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친 차문영선생, 뉴욕 맨하탄서 도자기샵 열여 큰 성공

<빅터 차의 가족이야기1(2017년 12월 14일자)>이 보도된 이후 2편은 언제 나오느냐는 문의를 많이 받았다. 빅터 차가 주한대사로 부임해 오면 게재하기 위해‘아껴’놓았는데 아쉽게도 그는 오지 못했다. 그래서 빅터 차 아버지의 이야기를 강진 역사의 한편으로서 설 명절에 함께하기로 했다. /편집자 주.

<빅터 차의 가족이야기1 요약>
주한미국대사로 내정됐던 빅터 차는 미국에서 강진출신인 아버지 차문영(1932~2005)씨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성장해서는 역시 강진출신 김식 전 농림부장관의 딸과 결혼했다. 차문영씨는 1932년 군동면 평리에서 차종률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차종률씨는 해방 후 가족들을 데리고 서울로 이주해 서울 종로에서 남양호텔이란 숙박업을 했다. 차문영은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21세때 미국 유학길에 올라 미국에서 명문 컬럼비아대학에 합격해 그곳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위를 마치고 1961년 한국에서 공직생활을 하겠다는 마음으로 귀국했지만 당시 상황이 좋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군대에 다녀오지 않은 공직자들을 퇴출시키고 있는 시기였다. 부친의 남양호텔 경영을 놓고 고민하던 차문영 선생은 결국 미국행을 다시 선택했다. 그가 내린 결정은 미국에서 사업을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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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터차의 부친 차문영 선생이 40년 동안 도자기류 가게인 아시안하우스를 운영했던 뉴욕 맨하탄 57가 5애비뉴거리(좌측)와 아시안하우스 건물 모습이다.
빅터 차가 주한미국대사로 내정됐을 때 필자는 강진읍에서 만난 그의 장인 김식 전 장관에게 미국의 빅터 차 가족들이 모두 오는 것이냐고 질문한 적이 있다.

김식장관은 “빅터 차가 내정된 직 후 가족회의를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이들이 아직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았기 때문에 딸이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생활하기로 했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가족회의까지 거치면서 아버지의 고향에서 대사생활을 준비했던 빅터 차의 내정 철회는 그만큼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빅터 차의 부친이 자식들을 낳고 교육시킨 미국에서의 삶을 살펴보면 빅터 차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큰 흔들림없이 미국사회에서 한반도 전문가로서 큰 역할을 할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한다. 부친 차문영씨의 삶은 도전과 개척의 연속이었다.

빅터 차는 정치학자로 대성한 사람이지만 그의 집안은 사업가 성향이 뚜렷했다. 빅터 차의 조부인 차종률선생은 군동면사무소앞에서 장사를 하다 서울로 이주해 종로에서 남양호텔이란 대형 숙박업을 했다.

큰할아버지인 차종채선생은 강진에서 미곡상회와 해운업 등으로 큰 돈을 모은 사업가였다. 차문영씨 또한 사업가의 길을 걸었다.

차문영은 한국에서 경기고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컬럼비아대학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차문영은 운명적으로 상인의 길을 걷게 된다. 처음에는 억지로 걸었지만 나중에는 천부적인 기질로 걸었다.

<미주 한국일보>등의 보도에 따르면 당시 대부분의 유학생들이 공부가 끝나면 학위를 얻어 본국으로 돌아가 학계나 공무원으로 진출하는 경우가 많았다. 미국에 잔류하는 측은 전공과 관련된 분야의 연구소로 들어가는 것이 그 당시로선 대세였다.

차문영 역시 학위를 받은 후 귀국해서 공직의 길을 걸고자 했으나 군대에 다녀오지 않은 경력이 큰 장애물이 되었다. 그래서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사업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차문영이 맨하탄에 가게를 연게 1961년이었다. 기프트샵이라 해서 일종의 선물가게였다. 위치는 맨하탄 57가 5애비뉴와 6애비뉴 사이에 있는 240스퀘어피트의 작은 공간이었다.

차문영이 뉴욕 한복판에서 선택한 취급품목은 동양제품이었다. 한국산 자개와 일본산 도자기, 중국산 병풍 등이 그의 좁은 가게에 자리를 잡았다.

차문영은 동양 도자기류를 뉴욕에서 취급함으로서 미국 상류층에 나름대로 독특한 상품을 판매하겠다는 야심에 불타고 있었다. 그러나 처음 그가 취급한 도자기, 자개, 병풍 등 품목은 문화재에 가까운 수준높은 상품이어서 일반 대중들에게는 어필하지 못하는 품목이었다.

장래성이 잘 보이지 않는 가운데 그가 우연히 착안한 품목은 동양식 램프였다. 램프의 몸통은 화려한 문양의 동양 화병에 갓은 미국제를 얹고 받침대는 중국제 나무를 조립한 훌륭한 동양램프가 출현했다.

맨하탄의 일류백화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상품으로 특히 실내장식가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창업 3년만에 길 건너에 3배가 넘는 점포를 새로 열었고 65년 23가 3애비뉴와 67년엔 58가 3애비뉴에 네번째 스토어를 열었다.

1960년대 말 들어 차문영에게 대박을 칠 기회가 왔다.  당시 미국은 조용히 중국과 수교를 준비하고 있었다. 공식수교는 1979년에야 이뤄졌지만 미중수교는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된 수교였다. 김식 전 장관이 사돈인 차문영씨에게 직접들은 이야기다. 차문영에게 어느날 홍콩을 통해 중국에 들어갈 기회가 왔다.

중국에서 그의 눈에 확 들어온게 전통 도자기였다. 그는 중간상인을 통해 많은 돈을 주고 닥치는데로 중국도자기를 사들였다. 컨터이너 수십개 분량을 수집했다. 그는 컨테이너를 배편에 싣고 미국으로 가져 왔다.
 
컨테이너 안에는 모조품이나 상품성이 전혀 없는 도자기가 수두룩 했다. 그러나 그중에 청나라 진품 도자기가 곳곳에 박혀 있었다. 미국에서 감정한 결과 중국 국보급도 수점 나왔다. 차문영은 그때 가져온 중국도자기를 다시 매장에 진열해 말그대로 떼돈을 벌어 들였다.       

차문영은 연간 수백만 달러의 매상을 올렸고 생활이 안정되자 60년대 말 한인사회에도 관심을 보였다. 그가 졸업한 경기고 동창회장, 뉴욕한인골프회장, 뉴욕한인회 이사로 참여하다가 이사장을 맡아 한인회 살림을 책임진 적도 있었다.

그의 아들 빅터 차는 2004년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아시아담당 국장으로서 부시대통령을 보좌해 백악관 근무를 한 적도 있었다. 그 무렵 차문영은 주변 사람들에게 “아들 녀석이 백악관에 들어가는 모양이다. 백악관에서 신분조회가 왔다”며 대견해 했다고 한다.

차문영은 과거 자신이 접었던 전공을 살려 대신 아메리칸 드림을 성취하고 있는 아들에 대해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차문영은 2001년까지 40년간 맨하탄에서 점포를 운영하다가 2005년 미국에서 타계했다.

차문영 선생이 아들 빅터 차의 주한미국대사 내정 철회를 매우 아쉬워할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가 미국사회에서 세운 금자탑은 빅터 차를 비롯한 수 많은 이민 2세들에게 큰 용기와 희망을 주고 있는 것은 확실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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