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승 회장 설맞이 특별기고

‘어서 오니라’손 잡아주던 어머님 목소리 생생
삶이 힘들 때, 결단이 필요할 때 늘 고향 생각


박재승 회장
올 겨울은 유난히 춥고 눈이 많이 내리고 있다. 눈이 오는 날이면 나의 마음은 언제나 고향 성전 오산마을에 가 있다. 마을앞에 다랑치 논들이 즐비했다. 겨울이면 논에 물이 고였다. 얼음이 얼지 않은날이 없었다.
 
친구들과 썰매를 만들어 하룻네 얼음위에서 놀았다. 그러다가 물에 풍덩 빠졌다. 어머니가 해준 솜옷이 물과 진흙으로 뒤범벅이 됐다. 그럴때 마다 어머니는 작은 꾸중만 하시고는 솜옷을 빨아 말리고 다려서 다시 입혀주시곤 했다.

설날이면 온 동네가 잔치였다. 아버님께서는 삼형제 중 막내셨다. 한마을에 있던 큰댁으로 가서 설을 쇘다. 큰댁에 모이면 집이 모자랄 정도로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남자들이 쑥떡하느라 매질을 하는 소리, 담장밖으로 흘러나오던 전 부치는 냄새…. 내 나이 벌써 팔순이 다됐지만 그때만 생각하면 마치 소년의 마음처럼 가슴이 설레인다.

설날이면 동네 사람들이 연장자 집을 찾아다니며 세배를 했다. 어머님은 손님이 올때 마다 푸짐하게 상을 차려 냈다. 그렇게 친인척들을 만나다 보니 조금 먼 친척이라 해도 얼굴을 잊어버린 적이 없었다.

나는 요즘 그런 문화가 그립다. 수백년 이어온 전통이 내 대에서 사라지나하는 생각을 하면 조상님들께 죄송스런 마음 금할 수 없다.

나는 고향에서 중학교까지 졸업했다. 초등학교는 성전초등학교를 다녔다. 일제 강점기때였다. 해방후에는 집에서 가까운 수암초등학교로 옮겨서 다니다가 그곳에서 졸업을 했다.

고등학교를 광주에서 다녔는데 명절때 집에 올 때마다 큰 고생을 하곤 했다. 명절 대목이 되면 광주버스터미널이 고향으로 가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간신히 버스에 몸을 끼워 넣어도 성전까지 오는 시간이 5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래도 설쇠러 오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설렜다. 명절 고향 행렬은 행복한 행렬이었다.

그 시절에는 눈이 참 많이 왔다. 설 대목에 폭설이 내리면 말그대로 교통대란이었다. 한번은 버스가 풀치재를 넘어오다가 멈춰버린 바람에 무거운 짐을 들고 쌩쌩 찬바람을 맞으며 성전 고향마을까지 걸어온 적이 있다. 먼 길이었다.

그때 한밤중에 마당으로 들어오는 나를 보고 ‘어서 오니라, 어서 오니라’하시며 허겁지겁 따뜻한 아랫목으로 이끌어 주시던 어머님의 손을 잊을 수 없다.

나는 법조인생을 걸으며 이런저런 일을 많이 겪었다. 사법연수원을 수석으로 졸업해 곧바로 서울지방법원 판사로 부임했으나 얼마되지 않은 1977년 1월 박정희 정권에 의해 제주도로 쫒겨가야 했다.

이후 3년만에 영등포지원으로 발령 받았으나 전두환이 정권을 잡는 것을 보고 사표를 내 버렸다. 당시 영등포지원이 서울대학교를 관할했는데  ‘전두환 퇴진’을 외치는 학생들을 재판하는 것이 괴로운 일이었다.

나는 삶이 어렵고 힘들 때 늘 고향을 생각했다. 큰 결단이 필요할 때도 그랬다. 어릴적 고향마을 뒷산정상에 올라 멀리 아른거리는 강진만을 바라 보곤 했다. 고향 강진은 나에게 언제나 큰 힘이었고 나를 뒷받침해준 무언의 지원자였다.

설이 내일 모레다.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 갈 것이다. 고향은 많이 변했지만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다시 돌아가 힘을 얻는 기능은 변치 않는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누구나 반겨주는 곳이 바로 고향이다.

나는 지금도 고향에 갈 때마다 고향의 음식을 즐기곤 한다. 입맛에 딱 맞는 김치 한조각을 입에 넣으면 내 몸속에 움츠려 있던 고향의 추억들이 마치 말미잘의 촉수처럼 되살아나 꿈틀거린다. 나는 그런 과정이 내 몸이 회복되는 일이고 내 마음이 치유되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고향의 모든 것은 사람의 몸을 치유하는 신비한 힘이 있다. 고향의 산천, 고향의 발전 모습이 다 그렇다.   얼마전에 고향에 갔을 때 철도공사가 한창인 것을 보았다. 어릴적 가장 부러웠던게 영산포역에서 기차를 타던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얼마 있으면 강진읍에서 기차를 탈 수 있다고 하니 내 작은 소망이 이루어지는 셈이다. 또 올해부터 성전에서 광주를 잇는 고속도로 공사가 시작된다는 말도 들었다. 성전에서 출발해 30분이면 광주에 도착할 것이라 했다. 내가 광주에서 고등학교 다닐때 5시간 걸려 다녔던 곳이니 참 큰 변화다.

이 모든 것을 이루고 있는 고향사람들에게 큰 박수를 보낸다. 주민들과 함께 관련업무에 종사하는 한사람 한사람의 노력과 땀이 고향의 변화를 이끌고 있는 기관차들이다.

고향에서 희망을 볼 수 있는 것은 큰 보람이다. 우리 강진은 희망이 가득한 곳이다. 설날, 많은 사람들이 고향 강진에서 큰 희망을 가득안고 돌아가길 바란다.  

박재승 회장 약력
● 1939년 성전면 오산마을 출생
● 성전초, 성전중, 광주고 졸업
● 전 대한변호사협회장
● 전 민주당공천심사위원장
● 현 희망제작소 이사장
● 현 경찰개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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