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설날 연휴 한파주의보, 4,000여명 강진읍~마량서 발 묶여

당시 강진군 공무원들 비상근무, 완도 귀향객들에 떡국, 라면 제공

70년대 후반 설 명절에 서울에서 출발하던 광주고속의 모습이다. 귀향객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지금은 고금도나 약산으로 가는 귀향객들이 모두 다리를 이용하지만 20여년전까지만 해도 모두 마량항에서 배를 타야 했다. 명절이면 마량항을 통해 인근 고금도에서부터 약산, 금일도로 들어가는 귀향 인파가 2~3만명을 헤아릴 때였다. 그래서 설 연휴에 한파라도 닥치면 꼼짝없이 발이 묶이곤 했다.

지금도 강진 사람들의 기억속에 남아 있는 것은 1994년 초 설 연휴때의 일이다. 그해 설 연휴는 2월 9일(수), 10일(목), 11일(금)요일이였다. 추운날씨였다. 토요일이 지금처럼 휴일은 아니였지만 대부분의 직장들이 5일씩 휴가를 줘서 귀성객들이 역대 최대인파를 보였다. 9일이 되면서 강진에도 아침부터 밀려드는 차량들로 온 거리가 북적거렸다. 

그런데 9일 오후가 되면서 한파주의보가 내려졌다 마량항의 뱃길이 그날 오후 끊겼다. 그날 오후 4천여명이 일시에 마량으로 밀려 들어왔다. 밀려드는 차량행렬이 마량면소재지를 채우고 대구면사무소 앞에까지 꼬리가 이어졌다. 설 대란이었다.

당시 박재순 군수가 전 공무원 소집지시를 내렸다. 마량항에 임시사무소가 차려졌다. 우선 시급한게 차속에 갖힌 사람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박 군수는 공무원들에게 강진에 있는 모든 떡국을 수집하라고 했다. 공무원들이 집에서 설날 끓여먹기 위해 만든 떡국을 기본만 남기고 모두 가지고 나왔다.

강진읍내 방앗간을 모두 뒤져 떡국을 사서 모았다. 그것으로 부족해서 강진은 물론 인근 장흥과 영암의 모든 라면을 구입해 오게 했다. 강진의 부녀회들이 최대한 동원됐다. 설날 제사음식을 장만하던 부녀자들이 그릇과 기본반찬을 가지고 마량과 대구쪽으로 모였다. 5천명 넘는 사람들에게 떡국과 라면이 제공됐다.

담요를 구하는 것도 문제였다. 박 군수가 대책을 마련했다. 마침 강진 영암 장흥의 민방위물품 창고가 강진에 있었다. 그곳을 파악한 결과 담요 500장이 있었다. 박 군수는 그것을 귀향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오후 늦은 시간이 되면서 기름이 떨어져 더 이상 히터를 켤 수 없는 차량들이 속출했다. 사람들이 추운 겨울밤을 보낼 수 없었다. 박 군수는 차에 기름이 떨어진 사람들이 공무원들의 집에서 잠을 잘 수 있도록 최대한 주선을 했다. 박 군수도 두 가족을 군수 사택으로 데리고가 잠을 재우고 자신은 군수실에서 새우잠을 잤다.

설날인 다음날도 한파주의보는 꺾이지 않았다. 설날 아침에도 떡국이 제공됐다. 발이 묶인 귀향객들은 차에서 멀리 있는 고향을 향해 차례를 지냈다.

대낮이 되어도 한파주의보가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귀향을 포기하고 서울로 돌아갔다. 담요를 회수했다. 500장중에서 회수되지 않은 것은 30여장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강진군청 공무원들이 설연휴동안 귀향객들을 뒷바라지 하느라 연휴를 포기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강진군청 군수실에 전국에서 편지가 폭주하기 시작했다. 그때 그 사람들이었다. “그때 강진군의 배려를 잊을 수 없습니다” “군수님, 어떻게 그 많은 떡국을 마련하셨어요” “우리가족 잠을 재워주신 000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따끈한 강진의 인심에 놀랐습니다” 모두 감사와 인정이 넘쳐나는 편지들이었다.

아마도 요즘시대 같으면 강진군청 인터넷 홈페이지가 다운됐을 정도였다고 한다. 박 군수는 이들에게 일일이 답장을 써주며 다시 한번 강진의 따뜻함을 전했다. 훗날 박재순 군수는 완도군의회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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