드라고 등을 떠밀어준 것”이라며 크게 웃었다고 한다.

반민특위의 단속대상에서 벗어난 박인천 선생은 곧바로 사업을 준비했다. 그는 일경에서 오랫동안 교통과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그가 관심을 가진 분야는 운송사업이었다. 그러나 돈이 없었다.

1935년형 포드승용차 모델이 금호아시아나 사무실이 있는 광주 유스퀘어 건물에 전시돼 있다.
그가 찾은 사람은 강진읍 목리의 갑부 유재의 선생이었다. 박인천 선생은 강진경찰서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면서 강진의 유지들과 유대관계를 잘했다고 한다.

유재의 선생이 쌀 44가마 값을 빌려 주었고, 그밖의 강진의 유지 몇몇이 십시일반해서 사업자금을 마련해 주었다.
 
박인천 선생은 이 돈을 가지고 광주로 올라가 1946년 4월 6일 광주광역시 동구 황금동에 사업장을 내고 자본금 17만원으로 1935년형 포드 5인승과 1933년형 내쉬 등 두 대의 중고택시를 구입해 운송사업을 시작했다. 그의 나이 46세때였다.

박인천 회장의 사업은 승승장구한다. 몇년 후 유재의 선생은 사망하고 60년대말 장남 유수현씨가 박인천 회장측으로부터 제안을 받는다.

초기 투자해준 자금을 갚고 싶은데 학교를 받을 것인지, 운송회사를 받을 것인지 선택을 하라는 것이었다. 유수현씨는 학교보다는 운수회사가 사업성이 크다고 보고 서울에서 50여대의 버스를 소유하고 있는 삼양여객을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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